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나는 실망해서 그만 끝내려고 했으나
* * *
한밤중이었다.
조셉은 노트북 앞에 앉아서 볼펜을 물고 있었다.
조셉은 입에 문 볼펜으로 노트북 자판을 눌렀다.
입에 문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서 타자를 치는 것은 힘들었다.
딱딱한 볼펜을 오래물고 있기가 힘들었고
볼펜의 길이가 길어서 자판을 제대로 누르기 힘들었다.
조셉은 볼펜을 뱉고 다음에는 립밤을 물고 타자를 쳐봤다.
립밤은 길이가 짧아 자판을 제대로 누르기는 좋았으나
딱딱해서 물고 있기가 힘들었다.
그 다음으로 시도해본 것이 아기들이 쓰는 실리콘 포크였다.
실리콘 포크를 입에 물고 타자를 쳐보니 꽤 괜찮았다.
길이가 짧아 자판에 힘이 잘 전달 되었고
말랑말랑해서 오랫동안 물고 있기도 나쁘지 않았다.
게다가 실리콘 소재라 물에 삶아서 소독도 할 수 있었다.
포크를 입에 물고 자판을 눌러 문장 몇개를 더 써본 조셉은 만족하며 노트북을 껐다.
날이 밝았다.
아침햇살이 방을 환하게 비추며
마리안느를 살며시 깨웠다.
기분좋게 일어난 마리안느는 날아갈 것 같았다.
간만에 푹 자더니 몸이 개운했다.
괴롭히던 근육통도 사라졌다.
몸도 마음도 최고였다.
[구더기짱 좋은 아침!]
문을 열고 들어온 조셉을 보자 어제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마리안느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빨갛네? 혹시 열이 있나?]
조셉이 마리안느의 이마를 만졌다.
[만지지마!]
마리안느가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건강한거 같네? 그럼 맘마 먹으러 가자?]
조셉이 마리안느를 안아서 밖으로 나갔다.
아침을 먹고 씻은 후
조셉은 마리안느를 탁자 앞에 앉혔다.
[오늘은 타자연습을 할꺼야.]
[타자연습?]
조셉은 노트북을 가져와서 탁자에 내려놓았다.
[구더기짱도 컴퓨터 정도는 쓸 수 있어야지.]
[.........너 지금 놀리는거야?]
[무슨 소리야 구더기짱! 내가 구더기짱을 뭐하러 놀리겠어.]
조셉은 양심에 장애가 있는 듯 했다.
[이런 몸으로 어떻게 타자를 치란건데…..]
마리안느는 짧막한 팔을 흔들며 항의했다.
[걱정마. 내가 다 생각해서 준비했으니까.]
조셉은 아기들이 쓰는 실리콘 포크를 꺼냈다.
[이걸 물고 타자를 치는거야.]
[이걸로 치라고?]
[한번 해봐.]
조셉은 마리안느 입에 포크를 물려주었다.
마리안느는 입에 문 포크로 키보드를 눌러서 타자를 쳐봤다.
의외로 타자가 잘 쳐졌다.
[아주 잘하네? 역시 구더기짱이야!]
포크로 타자를 치는 마리안느를 보고 조셉은 박수를 쳤다.
마리안느는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노트북은 인터넷이 끊겨있었다.
[그럼 구더기짱한테 과제를 내줄께.]
(과제?)
조셉은 프린트를 1장 꺼냈다.
프린트에는 문장들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여기 있는 문장을 모두 따라서 써봐.]
[이걸 전부 치라고?]
[열심히 연습해야 타자 실력이 늘지.]
손으로 타자를 치는 것도 연습해야 실력이 늘어나는데
입으로 치는 것도 연습해야 실력이 늘어나는 것이 당연하다.
[1시간 줄테니 그 안에 다 써봐.]
[1시간 안에 이걸 다 쓰라고?]
문장은 모두 50개였다.
마리안느는 1시간안에 다 쓸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만약 시간 안에 다 못하면.]
[못하면?]
[그러면 구더기 만두를 만들거야.]
구더기 김밥에 이어서 구더기 만두라니 대체 그게 뭐란 말인가.
처음 듣는 단어에 마리안느는 당황했다.
뭔지는 몰라도 그냥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 힘내! 구더기짱!]
조셉은 그렇게 말하며 방으로 들어갔다.
마리안느는 포크를 입에 물고 허둥지둥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1시간이 지났다.
[구더기짱 다 썼어?]
조셉이 마리안느에게 물었다.
조셉은 마리안느가 치고있던
노트북 화면을 확인했다.
그러나 마리안느는 아직 절반 밖에 쓰지 못했다.
[구더기짱 설마하니 만두가 되고 싶어서 일부러 안쓴건 아니지?]
[그럴리가 있겠냐. 싸이코 새끼야!!!]
마리안느가 외쳤다.
포크를 오랫동안 물고 있어서 턱이 아팠다.
[벌칙은 벌칙이니까 어쩔 수 없네. 만두피를 가져와야겠다.]
조셉은 방으로 들어가더니
커다란 흰색 베개커버를 가져왔다.
베개커버를 본 마리안느는 구더기 만두가 뭔지 알거 같았다.
[........그 안에 가두려는거야?]
[구더기짱 눈치 좋구나? 그렇게 눈치 좋은 아이가 너무 좋더라.]
조셉은 베개커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럼 잠시만 들어가 있자?]
[싫어!!!]
조셉은 바둥거리는 마리안느를 베개커버에 강제로 넣었다.
그리고 지퍼를 닫았다.
[짜잔! 이러면 구더기 만두 완성!]
조셉이 신나는 목소리로 외쳤다.
[풀어줘! 내보내줘!]
