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 너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 * *
그새끼들이 너의 편지를 무시했을 때
나의 복수는 길을 잃었다.
너를 괴롭히는 것은
더이상 나의 복수가 아니었다.
추잡한 헛짓거리
정신 나간 미친놈의 광대짓
광인의 갈 곳 없는 분노
단지 그뿐이었다.
네가 만약 마리안느로 죽는 것을 택했다면
나는 내 목에 올가미를 걸을 생각이었다.
나같이 벌레나 다름없는 인간이
도롱이벌레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죽는다.
복수에만 매달렸으니 그리 죽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나에게 어울리는 최후라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구더기로 사는 것을 택했다.
벌레 같은 삶이라도
어떻게든 살아보기로 말이다.
그래 살아보자
한번 살아보자
이런 것도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같이 살아보자
침대 위에 마리안느가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조셉이 앉아있었다.
조셉은 마리안느의 배를 문지르고 있었다.
[구더기짱~ 프니프니~]
조셉은 멍이 든 마리안느의 배를 문질러주었다.
지가 발로 차서 생긴 멍을
지가 문질러주다니
그야말로 병주고 약주고 같은 상황이었다.
[.......프니프니가 대체 뭔가요……]
아까부터 배를 문지르면서
조셉이 프니프니~ 프니프니~ 거리는게 귀에 거슬렸다.
대체 저 좆같은 소리는 왜 내는걸까?
다 큰 남자가 프니프니~ 거리는 꼬라지는 맨정신으로 지켜보기 힘들었다.
[배를 문지를 때는 프니프니~라고 말하면서 문질러주는거야.]
[.....그런가요? 처음 듣는데.....]
[미친새끼들이나 지키는 룰이니까 그렇지.]
[아하…! 그래서…]
[대놓고 납득하지는 말아줄래?]
마리안느의 보들보들한 배를 쓰다듬으며
조셉의 마음은 평온해졌다.
마리안느의 배를 문지르면
마리안느의 살 냄새가 은은하게 퍼졌다.
갓난아기 살갗 냄새
뽀송뽀송하게 난 솜털들이
조셉의 손길을 따라
이리저리 흩날리며
마리안느의 살갗향을 펴트리고 있었다.
그런 냄새를 맡으며 배를 문지르고 있자니
농부가 맷돌로 콩을 갈아내는 것과
마리안느의 배를 문지르는 것이
별로 다를 것 없이 느껴졌다.
농부가 콩을 갈아 허기를 채우듯
마리안느의 배를 쓰다듬으면
공허한 마음이 메꿔지는 듯 했다.
마리안느는 그런 손길이 무서웠다.
조셉의 쓰다듬는 손길이
갑작스럽게 주먹으로 변해서
떨어지는 운석처럼 복부를 내리친다고 해도
별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예상할 수 없는 미친놈이 배를 쓰다듬는 것이
편안하고 기분 좋을리가 없었다.
애초에 배에 멍이 든 것 부터가
이 새끼 때문이란 걸 생각하면
상당히 어이없는 일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배를 만져진다는 것이
마리안느는 불쾌했다.
배에 멍이드는 것도
배를 쓰다듬는 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저 좆같은 새끼 기분에 따라 정해지는 문제였다.
내 배는 더이상 나의 배가 아니었다.
저 흉악한 해적한테 나포당해 빼앗기고 말았다.
이게 내 몸이다.
손에 바로 닿던 것들이
이제는 내 손과 함께 떠나버렸다.
바로 내 눈앞에 있는 것들도
이제는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내 몸은 더이상 내것이 아니게 되버렸다.
나 스스로 배를 감싸는 것 조차 할 수 없다.
내 눈과 배의 거리는 1M도 안되지만
너무나 멀어서 닿을 수 없게 느껴졌다.
지구에서 안드로메다도 이리 멀지는 않을 것이다.
안드로메다는 멀지만 시간만 있다면
언젠가는 도착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조셉은 배를 쓰다듬다가
마리안느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감아주고 말려줄 때 마다 생각한 건데
마리안느의 머리는 너무 길게 자라있었다.
[구더기짱 머리가 너무 길게 자랐네?]
