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자매님에게는 마왕의 소질이 있다-109화 (109/109)

〈 109화 〉 살아가려는 자들(2)

* * *

솔직히 말하면, 위기였다.

달의 기사 크루거, 레고르의 거인, 공국의 마왕 후보자 아나스타샤.

지금까지 수많은 강적을 상대해 왔고, 어떻게든 승리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뭔가가 이상했다. 몇 번을 저 몸통에 검을 찔러 넣었음에도, 조금의 상처도 입히지 못했으니.

‘물리적인 공격은 통해.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순식간에 상처가 아물어버린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상처를 입는다면 장기전으로 끌고 가볼 텐데, 저 괴물은 그것조차 허락해주지 않는다.

혼자라면 진즉에 당해버렸을 테지. 신시아가 있어 마르첼로에게는 영향이 가지 않겠지만, 오래 버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너무 급하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 나를 도우러 온 건, 잿빛 수도원의 수녀, 란이었다.

아니, 정확히 표현하자면 ‘잿빛 수도원장’이 맞겠지.

성기사단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모든 수도사들의 꼭대기.

“중요한 건 상대를 파악하는 거예요. 통찰. 만약 당신이 수도사가 되었다면 가장 먼저 배웠을 개념이죠.”

“수도원장님은 저 괴물이 무엇으로 보이십니까.”

“별 거 있나요. 뱀이죠. 아주 크고, 독기를 잔뜩 머금은 뱀.”

그렇게 말하는 도중에도 란은 묵묵히 뱀의 공격을 받아내었다.

그것도 아무것도 없는 맨손으로.

분명 로제리오가 말했었지. 수도사는 맨손일 때 가장 강력하다고.

“음, 아무래도 머금은 게 하나 더 있는 모양이네요.”

잠깐 동안 수십 번의 공격을 흘려내며 란이 말한다.

“마기예요. 그것도 평범한 마물과는 다른, 진하고 깊은 마기. 표현하자면 ‘원액’이라는 단어가 좋겠네요.”

“원액…. 수도원장. 저 자는 제가 알던 마왕 추종자와 같은 무리라고 추정됩니다. 마왕과, ‘운명’의 마왕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자와 같은 집단.”

“이런 커다란 뱀이요?”

나는 란에게 보고 들은 것을 설명했다.

역십자가 문양을 자신에게 박아 넣더니, 그대로 저런 거대한 뱀의 형상으로 변했다는 내용을.

“…곤란하게 되었네요.”

“알고 있는 거라도 있습니까?”

“비슷한 내용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어요. 500년 전, 그러니까 두 번째 용사가 나타났던 그 시대에 기록된 문헌이었죠.”

숨을 한 번 고른 후, 란이 담담히 말을 잇는다.

“마왕이 된 거예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죽은 마왕의 껍데기를 덮어쓴 거죠. 그래 봤자 원본의 2할도 되지 않는 힘이겠지만.”

“그럼 제 검이 통하지 않는 건….”

“알고 있잖아요. 이 세계에서 오직 용사만이 마왕을 상대할 수 있는 이유.”

어째서 신들은 ‘용사’라는 존재를 우리에게 내려 보냈는가.

인간들이 힘을 합친다면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고 한 건 바로 그들이었을 텐데.

“오직 성검만이 마왕의 목숨을 앗아갈 수 있습니다.”

성검. 검의 형태를 한 희망을 다루게 하기 위함이다.

이미 퇴치된 모든 마왕은, 하나도 빠짐없이 성검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니까.

“신시아의 힘을 이용하는 건.”

“힘들겠죠. 어째서 역사 속의 마왕이 서로 반목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나요? 죽일 수 없기 때문이에요. 몇 날 며칠을 싸우든 간에, 끝없는 마기만 있다면.”

저건 마왕이다. 500년 전의 마왕이 남기고 간 파편이다.

란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것이다. 지금 이대로라면, 저 괴물을 쓰러뜨릴 방법은 찾을 수 없다.

“가능한 방법은 둘이에요. 죽이지 않고 봉인하거나, 아니면 용사가 올 때까지 기다리거나.”

용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알고 있지 않나. 남왕국에 있다. 이 소식을 바로 전한다고 하더라도 족히 일주일은 넘게 걸리겠지.

“하나뿐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제 물러나 주시겠어요?”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형식적으로 미소를 짓고는, 란이 그대로 내 몸을 장외로 밀쳐낸다.

복부에 통증이 밀려오기도 전에,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해진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짓을? 둘이 함께 싸워도 모자랄 판에.

“수도원장님?”

“이건 제법 복잡하고 중요한 술식이라서요. 로렌스는 이미 본 적이 있죠? 마도 공화국에서 한 마탑주가 내린 결단.”

어떻게 마왕의 각성을 미연에 막았는가.

누구도 상대할 수 없는 재앙이 되기 전에, ‘갈망의 베론’을 인간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수 있었는가.

“…목숨을 희생했습니다.”

