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후보 선발 (1)
* * *
"제가요? 대리 출전?"
"네!"
대회에 대신 참가해달라는 말에 내가 당황스레 되묻자, 이시연은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한 그녀의 미소에 잠시 멍을 때린 나는, 곧바로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보였다.
"안돼요."
경기장, 혹은 관람객들의 보호도 아닌 단순히 아리아 길드를 위한 대리 출전. 어찌보면 지나치게 사적인 부탁일 수도 있는 그녀의 요청에, 나는 단호히 거절의 답변을 전한다.
"여러모로 문제가 많은 부탁이잖아요."
"예?"
"길드간의 재량을 겨루는 격투대회의 출전. 이건 저보고 그냥 길드의 이익을 위해 일하라는거잖아요."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던 렉카챠나 상하이 건과는 전혀 성질이 다른 문제. 단순히 아리아 길드의 자존심을 위해 일하라는 '명령'에 가까운 부탁이었으며, 동시에 내게는 이를 이행할 의무 또한 전혀 없었다.
더군다나,
"...제가 나가면 격투대회를 여는 이유가 없어지잖아요."
아무리 날고기는 랭커들이 출전한다 하더라도 1대1 상황에서 옥시안을 이길 가능성은 만무. 그렇게 되면 결과가 이미 뻔한, 재미없는 경기가 될 것이 분명하였다. 이는 대회에 참가하는 유저들에게도, 관람객들한테도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지.
"게다가 그로 인해 얻는 욕은 결국 제가 다 먹을거 아니에요."
나는 한숨을 내뱉으며 말한다. 시합에서는 이기긴하더라도 결국에는 잃는게 더 클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너무나도 귀찮았다. 계약서에 명시된 일도 아니고, 대체 내가 왜 몇만명 앞에서 싸움개마냥 뛰어다녀야 된다는거지?
"......재밌겠다!"
"잉?"
......허나, 내 부정적인 의사를 누르며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링 메이가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럼 그거 내가 할래! 괜찮지?"
"......네?"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링 메이에, 이시연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의욕에 가득 넘치는 그 시즌 보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젓는 나.
"뭐래. 너도 시즌보스잖아."
링 메이도 무려 SSS급이라는 등급이 붙은 시즌 보스. 애초에 시즌 보스란 '개인'이 아닌 '길드'의 강함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캐릭터였기 때문에, 상대하는 개인으로서의 체감상 옥시안이나 링 메이나 별 차이가 없을 터였다.
"게다가 너는 애초에 명단에도 이름 못올릴걸?"
"엥? 내가? 왜?"
"생각해봐, 불과 며칠전까지만해도 상하이를 점령하던 시즌 보스가 격투대회에? 아마 다 뒤집어질거다."
나는 혀를 쯧쯧 차며 그녀의 뜻을 가볍게 즈려밟는다.
상위권 길드와 박터지게 싸우다가 레반하워즘으로 후퇴한 그녀가 나타나면 경기보다는 곧바로 보스 토벌전이 진행 되겠지. 최상위권 길드 4개, 혹은 그 이상이 모일 그곳에서 과연 링 메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답은 높은 확률로 'X'일 것 같은데.
"응? 그 정도야 분장이나 환각 마법을 쓰면 되지! 모습 바꾸는건 자신있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외치는 링 메이. 자신의 외형을 내 모습으로 바꿔보는 그녀에,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지어보였다.
"멍청아. 거기에 간파 스킬 가진 애들만 몇명이 올텐데, 환각 마법 하나 못뚫어보겠냐."
일단 상위 4개 길드에다가 구경하러 온 타 랭커들과 유저들. 거기다가 일반인들까지. 최소 몇만명은 경기를 관람하러 올 터인데, 그 모두가 환각이나 분장을 간파하지 못하리란 장담은 없었다. 걸리면 오히려 길드 평판이 땅을 뚫고 추락하겠지.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대리출전은 조금 힘들 것 같네요. 같이 다른 방법 알아보죠."
"아......"
링 메이에게 딱밤 하나를 날리며, 나는 이시연에게 확고한 거절의 의사를 전한다. 그러자 급격히 굳어지기 시작하는 그녀의 표정. 입술을 깨물며 무언가를 고민하는가 싶더니, 이내 그녀는 조심스러이 다시한번 내게 부탁을 하기 시작한다.
