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상하이 공방전 (3)
* * *
"죽어."
"......!!"
이시연의 짧은 기합 후, 무서운 기세로 휘둘러져 오는 얼음 대검. 그 크기에 걸맞지 않은 이질적인 속도에, 라이린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
감각 스탯으로 검의 궤도를 예측, 이어서 재빨리 몸을 굴려 피하자, 옆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소리의 크기로만 보잖니 아스팔트를 뚫고 지면까지도 박살이 난 것만 같은 수준.
'힘만 무식하게 세가지고......'
들기도 버거워보이는 대검을 손쉽게 붕붕 휘두르는 이시연에, 라이린 쉬옌은 입술을 깨문다. 자신이 회피와 감각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면, 저쪽은 힘과 근력에 투자한 것인가.
"......"
이시연의 공격을 피한 후,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라이린 쉬옌. 그래도 자신을 잡기에는 너무 둔한 공격이다. 총알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을 키운 그녀인데 고작 물리공격에 맞을리는 전무. 그녀는 한심하다는 듯 한 목소리로 이시연에게 말했다.
"아무리 노력해봤자 그런 둔한 무기로는 소용없을겁니다."
애초에 피할 수 없는 광범위 소멸기를 시전하지 않는 이상, 우위를 점하는 것은 라이린. 랭킹 1위 세르레니아 루인과 몇몇 시즌 보스들을 제외하면 단순한 근접전에서는 패배해본 적이 없는 것이 그녀였다.
"흥."
허나, 어이없는 웃음을 내뱉는 이시연.
그녀는 자신에 가득 차있는 라이린의 왼팔을 가리키며,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네 왼팔부터 보고 얘기하지그래?"
"......?"
뜬금없는 이시연의 말에, 라이린 쉬옌은 서둘러서 자신의 왼팔을 더듬거려본다. 그러자 그녀의 손가락에 느껴지는 감촉은 마치,
"......얼음?"
스멀스멀 올라오는 냉기와, 감각이 없어진 왼팔.
그녀가 자신이 왼팔이 꽁꽁 얼었음을 깨닫는데까지는 얼마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얼었다고?"
당황한 표정을 짓는 라이린.
대체 언제? 설마 방금 공격?
"설마 그 검......"
평범한 롱소드에 얼음 조각들을 강제로 붙여 변화시킨 이시연의 대검. 검날에 얼음을 붙인 이유가 단순히 휘두르는 용도를 위해가 아니라 주변에 있는 것들을 얼리기 위함이었던건가?
"정답."
"......"
라이린의 의문에 이시연은 경쾌한 목소리로 답해준다. 그녀가 만든 '프로즌 바스타드'의 능력은 반경 5m 이내의 사물을 얼리는 것. 애초에 휘둘러서 라이린을 맞추겠다는 의도는 추호도 없었으며, 그녀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 발동한 스킬이었다. 비록 1회용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하였지만, 그래도 라이린의 왼팔을 얼렸으니 그래도 꽤나 성공적인 수.
"마지막 기회야, 길드 후퇴시켜."
"큭......"
이시연은 얼음 조각이 떨어져나가 다시금 본래의 모습을 되찾은 롱소드로 라이린을 겨눈다. 그러나 이를 무시하고 어떻게든 얼음을 깨뜨려보려고하는 맹인 여성. 하지만 별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 해결을 하려면 꽤나 시간이 걸릴 것만 같았다.
"포션이나 힐러 없이는 힘들걸?"
그런 자신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이시연. 라이린 쉬옌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자신의 지팡이검을 고쳐잡는다.
"하......"
확실히 한쪽 팔 없이 전투에 임하기엔 너무나도 리스크가 크다. 균형감각을 잡는 것은 물론이오, 움직임에 제한 또한 크게 걸릴 것이었다. 더불어 자신의 장점인 회피와 민첩에 크나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하겠지.
......허나,
"상관없습니다."
라이린은 태연한 얼굴로 답해보인다.
랭킹 3위가 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전투를 치루며 올라왔고, 온몸에 마비독이 퍼지는 최악의 상황 또한 겪어보았다. 한쪽 팔이 얼려지는 패널티 정도야 충분히 이겨낼 수 있을 터였다.
"오호......"
이시연은 힘차게 무기를 집어드는 라이린을 흥미로이 바라본 뒤, 턱을 긁적거리며 말한다.
"뭐, 포부는 좋은데 말이야,"
누가 대형 길드의 부길드장, 세손가락 안에 드는 플레이어 아니랄까봐 참으로 끈기있는 마인드였지만,
"그런 것들도 상대가 고만고만할때나 먹히는거야."
"......"
현 라이린이 마주보고 있는 것은 이시연 자신.
개인 랭킹은 7위로 라이린보다는 낮은 수치였지만, 어라이징의 베타 테스트 시절부터 플레이한 유저였고, 동시에 모든 길드전과 보스 토벌전에 참가했던 고인물 중의 고인물이었다.
랭킹이야 의무감도 없었고, 너무나도 바쁜 길드장 활동 덕에 키우지 않았던 것 뿐, 마음만 먹는다면 순식간에 올릴 수 있는게 랭킹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타 길드장들도 마찬가지 일 터.
"너도 의문같은거 들어본 적 있을거 아니야. 네 길드장은 그렇게 강한데 왜 랭킹이 그모양인지."
"......"
라이린 쉬옌이 모시는, 화양연화의 길드장 웡 치챠오. 마찬가지로 베타 테스트 시절부터 존재한 그는 이시연보다도 압도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작 랭킹은 16위로, 열손가락 안에도 들지 못하였다.
