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후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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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외같은 같잖은 소리말고 당장 길드원들 물리세요."
조용히, 감정없는 목소리로 라이린 쉬옌의 귓가에 속삭인다. 시력을 잃은 그녀인만큼 청각이 더 발달했을테니, 전해져오는 내 감정 정도는 읽을 수 있겠지.
"......"
대답 대신 흠칫 몸을 떠는 라이린 쉬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무언가 사고회로가 황급히 돌아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큭......"
고뇌어린 신음소리가 고속도로에 울려퍼진다. 그리고 곧이어 흘러나오는 기나긴 침묵을 깨는 목소리.
"알, 알겠습니다."
"......"
"이곳에서도, 도심부에서도 당장 길드원들을 철수시키겠습니다. 그러니 이것 좀......"
"흥......"
라이린 쉬옌은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중력장이 버겁다는 듯 다급하게 말한다. 역시 물리적인 압박만큼 효과적인게 없다고, 나는 앙칼진 한숨과 함께 발동중이던 중력장 전부를 해제했다.
"허억, 허억,"
"으으으윽......"
"아, 드디어......"
"......"
그러자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들.
자신들의 몸 여기저기 어우러 만지며, 쓰러져있던 길드원들이 마치 좀비 마냥 하나, 둘,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윽......"
라이린 또한 근육이 쑤신다는 듯 자신의 목뒤를 주무르며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팡이검으로 몸을 지지한 채 힘겹게 나를 바라보는 그녀.
"...뭐해요? 명령 안내려요?"
"......윽."
아무말 없이 서있기만하는 그녀에게 날카로이 말하자, 그 맹인 여성은 입술을 깨물며 뒷주머니에서 무전기 하나를 꺼내었다. 이어서 버튼을 누르고, 꺼림직한 목소리와 함께 무전을 보낸다.
"......여기는 상하이 외각의 션란쓰어, 지금 당장 상해에서 모든 길드원들을 철수시켜라."
"...그렇게만 말하면 무슨 상황인지 모를거 아니에요."
"......인외변화자들 처리는 옥시안님이 해결하실거다. 모두 안심하고 병력을 물러라."
"좋아!"
드디어 그녀의 입에서 원하는 내용의 말이 나오자, 나는 활짝 웃으며 만족의 표시를 드러낸다.
"진작에 이럴것이지."
아직까지 사역마들로부터 연락이 없어, 변화자들이 레반하워즘으로 이주를 다 완료했는지 모르는 상황. 그런 한시가 급한 상황인데 허구한 날 갑자기 자기들 밑으로 들어오라고 캐스팅을 하고 앉아있니, 나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
뭐, 어쨌거나, 무언가 계획이 많이 뒤틀렸다는 듯 주먹을 꽉 쥔 채 시선을 아래로 떨구는 라이린 쉬옌.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말한다.
"뭐, 정리도 되었으니, 굳이 캐스팅에 대해 답을 해주자면,"
"......!!"
"꿈 깨세요."
"......"
캐스팅의 언급에 흠칫 놀라며 잠시나마 얼굴에 생기가 돌은 그녀였지만, 이내 들려오는 나의 부정적인 답변에 다시금 고개를 숙여 내렸다.
허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한국에서 일하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중국까지 와서 일을 해라? 세상이 두쪽나도 불가한 일. 그렇다고 제시한 조건이 메리트가 있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제시한 돈, 권력, 명예, 모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이룰 수 있는 것들이었다.
"오히려 이번엔 그쪽이 저한테 빚 하나 진거네요."
"......예?"
나의 말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고개를 드는 라이린 쉬옌. '이 무슨 엉뚱한 말인가'하는 듯 한 그녀에게 나는 팔짱을 꼬며 답한다.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고 군까지 투입했는데도 해결하지 못한 인외변화자들을 제가 한번에 해결해 준거잖아요."
링 메이를 포함한 상하이에 거주중인 인외변화자 전부를 레반하워즘으로 이주시킴으로서 피 한방울 안흘리고 문제 해결. 이정도면 수많은 길드원들 생명을 지켜준 것으로 화양연화가 사례 정도는 하나 해야하는거 아닌가?
"나중에 제 부탁 하나 들어주는거로 퉁 치죠."
"예?"
심히 당황한 듯 한 라이린 쉬옌.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다가가, 아까와 같이 다시금 귓가에 조심스레 무어라 속삭인다.
"빡치게 하지말고 그냥 '네'라고 하세요."
"......"
"......여차하면 당신들 다 죽여버릴 수도 있었는데 살려준거니까."
"......알, 알겠습니다."
라이린 쉬옌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마음만 먹었다면 레반하워즘 공략 대신 화양연화 토벌을 나섬으로써 확실히 링 메이의 편을 들어줄 수도 있었다. 헌데 굳이 레반하워즘을 끌고 오고, 모두가 좋은 절충안을 제시한 것은 도움을 요청한 화양연화를 존중해주고, 위했기 때문.
......나는 덜덜 떨고있는 라이린의 어깨를 툭치며 싱긋 웃어보인다.
"전 그렇게 참을성이 많은 사람이 아니에요. 필기를 하든, 머리속에 박아두든, 기억해두세요."
만약 다음번에 무언가 일을 같이 할 기회가 생겼을 때, 그때도 지금처럼 동문서답에 스카웃이나 하러 앉아있으면 상당히 짜증나겠지.