"......저기,"
"네?"
"그, 제가 알기로 대회 상금도 꽤 되는데, 그거 전부 옥시안님에게 드릴테니, 정말 어떻게 안될까요?"
"뭐라고요?"
안절부절거리는 이시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발언에, 곧바로 눈살을 찌푸리는 나.
"돈이요?"
말로는 안되니 상금으로 회유한다는건가?
누굴 돈에 미친 사람으로 아나, 상당히 기분 나쁜걸?
"왜 그러는거죠? 오늘따라 시연씨답지 않네요?"
계속되는 거절에도 끊임없이 부탁해오는 그녀에, 나는 깊은 불쾌감을 드러낸다. 비슷한 상황에서 라이린 쉬옌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보았을 그녀일텐데, 어째서 저리 무리하면서까지 부탁하는거지? 더군다나, 오늘은 평소 침착했던 협상가로서의 그녀의 모습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안된다면 안되는거니, 괜시리 고집부려서 화나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나는 차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무감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경고한다. 그러자 천막 아래 흐르는 싸늘한 기운.
"......"
그녀의 검정빛 눈동자와 나의 새빨간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하고, 가을의 단풍잎 마냥 침묵이 나뒹굴기 시작한다. 소리없이 이어진 눈치싸움 끝, 결국 먼저 고개를 숙인 것은 이시연.
"죄, 죄송합니다."
"......"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판단력이 흐려졌던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머리칼이 땅에 닿을정도로 허리를 굽히며 말하는 그녀. 울먹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몇번이고 사과의 말을 건넨다.
"주, 주제넘게 말이 많았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
"앞으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예 무릎까지 꿇어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별다른 말을 꺼내지않자, 보다못한 링 메이가 내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미안하대잖냐, 이제 그만하고 일으켜라."
"......"
살벌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하는 링 메이. 결국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시연에게 말했다.
"......일어나세요."
"아!"
"다음부터는 조금 주의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네! 알겠습니다!"
아리아 길드와 나의 관계는 협력 관계. 그것도 내가 갑에 가까운 동맹 관계였고, 그들이 나에게 무어라 명령할 수 있는 처지는 되지 않았다. 부디 이 점 잊지 말아주었으면 하는데.
"걱정하지 마세요! 명심하겠습니다!"
......환히 웃으며 답하는 이시연.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나는 몇번째일지 모를 한숨과 함께 의자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넵!"
나의 말에, 그녀는 유치원생 마냥 우렁찬 대답과 함께 다시금 자리에 착석하였다. 얼음이 다 녹아 맛이 이상해진 커피를 홀짝거리며,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는 나.
"...돌아와서, 격투대회 건에는 도움을 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용병을 구해보든지 하는게 좋을 것 같아요."
"넵!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일말의 꼬투리 없이 당차게 답하는 이시연. 그녀 또한 이제 불만은 없어보였으니, 이 얘기는 슬슬 정리하는게 좋겠군.
허나, 그렇다고 이대로 바로 헤어지기는 그렇고,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레반하워즘의 발전에 대해서나 상의해봤음 하는데.
「주인님.」
"응?"
......대화 주제를 바꾸려고 하는 그때, 옆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사역마 세리아나가 깊게 고개를 숙인 채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아뢰옵게 송구하오나, 말씀하신 그 대회, 혹시 제가 나가보아도 되겠사옵니까.」
"......뭐?"
평소와 달리 사뭇 진지한 어조로 말하는 그녀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너가 격투대회에? 왜? 굳이 그럴만한 필요가 있나?
「...듣잖니 그 대회에는 상당한 강자들이 나오는 터. 그곳에서 당당히 우승하여 지난번의 수모를 만회하고 싶습니다.」
"아."
분하다듯이 토로하는 세리아나.
지난번 아우레키아한테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가. 나는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는데, 정작 본인은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나보군. 어찌보면 사역마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한것이니까.
「안된다아......」
"응?"