베개커버 속에서 마리안느가 허우적거렸다.
마구 꿈틀거리는 베개를 구경하던 조셉이 말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까 집어넣기만 하는 건 재미없더라고.]
[여기에다 뭘 더 하려는건데 미친새끼야!!!]
마리안느가 베개커버 속에서 소리쳤다.
[그래서 준비했어.]
조셉은 공책을 하나 꺼냈다.
[구더기짱이 중학생 때 썼던 일기장을 창고에서 발견했거든.]
(뭐…….라고???)
마리안느는 당황했다.
[뭐가 써져있는지 궁금했지만 몰래 읽는건 너무하다 생각했거든. 그래서 생각해봤는데 본인 앞에서 당당하게 읽으면 상관없지 않겠어?]
[그게 뭔 개소리인데!!!]
[그럼 낭독해볼테니 그 안에서 잘 들어봐.]
[이새꺄!!! 읽으면 죽여버린다!]
마리안느는 베개커버 속에서 나가려고 애썼으나
바깥에서 잠근 지퍼를 열 수 없었다.
[어디보자….어디서부터 읽어볼까…..]
조셉의 낭독이 시작했다.
수컷사마귀는 암컷에게 잡아먹힌다
사랑을 했다. 그리고 죽는다
자신까지 내던지는 사랑
나도 그런 사랑을 하고 싶다.
[사마귀를 보고 쓴거야? 귀엽네.]
[멋대로 읽지말라고!!!]
마리안느가 소리치든 말든
조셉은 계속해서 읽었다.
초등학생 시절은 편했었는데
중학생이 된다는 건 어려운거구나
그때가 좋았지.
[중학생이 뭐라는거야. 아주 그냥 인생 다 산 것 같네.]
조셉이 웃으며 말했다.
[읽지마! 읽지말라고!!!]
조셉은 계속해서 읽었다.
스테이크를 먹고싶었는데
햄버거를 먹고있다.
나 어떡하지?
현실이란 이런걸까?
하지만 햄버거도 맛있는걸.
[혹시 햄버그 스테이크가 먹고 싶었어? 오늘 저녁은 그걸로 만들어줄까?]
[나도 몰라! 그만 읽으라고!!!]
[어디보자 다음은……….]
[읽지 말라고 했잖아!!!]
사람들의 머리가 슈크림으로 변한다면
순수한 인간이 될 것 같다
새하얗게 된 머리로 살아가면
이 쓰디쓴 세상도 조금은 달콤해지겠지.
[오! 이거 괜찮네. 잘 썼는걸?]
[제발 그만해!!!]
팬더꼬리는 까만색이 아니라 하얀색이었다
조금 충격~
까만건 팬더를 보는 시선이었다.
북극곰이 사라진다면
곰을 하얗게 색칠하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건 새하얀 곰일뿐
북극곰은 아니겠지.
[이것도 좋네? 구더기짱 시인해도 되겠다]
[....그만 읽으라고.....]
나라는게 뭘까?
고민하는 나도
애써 웃는척 하는 나도
한밤 중 몰래 우는 나도
모두 나다.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를 아는 척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역.겨.우.니.까.
시를 읽은 조셉은 미친듯이 웃었다.
[으하하하!!! 아이고 배야!!!]
조셉은 너무 웃겨서 배를 감쌌다.
[역, 겨, 우, 니, 까, 여기에 점은 왜 찍은건데?]
조셉이 웃으면서 외쳤다.
[죽인다!!!! 죽여버릴거야!!!]
마리안느는 베개커버 속에서 마구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웃겨 죽을꺼 같아 하하하하!!!! 숨쉬기 힘들어서 죽을 것 같….하하하하!!! 살려줘!!! 하하하!!!]
마리안느는 베개커버 속에서 미친듯이 날뛰었다.
조셉도 그 옆에 쓰러져서 배를 붙잡고 마구 웃었다.
[으흑…..아하하...엄청 웃겨서 죽을 뻔했네. 그럼 다음은…]
어느정도 진정된 조셉은 계속해서 읽기 시작했다.
햄스터는 마치 찹쌀떡 같다
해바라기씨를 가득 문 햄스터를
따뜻하게 데워주면
씨앗딸기찹쌀
[............이게 뭐야.]
조셉에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마구 난리치며 소리치던 마리안느가 조용해졌다.
눈을 잃은 사람은 꿈을 볼 수 있는가?
삶에 대해 생각해봤는데
고양이를 원심분리기에 넣고....
[......원심......원심분리기?....이게 대체.....뭔......]
조셉은 읽던 걸 멈추고 다음장을 넘겨봤다.
그 다음을 읽던 조셉은 공책을 닫았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그러고 있던 조셉은 마리안느 쪽을 보았다.
베개커버 속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셉은 그 안을 열어보는게 무서웠다.
조셉은 천천히 지퍼를 열었다.
그 안에서 마리안느는 가만히 있었다.
조셉은 마리안느를 꺼내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공책을 들고 혼자 정원으로 나갔다.
어제 비가 내린 땅은 아직 살짝 젖어있었다.
조셉은 라이터를 꺼내 공책을 태웠다.
오랫동안 묵혀있던 공책은 빠르게 타들어갔다.
공책은 순식간에 재로 변하면서 사라졌다.
다시 거실로 들어온 조셉은 마리안느에게 무릎 꿇었다.
마리안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멋대로 봐서 미안하다.....]
조셉이 마리안느에게 사과했다.
마리안느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타버린 공책처럼
마리안느의 자존감도 불타 사라진 듯 했다.
그날 저녁에 조셉은 햄버그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조셉은 햄버그를 잘게 잘라 마리안느 입에 넣어주었다.
마리안느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먹기만 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