흑색 마탑주 길버트. 그가 자신의 모든 목숨을 소진해 술식을 구현해 냈기 때문이다.

“맞아요. 그거랑 비슷합니다. 물론, 이건 옛 문헌에 적힌 방법이라 방식은 많이 다르지만.”

“허튼 소리하지 마십시오!”

란에게 외친다. 어째서 또 목숨을 바쳐야만 하는가.

희생은 숭고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배워 왔다.

하지만 악을 막기 위해서 반드시 사람의 목숨을 바쳐야 한다면, 그건 흑마법에 나오는 인신 공양과 무엇이 다르지?

“쉿. 이제부터 집중해야 하니까요.”

“로제리오를! 다른 수도사들의 힘을 빌리면…!”

“그 친구들도 바쁘거든요. 대체 무슨 일인지, 수도원의 결계를 뚫고 바깥에서 마물이 밀려오고 있으니까.”

란이 인을 맺는다. 자신을 기점으로 바닥을 향해 뻗어나가는 빛줄기.

그것은 하나의 성법진이 되어, 이 어두운 구덩이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이 공간을 통째로 봉인의 터로 삼겠어요.”

죽을 생각이다. 저 수녀는,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치려는 생각이다.

“그럼 당신은….”

“죽겠죠. 뭐, 이것도 결국 높으신 분의 결말 아니겠어요?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르는 법이니까.”

‘자, 이제 방해하지 말아주시겠어요’라는 말과 함께, 란은 투명한 벽을 세워 나의 개입을 철저히 막았다.

“어서 나가세요. 위에 있는 구멍을 통해서. 신시아가 있으니까, 다행히 그것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겠네요.”

뭘 저리 웃어대는가. 어째서 자신의 목숨을 저리 쉽게도 내놓으려 하는가.

2년 전이었다면, 이단심문관 로렌스는 저 말을 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신부 로렌스는, 조금은 눈을 뜬 나는 이 상황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기 싫다. 그럴 수 없다. 또 내 앞에서 누군가가 죽는 건, 이제는 두 번 다시….

“란 님도 아직 바보 같네요.”

마르첼로의 말이, 뒤에서 들려온다.

“이러면 저 같은 어린애한테 무슨 교육이 되겠어요. 이제야 막,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절뚝거리며 걸어오는 마르첼로의 어깨에는 성흔이 환히 빛난다.

교황. 전대 교황의 모습이 어렴풋이 겹쳐 보였다.

“로렌스 형. 교황이 되겠다고 했으니까, 그럼 제가 형보다 높은 사람이죠?”

“…….”

“그럼 부탁, 아니지, 명령 하나만 할게요.”

마르첼로는 힘겹게 란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바보 누나를 구해주세요.”

다만 마르첼로의 바람이 아니다.

나도, 그리고 뒤에서 주먹을 쥐고 몸을 떠는 신시아도.

여기 있는 모두가 그녀의 희생을 바라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어쩌면, 저 안에 있는 란도 포함해서.

“우투시여, 제 말이 들립니까?”

어떻게 하면 란이 의식을 포기할까. 어떻게 하면 저 괴물을 땅으로 돌려보낼 수 있을까.

란이 말했지. 마왕을 죽일 수 있는 건 오직 성검뿐이라고.

어째서 성검만이 마왕의 숨통을 끊을 수 있는 걸까. 평범한 검과 성검이 가진 차이는?

품질, 탄생 설화, 사용자의 역량, 혈통, 잠재력, 마력….

그리고 신성(??).

일곱 신이 벼려낸 것이 성검이다. 그렇다면 성유물은?

우투가 말했다. 잠재력은 충분하다고. 이 검이 있다면, 신시아의 안에 있는 마왕도 베어낼 수 있을 거라고.

“꾸지람은 몇 번이고 듣겠습니다. 한심스럽게 당신에게 의지하는 제 모습은, 이미 충분히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한 순간, 단 하룻밤의 기적이라고 해도.

“그럼에도 청합니다. 부디 제게.”

내 손에 있는 검이, 세바스(안식일)가.

“악을 물리칠 힘을.”

성검이 되기를.

시련의 신에게, 투쟁의 신에게 간절히 빈다.

세바스의 빛이 꺼진다. 거의 모든 힘을 써버렸기 때문일까.

우웅.

그리고, 다시 빛이 돌아오기 시작한다. 여태까지 보았던 그 어떤 순간보다도 화려하게.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합격이다.]

우투의, 성유물에 담긴 잔재의 목소리다.

[성유물의 주인이여. 그래, 로렌스. 너 말이다.]

시간이 멈춘 듯, 나와 우투만이 대화를 이어 나간다.

[넌 크나큰 시련을 받았고, 그 시련을 극복해냈다.]

‘하지만, 아직 시련은 저 앞에….’

아직 뱀은 쓰러지지 않았다. 시련은 끝나지 않았을 텐데.

