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섬의 심장 (3) 호수(下)
* * *
"아......"
망각의 신전관 레이비어의 얼굴이 점차 굳어지기 시작한다. 해룡의 모습으로 변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몸이 떨려오는 것을 주체할수가 없었다.
"말, 말도 안돼......"
그녀의 앞에 서있는 것은 한마리의 거대한 드래곤.
그것도 그냥 드래곤이 아닌 드래곤들의 시조라고 볼 수 있는 로드급 드래곤이었다.
「......」
자신의 3배가 넘는 크기,
윤기나는 아름다운 검정색 비늘,
그리고 칠흑의 거대한 뿔까지.
"......"
신화속에서만 듣던 존재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서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
레이비어를 향해 엄청난 표효를 내지르는 아드레나인. 그 서슬에 그 거대했던 호수의 물도 두갈래로 갈라졌다가 본래 모습으로 돌아온다.
'미친.....'
그런 아드레나인을 보며,
레이비어는 기겁한 표정과 함께 한껏 몸을 움츠러든다.
'로드급 드래곤이었다고? 그 꼬마가?'
생긴것은 그저 맹한 여자아이였는데?
그게 폴리모프 상태였다니, 거의 눈속임 수준이잖아?
"하하......"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이없는 상황에, 허탈한 한숨을 내뱉는 그녀. 곧이어 다시금 해룡의 모습에서 인간의 상태로 돌아온다.
"......"
용의 모습으로 계속해서 있는다는 것은 아드레나인에게 적대감을 가지고 덤빌것이라는 드래곤들만의 암묵적인 룰. 아드레나인의 모습을 보자마자 무언가 상황이 잘못됐음을 깨닫고는 곧바로 폴리모프를 푼 것이었다.
「......」
'어, 어떻게 해야하지...?'
떨리는 동공을 애써 붙잡으며 생각하는 레이비어.
저 다크드래곤 로드는 자신이 모시는 지모신의 심장 조각을 요구하였다.
지모신은 레이비어 본인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부모와도 같은 존재. 아무리 로드급 드래곤의 부탁이라고 하더라도 쉽사리 넘겨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
허나, 아드레나인의 명을 거역하게 된다면 그것은 레이비어 자신이 해룡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위계 서열이 엄격한 드래곤의 사회에서 로드들의 명령은 절대적이니까.
"......"
신념이냐, 규율이냐,
선택을 해야했다.
「크르르륽......」
"윽,"
기다리는 것이 귀찮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아드레나인. 레이비어는 식은땀을 흘리며, 일단은 손을 펼친 뒤 레반하워즘의 심장 조각을 구현해낸다.
「......」
레이비어의 손에서 생성된 붉은색 보석조각을 보고는 흥미를 보이는 다크드래곤 로드. 망각의 신전관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거대한 드래곤을 쳐다보았다.
「......」
"아......"
아드레나인은 자신의 거대한 머리를 레이비어의 코앞까지 가져다댄다. 덕분에 레이비어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드래곤의 뜨거운 콧김.
'일,일단 무어라 말을.....'
싸움으로는 결코 승리를 챙길 수 없었으니,
레이비어가 할 수 있는 것은 세치혀를 사용한 협상.
아드레나인을 적당히 달래서 돌려보내는 것이 신념과 규율 모두를 챙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좋,좋아.'
잔뜩 긴장한 채로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아까 아드레나인의 모습을 보았을때 그다지 똑똑해보이지는 않았으므로, 말을 잘만 한다면 능히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을것이었다.
"저, 저기......"
「......」
"일단 진정하고, 협, 협상을......"
두손을 뻗어올리며 진정하라는, 자신에게서 물러서달라는 제스쳐를 취해보이는 레이비어. 허나, 아드레나인은 그녀가 하는 말따위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곧바로 자신의 입을 벌려 그녀의 오른팔을 물어 뜯어버린다.
"......어?"
......어깻죽지에서 느껴지는 무언가 뜯겨져나가는 기분. 이어서 분수와도 같이 뿜어져나오는 검붉은 액체들.
"어라?"
레반하워즘의 심장조각이 들린 자신의 오른팔이 아드레나인에게 먹혔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악!!"
상황을 인지하자,
물밀듯이 몰려오는 엄청난 고통.
레이비어는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고는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른다. 그녀의 새하얗던 사제복이 흙과 새빨간 피로 물들어져갔다.
「......」
"으으으......"
공포에 질린 눈으로 아드레나인을 바라보는 레이비어. 황급히 뒷걸음질치며 거리를 벌려보지만, 아드레나인에겐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는 행동이었다.
「......」
"아아......"
이어서 아드레나인의 입이 다시금 열렸고,
레이비어어 시야는 어둠으로 물들었다.
***
.
.
.
"응?"
어디선가 들려오는 드래곤의 표효소리에, 나는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드래곤, 드래곤이라,
이 섬에 존재할 드래곤은 아무리봐도 아드레나인밖에 없는데. 설마 벌써 신전관을 헤치운건가.
"거, 참."
'부하들이 너무 유능하다!'라는 제목으로 책 한권 쓰고싶어지는군. 나는 아직 신전관의 'ㅅ'자도 보지 못했는데 말이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는 나.
내가 맡은 구역은 '정글'.
왜 하필 수풀이 빽빽하고 길도 찾기 어려운 정글을 맡았냐 하면은, 그야 내 최애캐 베를레히리가 지키고있는 구역이기 때문이었다.
"에휴......"
...신세한탄과 함께 다시금 주변을 둘러본다.
앞뒤좌우 모두 풀과 나무로 덮인 똑같은 풍경.
반딧불이들과 자체적으로 빛을 내는 식물들이 많아 그 풍경 하나는 정말 예뻤지만, 딱히 길이 닦여있는 것도 아니고, 지도가 구체적인 것도 아니여서, 정글 한가운데에 위치한 신전을 찾아가는데에는 꽤나 어려움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 불태워버리고싶지만......"
마음 같아서는 운석이라도 하나 떨어뜨려 아예 깔끔히 숲을 정리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글을 배회중인 베를레히리도 같이 죽을수도 있었으므로 섣불리 스킬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한숨을 내뱉으며 얼마나 걸었을까, 이윽고 내 앞에 등장한 탁 트인 공터와 그 위에 위치한 조그마한 신전.
"드디어!!"
나는 그 답답했던 정글을 빠져나왔다는 기쁨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임 캐릭터를 실제로 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서둘러서 신전으로 달려간다.
"이게......"
내 앞에 놓인, 2층 건물 정도 크기의 작고 아담한 흰색 신전. 별 이상이 없지 않는 이상, 아마도 이 안에서 베를레히리가 기다리고 있겠지. 뭐, 딱히 나를 반겨줄것 같지는 않을 것 같긴 하다만.
"좋아!"
.......나는 얼굴 한가득 설레임을 안은채,
조심스레 베를레히리가 지키고 있을 신전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