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그러자 내가 너에게 저지른 것들이 떠올라서
* * *
마리안느가 화상통신을 이용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고
어느정도 시간이 흘렀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제법 익숙해졌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을 시작하면서
어떻게 수업할지 난감해 하던 마리안느였지만
조셉의 도움을 받으면서
둘이서 함께 수업계획을 짜고
다른 강의들을 참고해가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만들어갔더니
마리안느는 원격 수업을 나름대로 능숙하게 할 수 있게 되었으나
그래도 마리안느는 손발이 없기에
수업 중간중간 일이 생기면
조셉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수업 도중 인터넷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마실 음료가 필요하다던가
그 밖에 자잘한 도움을 받아야 하므로
마리안느가 수업하는 동안
조셉은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마리안느가 수업을 진행하는 걸 멀리서 지켜보았다.
그렇게 별다를 것 없이
마리안느가 원격수업을 하던 도중이었다.
마리안느는 수업하던 도중
설명을 너무 오래 했는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려고 빨대가 꽂힌 물컵을 보았으나
물컵에 물이 얼마 없었다.
그러자 마리안느는 조셉을 불러서
물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하자.
조셉이 컵을 가져가서 물을 담은 뒤
다시 마리안느에게 가져다주었다.
물을 가져다주면서 조셉이 화면에 나오자
어린 여학생이 마리안느에게 물었다.
[저분은 누구예요? 선생님 남친?]
[아, 아니야! 나 남자친구 없어.!]
마리안느가 당황해서 재빨리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선생님 가족이에요?]
가족이냐 묻는 학생의 말에
마리안느는 잠시 생각했지만
무슨 사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시간이 끝나고
마리안느는 꺼진 노트북 화면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마리안느는 저 사람과
한지붕 아래에서 같이 산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저 사람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어디서 살았는지
학교는 어딜 나왔는지
가족관계는 어떤지
애인은 있었는지
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싫어하는 음식은 뭔지
어린 시절 꿈은 뭐였는지
소방관은 어쩌다 그만두었는지
마리안느를 어떻게 알게 되었고
왜 찾아온 것인지….
온통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그리고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누군가 물어보길
당신과 내가
서로 어떤 사이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마리안느는 아무것도 몰랐다.
당신과 나는
대체 무슨 사이일까…?
우리 둘 사이에는 무엇이 있는 걸까…?
수업이 끝나고
저녁밥을 준비하는 조셉에게
마리안느가 물어보았다.
[사람들이 우릴 보고 무슨 사이냐고 물어보면 뭐라 대답해야 해요?]
[글쎄다?]
마리안느의 질문에
조셉은 잠시 생각하더니
너무나 쉽게 대답했다.
[고용주랑 가사도우미?]
당근을 칼로 썰면서
조셉이 단칼에 대답했다.
그러자 마리안느가 당황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고용주는 우리 부모잖아요...]
[어....그러네...그럼....]
조셉은 잠시 고민하더니
대답을 내놓았다.
[아기랑....베이비시터...?]
그 대답을 들은 마리안느가 어이없다는 듯이
조셉에게 소리쳤다.
[내가 왜 아기예요!]
[아니 그렇지만 아기 돌보는 것 같잖아….]
조셉은 마리안느를 돌보면서
어라? 이거 완전 아기 돌보는 것 같네?
그런 생각이 종종 들곤 했다.
마리안느가 배밀이를 하면서 거실을 기어 다니거나
아직 솜털도 빠지지 않은 마리안느의 부드러운 뺨을 만질 때마다
마리안느가 아기처럼 느껴졌다.
혼자서는 밖으로 못 나간다는 점까지 말이다.
[아기라니 너무해요!]
아기 같다는 조셉의 말에
마리안느가 삐져서 고개를 돌렸다.
마리안느의 저런 모습까지
그야말로 아기 같았다.
두 사람은 저녁식사를 마친 뒤
조셉은 욕실에 들어가서 목욕물을 받았다.
커다란 욕조였지만
마리안느가 빠지지 않도록
찰랑찰랑 얕게 받아진 목욕물은
마치 아기를 목욕시키려고
준비하는 것 같았다.
조셉은 마리안느에게 다가가서
마리안느의 옷을 벗기고
마리안느를 목욕시킬 준비를 했다.
처음에는 조셉이 옷을 벗길 때마다
변태라고 소리치며 저항하던 마리안느였지만
이제는 별 저항없이 가만히 있으면서
조셉이 옷을 벗겨주길 기다렸다.
벌거벗은 마리안느를 욕조에 넣어주고
마리안느가 따스한 물에 몸을 담구는 동안
조셉은 욕실 밖으로 나가서
설거지를 끝마쳤다.
그런 다음 시간이 흐르자 다시 욕조로 가서
마리안느의 머리를 감겨주었다.
조셉이 머리를 감겨주던 중
마리안느가 말을 꺼냈다.
[저기 말이죠…궁금한 게 있는데요….]
[뭔데?]
마리안느가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몇 살이에요?]
마리안느의 질문에
조셉은 잠시 당황해서
머리를 감겨주던 손을 멈추었다.
[내 나이를 몰랐었나?]
둘이 만난 지 몇 개월이 지났건만
마리안느는 조셉의 나이가 몇 살인지 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치만...얘기 해주지 않으셨잖아요....]
나이뿐만 아니라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어디서 살았는지
조셉이 어떤 사람인지
마리안느는 거의 알지 못했다.
[당신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어요....]
