〈 107화 〉 성흔을 삼키는 뱀(4)
* * *
로렌스는 운명이란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가 따르는 대륙의 종교, 칠교(七)에서도 운명 같은 건 없으며, 오직 신의 인도와 개개인의 노력으로만 미래를 개척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인연’이라는 단어는 싫어하지 않는다.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고, 언젠가 그런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과 맞닿은 수많은 사람들. 그 사이를 잇는 수많은 인연들.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건.
“신부님!”
역시, 자신이 맡은 자매님일 것이다.
신시아 생크 프랑. 성국의 마왕 후보자.
생크 수도원의 견습 수녀이자… 자신의 소중한 사람.
“신시아? 여긴 대체 어떻게….”
“느껴졌거든. 신부님이 준 이 머리핀.”
신시아가 자신의 머리에 달린 머리핀을 가리켰다.
몇 개월 전 로렌스가 선물로 준 제비꽃 머리핀.
“이걸 만지면 느낄 수 있어. 신부님이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한 건지. 신부님이 싸울 때면 항상 이 머리핀이 떨리니까.”
로렌스의 성력이 담겨 있는 머리핀은 인연을 잇는 매듭이 되었다.
서로 말을 하지 않아도, 상대가 위기에 처하면 달려온다.
어떤 때는 서로 등을 받치고, 또 어떤 때는 함께 발을 내디딘다.
그렇기에 이 둘은, ‘인연’이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도울 수 있는 것이다.
“우리 예비 마왕님도 오셨네? 아니, 아니지. 이젠 필요가 없으니까.”
마왕 후보자의 등장에 잠깐은 머뭇거린 로리안이었지만, 이내 다시 단검을 쥐었다.
‘키리에’라는 새로운 마왕 후보자가 생긴 지금, 신시아에 대한 일은 이제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졌으니까.
“하지만 그게 뭐? 아직 힘도 채 각성하지 않은 후보자가 도움이 될까?”
“…말이 많네.”
로렌스를 바라볼 때는 천사 같은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로리안을 바라보는 신시아의 표정은, 작은 악마라 해도 좋을 정도다.
잠시 눈을 감은 후, 신시아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흰자는 보라색으로 변했고, 눈동자에는 붉은 기운이 감돈다.
“……?”
로리안이 자신의 목을 붙잡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겁을 먹은 건가? 설마 그럴 리가.
저 눈 때문이다. 신시아와 눈을 마주치자, 눈치 챌 틈도 없이 목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마안(??). 강한 마력이나 마기 등, 특수한 조건을 지닌 자들이 발휘한다는 이능.
신시아가 가진 질식의 마안은, 상대에게서 호흡이라는 개념을 앗아가 버린다.
“커, 커흑, 후윽.”
신시아는 이 능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로렌스가 자신의 마안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죽여 마땅한 상대라도 고통을 주고 싶어 하지 않는 로렌스는,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일격에 처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질식의 마안처럼 고문 같은 능력은, 아무리 해도 로렌스는 좋아할 수 없었다.
“신시아.”
하지만, 지금이라면.
“감사합니다.”
지옥불보다 더한 고통을 주고 싶은 사람이, 아니, 괴물이 있다면.
“지금의 신시아의 눈, 정말로 예뻐요.”
숨을 못 쉬어 일그러진 로리안의 얼굴은, 로렌스에게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통쾌한 모습이리라.
마안의 소유자는 다른 이에게 괴물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이런 요사스러운 눈마저 사랑해준다니, 신시아에게 있어 로렌스의 저 말은 천금보다도 소중했다.
“제, 제법, 커흑, 하네, 마왕님….”
“조금이라도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거야. 몸 안에 남아 있는 공기를 전부 써버리면 바로 의식을 잃을 테니까.”
신시아가 마안을 써본 상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처음으로 사용한 상대는 아네모네.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한 건 에델과의 싸움에서.