"명,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이거로 저희 지원은 끝난겁니다."
웅얼거리는 붉은 제복 여성의 답에, 나는 기지개를 쭉 피며 내가 할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한다. 그들이 문제라고 제시한 링 메이와 상하이 탈환을 해결해 준 것이니, 더 이상 이곳에 상주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시연씨?"
"네 옥시안님."
나는 뒤를 돌아 아리아 길드의 길드장, 이시연을 부른다. 그러자 함박 웃음을 머금으며 답하는 그녀. 나 또한 미소를 지으며 대충 손가락으로 내 뒷편을 가리켜보인다.
"전 도시에 잠시 다녀와볼테니, 뒷처리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걱정하지말고 다녀오세요."
"......"
대형 길드의 길드장인만큼 유능한 그녀였으니, 도시에 갔다오면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완료해 놓을 것이었다.
「......전하.」
"......"
「......전하, 들리십니까.」
"응?"
......그리고, 때마침 사역마 렉타우스로부터 전해져 오는 염문(?). 머리속에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나 또한 눈을 감고 그에게 조용히 염문을 보낸다.
[무슨 일이야? 이주는 끝났어?]
「예, 이주는 끝났습니다만......」
나의 물음에, 무언가 꺼림직한 듯이 답하는 그. 잠시 무언가 고민하는 듯 싶더니,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정말 송구스럽게도, 전하께서 직접 와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내가?]
「예, 그것도 조금 서두르셔야 될 것 같습니다.」
[응, 알았어, 지금 바로 갈게.]
사태 이후 처음보는 듯 한 렉타우스의 안절부절한 모습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서둘러서 상하이 시내로 발걸음을 옮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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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왔냐......"
"......"
렉타우스의 연락을 받고 달려 온 상하이의 시내.
그리고 그곳 허물어진 어느 건물 벽에 기댄 한 여성을, 나와 내 사역마들, 그리고 베를레히리가 빙 둘러싸며 서있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허공에 울려퍼지는 힘 없는 목소리.
그 목소리의 주체이자, 이제는 누더기라 불릴 정도로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져있는 링 메이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본 뒤에 싱긋 웃음을 짓는다.
"......"
어라이징이 현실에 덮어 씌어진 이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번만큼은 직감할 수 있었다. 곧 그녀의 숨이 멎을 것이라는 걸.
"레반하워즘은, 변화자들은, 안전해......?"
헤헤 웃어보이며 말하는 그녀.
생명이 다해가는 그 시즌 보스의 물음에,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준다.
"응. 모두 안전해."
"다행이네......"
이제서야 안도했다는 표정과 함께 벽에 고개를 기대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이번엔 내가 어두운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너야말로 어쩌다 그렇게된거냐."
"그러게......"
여기저기 찢어진 고급진 차이나 드레스,얼굴 반절을 뒤덮은 잿덧미, 등 뒤에서 흘러나와 땅바닥까지 끈적히 적신 붉은색 핏방울들. 링 메이는 상처 하나를 짚어가며 씁쓸한 얼굴로 내게 답을 해준다.
"집중 포격 대상, 들어본적 있냐."
"......"
"씨벌년들이 별의별 무기를 다 가지고 왔어요."
온몸이 쑤시다는 듯,
갸녀린 신음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크왕! 크왕!]
"......"
전에 보았던,
분명 그녀의 남동생이라 했던 리자드맨 또한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녀를 붙잡고 있었다.
"......나, 잘한거겠지?"
조용히 눈을 감으며 묻는 링 메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부심을 가지라는 목소리로 답을 내뱉는다.
"당연하지. 너가 살린 사람이 몇인데."
"그럼 다행이네."
키득, 장난스런 웃음이 허공을 맴돈다.
이어서 점차 잔잔해지는 그녀의 복부.
평안해지는 상처투성이의 얼굴.
"잘 가."
"......"
......제 소임을 다하고 세상을 떠나는 두번째 인간형 시즌보스에, 나는 눈을 감고 조용히 명복을 빌어준다. 사역마들도 나를 따라 고개를 숙임으로서, 분위기는 한층 더 숙연해졌다.
......그랬을 터였다.
"......배고프다."
"......?"
......명복을 빌어주기가 무섭게 침묵을 깨뜨려버리는 쾌활한 목소리. 방금과는 달리 너무나도 반전되며 들려오는 링 메이의 목소리에, 나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본다.
"무슨......?"
"웃챠."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링 메이. 그녀는 무슨 일 있냐는 듯 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하였다.
"왜, 뭔 일 있어?"
"너, 죽,죽은거 아니였어?"
"뭐?"
나의 물음에 잔뜩 눈살을 찌푸리는 그녀.
이어서 잠시 고민을 하더니, 어깨를 으쓱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인다.
"에이 설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SSS급 시즌보스가 고작 그정도에 죽겠냐?"
"......"
"그건 그렇고, 야, 배도 고픈데 우리 집에서 짜장면이나 먹고 갈래?"
"......"
사람 쪽팔리게 해놓고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능청스럽게 말하는 그녀에, 나는 두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린다.
"......죽어."
"......에?"
아니 이럴거면 처음부터 건강하다고 말을 해주던가, 온갖 똥폼 잡고 묵념까지 시키면서 '에이 설마 죽겠냐?'.
"......내가 직접 죽여줄게 썅년아."
"뭐? 야, 잠깐! 잠깐... 아아악!"
......이어서 비참한 요괴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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