마리안느가 조용히 말을 이어나가자
둘만 있는 욕실에서
마리안느의 서글픈 목소리가 천천히 퍼져나갔다.
[나이는 몇 살인지…좋아하는 음식은 뭔지…. 어디서 뭘 했는지…. 아무것도 몰라요….]
그리고 어째서 내게 찾아왔는지
마리안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마리안느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조셉은
다시 마리안느의 머리를 감겨주면서 말을 이어나갔다.
[굳이 알 필요있냐? 그냥 이대로 지내면 되는 거지.]
[그게...뭐에요...]
마리안느가 불만스러운 듯이
조셉에게 투덜거렸다.
그러나 조셉은 별말 없이 머리만 계속 감겼다.
[그럼 말이죠…. 이것만 알려줘요….]
마리안느가 잠시 숨을 고르더니
힘겹게 질문을 꺼냈다.
어딘가 힘이 들어간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이다.
[나한테 갑자기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거예요...?]
그러자 조셉은 또다시 손을 멈추고
가만히 있었다.
그와 함께 욕실이 고요해졌고
천장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만이
욕실에서 울려 퍼졌다.
그렇게 침묵하던 조셉은
잠시 뒤 입을 열었다.
[....내가 너한테 뭘 잘해줬냐...?]
조셉이 무심한듯이 말하자
마리안느가 대답했다.
[그치만....처음 만났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푸으으아아...!]
마리안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갑자기 마리안느 머리 위로 물이 뿌려졌기 때문이다.
조셉이 샤워기 물을 틀고
마리안느에게 물을 뿌렸다.
[갑자기 물을 뿌리면 어떡……. 앗 차거!!!]
이번에는 갑자기 머리 위로 차가운 물이 쏟아지자
마리안느가 가볍게 비명을 질렀다.
조셉이 수도꼭지 방향을 돌려서
차가운 물을 마리안느에게 뿌린 것이다.
[다 씻었으면 얼른 꺼져. 나도 씻을 거야.]
그러나 마리안느는 혼자서 꺼질 수가 없었고
조셉이 욕실에서 데리고 나가야 했다.
이런 점이 그야말로 아기 같았다.
조셉은 마리안느를
욕실에서 꺼낸 다음
수건으로 몸을 말려주고
온몸에 로션을 발라주었다.
로션을 바르느라
마리안느의 몸에 조셉의 손이 스칠 때마다
마리안느는 간지러운지 몸을 살짝 떨었다.
로션을 발라 준 다음
조셉은 헤어드라이어로
마리안느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헤어드라이어의 바람을 타고
마리안느의 향기가 퍼져나갔다.
뽀송뽀송한 향기가
마치 아기한테서 나는
그런 향기 같았다.
조셉은 마리안느에게 잠옷을 입히고
이불에다 눕혔다.
[나는 아직 자고 싶지 않아요…]
마리안느가 아기처럼 칭얼거렸다.
[어쩌라고.]
조셉은 그런 마리안느에게 차갑게 대꾸한 다음
방문을 닫으려고 문고리를 붙잡았다.
방문이 닫히기 전
마리안느가 말을 꺼냈다.
[가고 싶은 곳 있으면 말하라고 했잖아요...]
마리안느가 말을 꺼내자
조셉은 방문을 닫으려던 손을 멈추었다.
마리안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살았던 곳에 가보고 싶어요...]
그런 마리안느의 부탁을 들은 조셉은
마리안느에게 물었다.
[왜 하필 그런 곳을 가고 싶어하는데?]
조셉의 물음에 마리안느가 답하기를
[당신이 살던 곳을 보면서....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요...]
그런 마리안느의 대답을 들은
조셉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문고리만 붙들고 있었다.
그런 조셉에게
마리안느가 재차 물었다.
[데려가 주실 거죠...?]
그런 마리안느의 물음에도
조셉은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갔다.
어두워진 방 안에서
마리안느는 따뜻한 온기를 간직한 채
저 남자가 살던 곳은 어떤 곳일지상상하면서
그렇게 조용히 잠에 빠져들었다.
마리안느의 방에서 나온 조셉은
욕조에다 목욕물을 더 받았다.
성인 남성이 몸을 푹 담그기에는
목욕물 수위가 너무 낮았다.
욕조를 가득 채울 만큼
목욕물이 받아지자
조셉은 옷을 벗고 욕조에 들어갔다.
욕조에 몸을 담그자
조셉이 들어가서 늘어난 부피만큼
목욕물이 욕조 밖으로 넘쳐흘렀다.
목욕물이 출렁거릴 때마다
출렁거리는 물결을 따라
기분좋은 향기가 퍼져나갔다.
마리안느의 살갗에서 나던
부드러운 향기였다.
마리안느의 향기가
아직 욕실에 남아서
욕실에서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그런 향기에 취하며
조셉은 욕조에 잠겼다.
뭔가 안심이 되는
그런 향기였다.
그런 향기를 맡고 있으면
어린 시절 슬픈 기억들을
일하면서 겪었던 괴로운 경험들을
잠시나마 잊혀지면서
편안해지는가 싶다가도
마리안느를 괴롭히던
자신의 행동들이 떠올라서
편안하면서도
괴로운
그런 복잡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저 가만히
욕조에 잠겨 있었다.
그것 말고는
대체 뭘 해야 할지
아무것도 몰랐다.
이렇게 있으면서
그대로 가라앉고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욕실에 아직 남아있는
마리안느의 향기를 맡으면서
가만히
그렇게 가만히있으면서
단둘이
조용히 살아가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