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섬의 심장 (4) 정글
* * *
"......"
통풍이 잘 안되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정글의 특성인 것인지, 덩굴들이 뒤덮은 새하얀 신전은 너무나도 습하였다.
"게임에서는 깔끔했던 것 같은데......"
분명 어라이징 내에서는 꽤나 쾌적했던 보스 스테이지였던 것 같은데, 현실로 구현되면서 그런것일까, 지금은 깔끔하기보다는 너저분한 느낌이 더욱 강하게 전해져왔다.
"어후......"
끈적한 공기에 불쾌감을 잔뜩 표출하며,
나는 천천히 신전 안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
오랫동안 관리가 잘 안 된 것인지, 코를 찔러오는 퀴퀴한 냄새.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라기보다는 쓰레기장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정도로 고약한 냄새가 퍼져있었다.
"이 무슨......"
나는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신전 내부를 돌아다닌다.
신전에는 보통 신전관, 그러니까 이곳 같은 경우는 베를레히리가 상시 거주하며 청소를 할텐데? 어째서 이렇게 더러운거지? 설마 베를레히리만 스폰이 안된건가?
[......]
"......!!"
갖가지 생각을 하며 걷다보니 들려오는 무언가의 기계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것이 전자기기, 그러니까 TV의 소리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텔레비전...?"
신전의 구석진 방 하나에서 쏟아져나오는 불빛과 왁자지껄한 소리들. 더불어 와그작,하고 과자를 씹는 소리와 깔깔 웃어대는 소리까지 뒤섞여 들려왔다.
[아... 이걸 여기서 끊네.]
"......?"
그리고, 꽤나 익숙한 목소리, 그러니까 내가 그토록 찾고 싶어하는 인물의 목소리가, 방 문틈으로 흘러나와 내 귓가에 박힌다.
"베를레히리...?"
정말 좋아했기에,
그렇기에 몇만번이나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
고작 2~3년이 됐다고 까먹었을 리는 만무.
다시 들어도 저 목소리는 베를레히리의 목소리였다.
"......"
나는 발소리를 줄인채 살금살금 TV불빛이 세어나오고있는 방을 향해 다가간다. 벽에 몸을 딱 기댄채, 조심스레 방 안을 들여다보자, 그곳에 있는 것은,
[다음화......]
"......?"
어두운 방, 여기저기 과자봉지가 휘날리는 바닥에 누운채 TV 리모콘을 두드리고있는 베를레히리. 평소 입고있던 흰색의 사제복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의 그녀는 헐렁한 나시에다가 어디에서 구한건지 모를 돌핀팬츠만을 착용하고 있었다.
[......]
"......어라?"
헐렁한 나시 사이로 들어난 배를 긁적긁적 긁으며 과자봉지를 들쑤시는 그녀.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그녀를 보는 내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저게, 베를레히리...?"
내 기억의 그녀하고는 너무나도 다른데?
내 기억속의 베를레히리는 늘 멋진 기술들로 침입자들을 막아내는, 츤데레 공주님 이미지였는데?
어째서 저리 백수가......
[......어이,]
"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있을 그때,
베를레히리가 갑자기 일어나며 뒤를 돌아본다.
나름 소리를 죽이고 몰래 다가왔다고 생각했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순간 적지않은 당혹감이 몰려왔다.
"어... 안녕?"
[안녕은 무슨 안녕.]
나의 말에 까탈스럽게 대꾸하는 그녀.
다행히 건방진 성격만큼은 게임 속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너, 베를레히리, 맞지?"
무슨말을 꺼내야될지 몰라 재빠르게 도출해 낸 멍청한 질문들. 나의 질문에, 베를레히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베를레히리 맞아.]
"......"
긴 연보라색의 생머리,
매혹적인 몸매,
피곤해보이는 얼굴까지.
확실히, 복장은 다르긴했어도 베를레히리 본인인 것은 확실해 보였다.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인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이라......]
더벅한 머리를 긁적이며 잠시 고민을 하는 그녀. 그러더니 이내 오른손을 펼치고, 빛을 내뿜으며 무언가를 생성해낸다.
[보나마나 이걸 가지러 온거겠지.]
"......!!"
그녀의 손에 들린것은 아름다운 붉은색의 보석 조각. 즉, 그녀가 지키는 레반하워즘의 심장 조각.
[받아.]
"윽,"
이어서,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내게 보석조각을 던지는 베를레히리. 자신이 목숨을 걸고 지켜야하는 섬의 심장을 너무나도 쉽게 건네주자,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본다.
"아니, 이걸 왜......"
[그거 가지러 온 거 아니야?]
"아니 맞긴 한데,"
[그럼 가져가.]
"뭐 싸움 같은거는...."
[귀찮아.]
"귀찮다고? 신전관이?"
[드라마 봐야 돼.]
"......"
상상도 못한 대답들만을 내놓는 베를레히리. 그녀의 대답을 들은 나는 변화 사태 이후 처음으로 '정신적 데미지'라는 것을 입은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잠자는 숲속의 공주로 유명했던 캐릭에서그저 한 명의 백수가 되어버린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 맞은 듯 한 충격을 느꼈다.
[됐지? 볼 일 끝났으면 가 봐.]
"......"
다시금 바닥에 드러누으며,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서는 말하는 베를레히리.
이어서 리모콘을 몇번 꾹꾹 누르더니, VOD로 드라마 한 편을 재생하기 시작한다.
[......]
"......"
그녀가 튼 것은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로맨스 판타지 드라마. 이후 깔깔 웃는 소리와 과자 씹는 소리만이 방 안을 메꿀 뿐, 그녀는 나에게 그 어떠한 관심도 주지 않았다.
"아......"
그 고귀하고 아름다웠던 신전관이 대체 어쩌다 저렇게 망가진거냐. 보나마나 저 TV가 문제인거 같은데, 도대체 저건 어디서 구해와서 또 어떻게 설치한거야?
"하아....."
내 최애캐가 망가지는, 마치 내 딸자식이 일탈의 길로 빠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 같은 비참한 마음에, 나는 입술을 깨물고는, 그녀에게, 베를레히리에게, 정신이 돌아올만한 한마디를 던져준다.
"그 드라마,"
[......?]
"주인공빼고 전부 죽음."
[......???]
......침묵이 방 안을 뒤덮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