[아니, 저건 시련조차도 되지 않아. 사람을 무는 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지.]

악(?)은 시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시련이 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 그 자체가 곧 시련일 테니.

[너는 선택의 기로에 섰다. 그리고 답을 골랐지. 저 수녀를 구하겠다는 것. 그게 정답이라고는 할 수 없지. 하지만 확실한 건, ‘오답’은 아니라는 거다.]

‘그게 시련이라는 말씀입니까?’

[삶의 모든 순간이 곧 시련이다. 내 가치 기준은… 조금 색다르거든.]

세바스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어두운 구덩이를 감싼다.

뱀의 독기도, 란이 그린 성법진도 모두 덮을 만큼 커다란 빛이다.

[그러니 ‘대가’를 주마. 너와, 그리고 너의 성유물에 새로운 힘이 깃들 것이다.]

단지 손잡이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우투가 말한 ‘새로운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간절히 바라는 것. 내가 원하는, 그리고 여기 있는 모두가 원하는 소원.

성검.

[이 검은 성검의 성질을 가진다. 물론 그릇 자체의 한계 때문에 완벽하지는 않아. 하지만 아주 잠깐, 찰나에 가까운 순간이라면­.]

세바스의 모습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겉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내면, 검을 든 나만이 알 수 있는 변화다.

[이 검은, 세바스는. 성검에 한없이 가까운 모습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다시 시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로렌스, 말했잖아요! 어서 도망치세요!”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교황님의 명령이 있어서요.”

어쩌면 모든 것이 환상일지도 모른다. 내 머리가 착란을 일으키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만약 조금 전의 그 상황이 꿈이 아니라면.

“신시아, 부탁이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투명한 벽을 가리킨다.

“저 결계를, 보기도 싫은 의식을 부숴버리세요.”

“응, 알겠어. 신부님의 뜻이라면 뭐든.”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신시아가 날개를 조작해 하나의 창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대로.

푸스슥.

“시, 신시아? 로렌스! 지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건가요!?”

“말했잖습니까. 교황님의 명령이라고요.”

몇 번의 파열음 끝에, 마침내 사람 하나 들어갈 만한 작은 구멍이 생겨났다.

신시아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 안으로 들어간다.

“지금 이게 대체 무슨…!”

“말도 하지 않고 그런 짓을 하면, 로제리오 녀석이 분명 슬퍼할 겁니다.” “……!”

로제리오. 그 이름을 듣자 란의 몸이 떨리기 시작한다.

사실은 싫었던 거겠지. 작별 인사도 없이, 이대로 그 녀석의 곁을 떠나기는.

“하지만, 이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제겐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수도원, 다른 형제, 자매님들의 목숨.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대륙의….”

“그렇다면 앞으로도 계속 지키십시오.”

란의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뱀의 앞에 선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란이 말릴 새도 없이, 한때 인간이었던 괴물이 내게 이를 드러내고 다가온다.

[어째서 도망치지 않지?]

“방금까지만 해도 죽일 듯이 달려들었으면서, 갑자기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어리석었지. 이 몸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분’과 가까워졌어. 그러곤 알게 되었지. 넌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란 걸.]

운명, 운명, 그놈의 운명.

저 지독한 운명론자의 궤변을 듣는 것도 이제는 질렸다.

[넌 가을이 끝나는 날, 사랑하는 자의 품에 안겨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그런 ‘운명’인 거야.]

“개소리는 다 했습니까?”

[하지만 그 전에, 네가 더 이상 ‘운명’을 흐리지 못하게 팔다리를 끊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독기가 몸속 가득히 퍼진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이건 괴롭다.

하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간다.

원하는 건 오직 단 한 순간, 유성우와도 같은 반짝임뿐이다.

[운명의 뜻에 거스를 생각은 마라.]

뱀이 다가온다. 거대한 입을 벌리며,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가득한 독기를 뿜으며, 사악한 마기를 빨아들이며.

“로렌스!”

“신부님!”

뱀은 사냥꾼이다. 약한 생물의 숨통을 조이며, 이내 먹잇감을 통째로 삼켜 버리지.

하지만, 이 세상에 영원한 사냥꾼은 없다.

“5형(?).”

‘단죄’. ‘수호성인’. ‘성역’. ‘정화의 불길.’

모든 것이 시련이었고, 그것을 뛰어넘은 증표였다.

일곱 신께 감히 빌기를. 지금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 하늘의 별처럼.

[이제 그만 포….]

“유성.”

밤하늘을 비추는 존재가 되기를.

* * *

거대한 빛이 하늘 높이 솟아오른다.

수도원의 작은 방에 몸을 숨긴 작은 소녀가 고개를 든다.

자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빛에 이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소녀가 문예에 능한 아이였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표현했겠지.

용사가 이 땅에 발을 내디뎠노라고.

그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저 빛을 만든 주인은 그녀가 생각하는 용사는 아니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예쁘다.”

저 기적은, ‘용사’라 불리기에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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