(이번에는 머리인가……)
마리안느는 또 이새끼가 머리에다 뭔 짓을 할까
그것이 걱정 되었다.
[머리 좀 잘라야하지 않겠어?]
[......굳이 왜?.........요.]
마리안느의 머리는 허벅지까지 내려왔다.
미용실을 갈 수 없으니
머리가 상당히 길게 자라있었다.
마리안느는 사고를 당하고 나서는
출장 미용사를 집으로 불러 머리를 자르고 관리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부르는게 싫어져서
머리가 마음대로 자라도록 내비두고 있었다.
어차피 머리를 예쁘게 꾸며봤자
집에만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뭐하러 자른단 말인가.
[너무 길잖아. 내가 잘라줄께.]
[안해도 되거든………요.]
[아니 근데 너무 길잖아 좀 잘라야겠어.]
그렇게 말하며 조셉은 가위를 가져왔다.
[머리 자를 줄 알아…요?]
[아니? 한번도 잘라 본 적 없는데?]
조셉의 대답에 마리안느는 경악했다.
[그냥 길이만 줄일 거니까 상관없잖아.]
대체 이 무슨 자신감인지
마리안느는 기가 찼다.
[혹시 싫어?]
조셉은 손가락으로 가위를 빙글빙글 돌렸다.
[......알아서.....하세요.]
마리안느가 마지못해 따랐다.
[오늘은 날도 좋으니까 정원에서 자르자.]
[정원에서 자르면 잘린 머리카락을 치울 필요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며 조셉은 정원 잔디밭으로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그 위에 마리안느를 데려와 앉혔다.
의자 뒤로 풍성한 마리안느의 머리칼이 드리워졌다.
황금빛 폭포수가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관리 받지 못 해서
푸석푸석해졌지만
그래도 빛을 잃지는 않았다.
햇볕에 비쳐져서 반짝이는 머리카락을
조셉은 천천히 살펴보았다.
마리안느의 머리칼은 마치 한줄기 강 같아서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그대로 빠질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강이라면 빠지고 싶었다.
그대로 빠져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조셉은 한손에 가위를 들었다.
다른 한손으로 머리칼을 잡았다.
싹둑.
그 소리와 함께 시작되었다.
참 희한한 광경이었다.
넓은 잔디가 깔린 정원에서
미친 남자가 가위를 들고
사지가 없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잘라주고있다.
남자는 웃고있었고
소녀는 울고 있었다.
천국도
지옥도 아닌
현실에서 펼쳐지는 풍경이었다.
마리안느는 울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떨어질 때 마다
마리안느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머리카락이 싹뚝 싹뚝 잘릴 때 마다
전혀 아플리가 없는데
너무나도 아프게만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잘릴 때마다
소중한 것들이 잘리는 것 같았다.
왜이리 아프게 느껴지는 것일까
어째서 눈물이 나오는 걸까
기껏해야 머리카락이 잘리는 것 뿐이다.
머리카락은 다시 자란다.
근데 왜……어째서……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고개만 숙이고 있다가
짧아진 허벅지를 봤더니 생각이 났다.
소중한 것들이 싹둑, 싹둑, 잘려진 경험을
이미 겪은 적이 있었다.
그런 경험을 몸은 기억하고 있었다.
싹둑, 싹둑, 머리카락이 잘리는 소리가
어쩐지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너무나도 아프게만 느껴졌던 것이다.
항상 이랬었다.
사지가 잘려나갔을 때도
혼자 이 집에 버려졌을 때도
자신을 구더기라 부르는 미친 남자가 왔을 때도
팔다리는 떨어져서 어디론가 가버렸는데
가족도 친구도 떨어지고 혼자 남았는데
쓸데없는 것들은 끈질기게 남아서
나를 괴롭힌다
오랫동안 신경쓰지 못 해서
푸석푸석해지고 엉망진창이지만
자신의 머리카락이 저런 녀석한테 마음대로 잘려지는 것이
인형처럼 가지고 놀아지는 것 같아서
나는 결국 이녀석에 노리개구나
이런 녀석에게 좋을대로 다뤄지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그런 처지가 아프게만 느껴져서
차라리 그때 같이 가버렸으면
그랬다면
괴롭지는 않을텐데
아프지는 않을텐데
그렇게 많은 것들이 썰려지며 떨어져 나갔는데
자존감이니 긍지니 인격이니
그런건 싹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마음 한구석에 조그맣게 남아서
쓸데없이 마음만 남아서
이렇게 싹둑싹둑 잘려지네
이렇게 썰려나갈 줄 알았더라면
진작에 스스로 잘라버릴 걸 그랬다고
그랬다면 눈물은 나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텐데
괜히 그런 걸 간직하고 있어서
이렇게 아파하다니
대체 왜 남아서
쓸데없이 붙어서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아파하고 울고있다.