......그리고 그때, 세리아나의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또다른 목소리.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려보니, 이번엔 어느샌가 곁으로 다가온 아드레나인이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있었다.
「다른 녀석은 되더라도 세리아나는 안된다아.」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는 똑단발머리의 소녀.
그러니까 인간 형태로 폴리모프를 한 아드레나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세리아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리아나는 최약체. 대회에 나가봤자 또 망신만 당할거다아.」
"......"
씩씩거리며 자기 의견을 표출한 그녀는, 이내 시선을 나에게로 돌려본다. 이어서, 잔뜩 기대에 찬 목소리가 내 귀로 전해들려왔다.
「그러니까 주군! 나를 내보내지 않겠느냐!」
"뭐?"
「나는 세리아나와 달리 강하다! 또, 나의 폴리모프를 아는 인간 녀석은 저기 저 여자가 전부이니, 주군과 나의 관계를 알아차릴 녀석 또한 없을 것이다!」
"......"
격투대회에서 패배할 일도, 옥시안 혹은 그녀의 사역마라는 것이 밝혀져 정체가 들킬 일도 전혀 없을 것이라 자신을 어필하는 그녀.
하긴, 나조차도 아드레나인의 폴리모프 모습은 사태 이후에나 처음 보는 거였으니, 다른 사람들이 알 리는 만무했지. 게다가 드래곤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모습이라, 본래 힘의 반절밖에 내지 못할 것임으로 타 선수들과의 밸런스도 맞을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어떤가! 세리아나보다 나를 내보내는게 낫지 않겠느냐! 멋지게 우승하여 주군에게 승리의 영광을 바치겠다!」
"......"
나른나른하던 평소의 말투는 집어다 치우고 잔뜩 흥분한 아드레나인. 녀석의 말만 듣자면 충분히 일리가 있어보이는 일이다만......
「아니되옵니다.」
"응?"
날카로운 목소리가 아드레나인의 맞은편에서 울려퍼진다. 잔뜩 얼굴을 일글이며 말하는,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세리아나.
「아드레나인같이 멍청한 녀석을 내보냈다가는 중간에 감정을 지배하지 못하고 폭주할게 뻔한 일입니다.」
온갖 말로 무시당한 것이 매우 기분이 나쁘다는 듯, 세리아나는 분노에 찬 눈빛으로 아드레나인을 노려본다.
「주인님이 생각하시더라도 역시 파충류보다는 지적 생명체인 제가 나가는게 옳아 보이지 않사옵니까?」
"어......"
상당히 과격해지기 시작하는 어조.
세리아나의 말에 섞여있던 '파충류'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옆에 있던 아드레나인이 벌떡 일어나며 세리아나에게 소리쳤다.
「세리아나, 뭐라 했냐.」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하는 아드레나인.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세리아나 또한 우아한 자태로 몸을 일으키며 아드레나인에게 말한다.
「멍청한 '파충류'라고 했사옵니다. 불만이 있으신지요?」
「......」
세리아나는 환히 웃으며 다시금 '파충류'라는 말을 강조해보인다. 그러자 입술을 꽉 깨물며, 온 얼굴로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하는 드래곤 소녀.
「몬스터 한마리한테 죽어버린, 약해빠진 주제에, 말이 많다......」
「인간의 형태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당신보다는 나아보이는데요. 스킬하나 쓸 수 없는 그 상태로 대회에 나가서 뭘 하겠다는거죠?」
"......저, 얘들아?"
점차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
잔뜩 당황한 나의 말을 뒤로한 채, 아드레나인은 서서히 자신의 주먹을 세리아나를 향해 치켜올려보였다.
「긴 말 안한다... 덤벼봐라......」
「흥!」
......갑작스럽게 이어진 아드레나인의 도발. 하지만 세리아나는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 이 손으로 화염구를 만들어내보인다.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아드레나인에게 묻는 그녀.
「도마뱀의 모습이 아닌 그 상태로 저한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시나요?」
「당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뚝뚝한 표정과 함께 답하는 아드레나인.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은 레반하워즘의 위, 그녀들은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하였고,
「죽여버린다.」
「이번에야말로 그 버르장머리를 고쳐줄게요.」
......이내 각자의 주먹을 힘차게 내질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