"길드 랭킹이라면 모를까, 수시로 바뀌는 것이 유저 랭킹인데, 그건 별로 중요치도 않은거지."
...뭐, 그래도 1위는 중요하지.
세르레니아 루인. 걔는 미친년이다.
홀로도 일개 길드를 박살낼 정도의, 잘하면 시즌 보스급의 힘을 지닌 전대미문의 플레이어. 다른 랭커들은 무시할 수 있어도 그녀만큼은 웃으며 넘길 수 없었다.
"......뭐, 어쨌거나,"
예리한 롱소드로 라이린을 겨누며,
상큼한 목소리와 함께 말하는 이시연.
"군사 물려. 옥시안님이 오면 다 잘 풀릴거야."
인외변화자들을 이주시킬 레반하워즘을 공략하러 간 옥시안. 지금은 화양연화가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치고 이 타협책을 수락하지 않을까봐 섣불리 말을 못하고 있긴 하였지만, 옥시안 그녀가 온다면, 일단 오기만 한다면 그들도 알아서 물러날, 아니, 억지로라도 물러날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지금 상태로라면 승리를 쥐는 것은 아리아 길드일 터. 허나 화양연화측이 협조를 해준다면 조금이라도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을테니, 이시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번이라도 후퇴를 권유해본다.
"싫습니다."
"하아......"
허나, 단호히 고개를 젓는 라이린 쉬옌.
너무나도 완강한 그녀의 태도에, 이시연은 짜증난다는 듯 땅바닥을 발로 걷어찬다.
"왜? 이대로가면 너가 질거야! 질거라고!"
병사들의 질은 아리아 길드가 압도적으로 높고, 그 숫자마저 별 차이가 나지 않는다. 유일한 변수인 라이린도 자신의 앞에선 그저 하룻강아지일 뿐. 라이린 쉬옌 본인도 분명히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터였다.
"근데 대체 왜 그러는데? 언니 말 좀 들어라, 어?"
"......"
"......?"
......대답대신 멍하니 손가락으로 저 멀리를 가리키는 라이린 쉬옌. 이시연이 천천히 그녀의 손끝을 따라가보자, 그곳에는 상하이 도심이 위치하고 있었다.
"상하이, 시내......?"
급격히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하는 이시연.
곧이어 한가지 경우의 수, 어째서 라이린이 기를 쓰고 이곳에 머물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가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너 설마......?"
"......맞습니다."
다급히 묻는 이시연의 말에, 이번에는 라이린이 웃으며 답을 해준다. 곧이어, 상하이를 넘어 이곳 고속도로까지 퍼져나오는 굉장한 폭발음.
[투쾅!]
"......!!"
이시연이 황급히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눈에 훤히 보이던 고층빌딩 하나가 불에 타들어가며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설마 저희 길드원의 숫자가 고작 이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건 아니겠죠."
"......씨발."
양동작전.
라이린이 이곳에 군사를 이끌고 온 것은, 이시연으로 하여금 정작 중요한 상하이로의 공격을 눈치채기 못하게 하기 위함.
"오늘은 인민해방군까지 동원이 되었고, 저희도 최정예 병력을 투입했습니다. 아무리 링 메이라 하더라도 이번엔 버티지 못하겠죠."
"......"
상하이에 머무는 인외변화자들 중 전투가 가능한 자는 이미 초반에 다 사망하였고, 사실상 지금 도시를 지키는 것은 시즌 보스인 링 메이 하나. 그녀마저도 계속된 공격에 이미 피로가 누적될 정도로 누적되어 아마 이번 공세를 이겨내기엔 힘들어보였다.
"썅......"
당장 지원을 해줘도 모자랄 판에, 적의 잉여 병력이랑 노가리나 까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박영준!"
"넵!"
"당장 애들 이끌고가서 상하이 지켜! 빨리!"
"네, 넵!"
서둘러서 부하에게 지원을 가보라고 명을 하지만, 이미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아리아 길드의 발을 묶어두는 라이린의 작전이 성공적으로 먹힌 것.
"시연씨, 당신이야말로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
"저런 박멸되어야 할 바퀴벌레들을 지켜줄 바엔, 그냥 저희를 도와 명성이나 얻도록 하십시오."
......자신의 팔을 얼려놓았던 얼음이 서서히 녹는 것을 확인하며, 이시연에게 말을 건네는 라이린 쉬옌. 역으로 조롱을 당하자, 이시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포기하십시오."
"......"
"아리아 길드의 인원으로는 이곳과 상하이, 두곳 다 막을 수 없다는거,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순식간에 상황이 반전되어 라이린이 이시연에게 항복을 권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이야......"
그녀의 말마따나, 화양연화의 유일한 장점이자 아리아 길드가 결코 넘을 수 없는 요소, '인구수'. 처음부터 이 점을 이용하여 양동작전을 버릴리라고는 생각치도 못하였다.
"머리 좀 많이 썼다 너?"
"......감사합니다."
탄식이 섞인 이시연의 칭찬에, 영광이라는 듯 고개를 과장되게 숙여보이는 라이린 쉬옌. 그리고 이번에는, 이시연이 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켜보인다.
"...근데, 뒤 좀 봐."
"......예?"
......갑자기 힘이 솟아오르는 듯 한 이시연의 어조.
라이린은 상황에 걸맞지 않은 그녀의 명쾌한 목소리에 아리송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고,
"......!!"
꽤나 큰 무언가가, 아니, 엄청나게 커다란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