난.....무엇을 위해....
살아남은걸까……?
마리안느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조셉은 생각했다.
아름답다고.
가위질을 할 때마다
눈부신 물결이 잘려나가
바닥에 쌓이고 있었다.
비가 내리면 낙엽이 떨어져 쌓이고
머리카락이 떨어져 쌓이면 눈물이 내려온다.
비슷하면서도 서로 다르게 내려오는 것이
조셉에게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별로 신기할 것도 없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다.
눈물과 빗물은 전혀 달랐기에
서로 다르게 내려왔다.
그 둘은 비슷하지만 전혀 달랐다.
비는 하늘에서 내리고
눈물은 사람에게 내린다.
비는 대지를 적시고
눈물은 마음을 적신다.
비는 그냥 물이었고
눈물은 감정이 담겨있다.
빗물은 구름이 넘치면 떨어지지만
눈물은 감정이 넘치면 떨어진다.
낙엽은 때려서 떨어졌고
눈물은 마음을 때렸기에 떨어졌다.
나무는 겨울을 견디려고 잎을 자르듯
마리안느는 삶을 견디려고 머리카락을 잘랐다.
조셉에게 잘려서 떨어진 머리카락은 수북히 쌓였다.
머리카락이 떨어진 자리는
황금이 쌓인 것 같았다.
아름다웠다.
싹둑, 싹둑,
가위질을 할 때마다
마리안느의 머리카락이 떨어지는 광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황금빛 실타래가 흘러내리는 것 같아서
떨어지는 것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
떨어진다는 것이 추한 것만은 아니구나
만약 나도 떨어진다면
이렇게 아름답게 떨어질 수 있다면
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셉은 머리카락을 잘랐다.
몇번의 가위질이 끝났다.
[자! 다 됐어! 구더기짱!]
조셉은 그렇게 말하며 가위질을 멈췄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리안느앞에 거울을 놓아주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머리카락은
어깨 근처로 올라와 있었다.
올라온 머리카락을 보고
마리안느는 생각했다.
머리카락은 잘려서 떨어졌는데
올라왔다고 느끼지다니
짧아진 머리카락이 올라온거라면
내 팔과 다리도 올라와서 짧아진 것일까.
그런 씁쓸한 생각이 머리를 훑고 지나갔다.
[어때. 이제 좀 시원하지?]
조셉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마리안느는 훌쩍이고 있었다.
[이제 집에 들어가서 씻자?]
긴 머리카락을 잘랐으니
머리를 씻겨주고 말리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나 마리안느의 기다란 머리칼을 말리는 일이즐거웠던 조셉은
짧아진 머리칼이 조금은 아쉽게 느껴졌다.
어차피 머리카락은 다시 자란다.
그러면 다음에는 미용사인 친구를 부르자
그러면 마리안느를 아름답게 꾸며줄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조셉은 마리안느를 안고 집으로 들어갔다.
두사람이 떠난 정원에는
마리안느의 머리카락이 떨어져있었다.
마치 은행잎이 쌓인 것처럼 보였다.
머리카락들은 마리안느보다 먼저 죽어서
정원의 흙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부는 바람을 타고 날아가
머리카락의 주인은 가지 못하는
먼 곳으로 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날아가 도착한 곳에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어서
그 밑에서 썩어가 나무의 양분이 된다면
진짜 은행잎이 될 수도 있겠지.
그러나 말도 안되는 소리다.
머리카락이 날아가서
은행나무 밑으로 떨어진다고?
그래서 은행잎이 될꺼라고?
그게 뭔 헛소리인가?
그래도 말이지.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이
나는 일어났으면 좋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