하지만 그 두 싸움에서 신시아는 전력을 낼 수 없었다.
불쌍한 소녀였기에, 그리고 자신의 소중한 언니였기에.
아네모네와 에델을 상대로는 아무리 해도 마안을 완벽히 쓸 수는 없었다.
드디어, 질식이라는 저주를 온전히 쓸 수 있는 상대를 찾아낸 것이다.
“단죄.”
로렌스는 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다.
로리안이 피할 틈도 없이 앞으로 달려들어, 가까운 거리에서 거대한 참격을 빚어낸다.
“크윽!”
“당신도 사람인가 보네요. 겨우 숨이 막히는 정도로 움직임이 눈에 띄게 느려져선.”
“이런, 빌어먹을….”
만약 로렌스와 1대 1의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혼자가 아니다.
“벗어날 생각이야? 신부님한테서? 우스워라.”
신시아의 날개에서 피어나는 검은 깃털이 로리안의 움직임을 봉한다.
마기를 몸에 품은 자신에게 상처는 입히지 못해도, 강한 충격은 그것만으로도 로렌스에게 기회를 만들어 준다.
‘젠장, 젠장젠장젠장! 모처럼, 모처럼 맛있는 사냥감이 굴러들어 왔는데, 이대로 포기해야 한다고?’
이미 로리안의 머릿속에는 임무에 관한 것은 들어있지 않았다.
사냥. 만족감. 성취. 지극히 개인적인. 미련.
눈앞에 먹이가 있는데도 달려들지 못하는 들개는, 포악함만이 남은 채 울부짖었다.
“웃기지 말라 그래!”
로리안이 크게 외쳤다.
질식의 마안? 그런 건 더는 소용 없을 터이다.
“당신… 미쳤구나.”
로리안의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찌른 것이다. 이 짜증 나는 주박을 풀기 위해, 맨정신으로 자신의 목을.
“샌님, 하아, 샌님의 말이 맞았어.”
레서. 성국을 담당하는 마왕 추종자인 그가 어째서 로렌스를 가장 경계했는가.
성기사단장도 아니고, 이단심문회의 국장도 아니며, 잿빛 수도원장도 아닌 일개 신부를.
“너, 엄청 짜증 나는 녀석이구나아?”
눈앞의 신부는, 온몸을 검은색으로 도배한 저 신부는.
분명 걸림돌이 될 것이다. 운명의, 자신이 따르는 운명의 마왕에게 대적할.
“어째서 저런 괴물이랑 함께 있는 거지? 저건, 이제는 인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생물인데….”
로리안이 신시아를 가리키며 말한다.
괴물. 마왕 후보자는 인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구조로 되어 있다.
아무리 로렌스가 미쳐 있어도, 생존 본능이 있는 인간이라면 저런 물건을 떠안지는 않을 텐데.
“…알고 있어. 그 정돈.”
신시아가 주먹을 꽉 쥐며 떨었다.
자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이미 연구소의 철창 안에 있던 그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항상 자신을 받아주는 로렌스에게 미안한 감정이 드는 것도 당연…
“신시아는 괴물이 아닙니다.”
소중한 사람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로렌스가 고개를 가로젓는다.
“괴물은 당신이죠. 인간의 탈을 쓴 추악한 괴물.”
너무나도 확고한 로렌스의 대답.
그 모습에, 로리안은 기가 차 웃으며 말했다.
“하, 하하하하!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한테 그런 말을 듣다니.”
성직자는 신을 믿는다.
이미 모습을 감춘 일곱 신을, 마치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양 맹목적으로 따른다.
그런데 저 자는, 저 남자는 어째서.
“네가 믿는 건 신이 아니었구나. 그렇지?”
신이 아닌, 사람을 믿는 것인가.
“…더 이상 당신과 할 얘기는 없습니다.”
세바스를 치켜들고, 로렌스가 천천히 로리안에게 다가간다.
이미 많은 피와 기력을 소진한 로리안이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이번 일격으로 숨통을 끊을 수 있으리라.
그래. 자신의 형제였던 알베르의 복수도 포함해서.
“부디 지옥에는 가지 마십시오.”
로렌스가 검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니지.”
투웅.
세바스가 그대로 튕겨 나온다. 마치 로리안의 주위에 보호막이 둘러싸여 있는 것처럼.
로렌스가 뒤로 물러섰다. 무언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마기. 끈적하고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악한 부자연의 냄새.
“무언가를 믿는 건, 너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로리안의 몸이 일그러진다. 피부 위로는 푸른 핏줄이 돋고, 전신의 근육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난, 이런 나 같은 괴물이라도 믿을 수 있는 구석이 있더라고.”
로리안의 손에 쥐어져 있는 건 십자가였다.
칠교의 상징물로 쓰이는 십자가가 아니다. 사람의 뼈와 가죽으로 장식된 그것은.
“내가 믿는 건 두 가지야. 나 자신과….”
역십자가. 상징하는 것은 신의 대적자.
그리고 칠교의 일곱 신에게 대적하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리라.
“운명이지.”
검은 기운이 로리안의 몸을 감싼다.
애벌레의 모습은 버리고 날개를 펼치려는 곤충의 번데기처럼, 사악한 기운은 대지의 생명력을 빨아먹으며 그 몸집을 키워간다.
“신부님!”
“신시아, 마르첼로를 보호하세요! 지금 당장!”
로렌스의 말이 맞았다. 로리안은 인간이 아니었다.
본디 괴물이나 악마로 태어났어야 할 것이, 신의 실수로 인간의 몸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그러니.
[결국에는, 모든 것이 운명의 뜻대로 흘러갈 것이다.]
인간의 몸은 버리고, 우화의 과정을 거쳐 짐승으로 새롭게 태어나야 함이 마땅하리라.
“…차라리 지금의 모습이 낫군요. 당신한테는 이게 어울려요.”
검은 알이 깨어지고, 그 안에서 로리안이 모습을 드러낸다.
아니, ‘저건’ 로리안이 맞나? 저게 정말로 같은 생물이란 말인가?
[이 세계는 거짓으로 가득하다.]
알을 깨고 나온 것은, 날개가 달린 악마가 아니었다.
뱀. 최초의 인간을 낙원에서 추방한 사악한 짐승.
[그분은 위대하시다. 오직 그분만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세계를 만들어주실 것이다.]
인간이었다는 흔적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차라리 로리안이 스스로를 제물로 바쳐 악마를 소환했다고 하는 편이 빨라 보였다.
[어째서 저항하지? 어째서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지?]
“모습이 변하더니, 머리도 이상하게 변한 모양이네요. 보아하니 아까 손에 쥔 아티팩트를 매개로 변한 것 같고.”
로렌스가 할 일은 변하지 않는다.
마왕 추종자를 배제하고, 마르첼로를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시킨다. 단지 그것뿐이다.
“신부님, 저거, 분명 위험해…!”
“확실히 그렇네요.”
무시무시할 정도로 거대한 뱀이다.
옛 전승에 나오는 세계를 삼키는 뱀이라 해도 좋을 정도다.
“그래도.”
[운명을 거역하겠다면, 한 줌의 양분이 되어 세상에 보탬이 되어라.]
“거인보다는 작군요.”
로렌스가 검을 들었다.
신시아를, 그리고 마르첼로를.
신의 기적을 상징하는 십자가로 타락을 행하는 이교도를 벌하기 위해.
“우투시여, 들립니까?”
[…….]
“지금, 새로운 시련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
“그리고 저는.”
로렌스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앞을 향해 검을 들고 걸어갈 뿐이다.
“극복해 보이겠습니다.”
저 짐승을, 성흔을 삼키는 뱀을 쓰러뜨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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