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위선자'
* * *
「죽어.」
"......"
아드레나인이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를 이끌고 하늘로 치솟아오른다. 척 보기에도 상당한 데미지가 쌓인듯 했으나, 그래도 주먹을 내지를 힘만큼은 남아있다는 듯, 그녀는 전력을 다해 정권을 내질렀다.
「에, 에어스트 쉴드...!」
당황한 세리아나가 서둘러 방어 스킬을 전개해보았지만, 이미 코앞까지 다가온 아드레나인을 막기엔 역부족. 투명한 방어막은 완전히 그 형태를 가추기도 전에 무너져 내린다.
「크윽...!」
세리아나의 복부를 정확히 가격하는 아드레나인의 주먹. 이내 외마디 신음과 함께 그 서큐버스 퀸은 지상으로 추락한다.
「으윽......」
명치를 움켜쥐고 겨우겨우 다시 정신을 찾는 그녀. 허나, 아드레나인은 그런 세리아나를 결코 그냥 두지 않겠다는 듯 곧바로 다음 공격을 날렸다.
「......」
아드레나인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는 속도를 더해 다시한번 세리아나의 복부에 발차기를 날렸고,
「크헙...!」
MP가 바닥나 별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그녀는 쿨럭 피를 쏟으며 뒤로 넘어가버렸다.
"......"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는 나.
아드레나인이 무식하게 그냥 공격을 맞은게 세리아나의 MP를 빼기 위한 큰그림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어찌됐든 제대로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자신의 높은 방어력을 믿고 최대한 버틴다음 접근전으로 전환. 신체능력이 최하에 가까운 세리아나로서는 무투가 주특기인 아드레나인을 이길 수가 없을 터.
「죽어어......」
「크윽...!」
검정 단발머리 소녀는 땅에 엎어진 그 서큐버스 퀸을 향해 계속해서 주먹을 날린다. 한대한대가 위력이 상당히 강력한 것인지, 별다른 대응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공격을 적중당하는 세리아나.
「......」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금빛의 입자가 되어 하늘로 사라져버린다. 동시에, 내 앞에 생성되는 붉은색의 화면.
[WARNING]
사역마 세리아나가 사망하였습니다.
※리스폰 쿨타임: 24H
"......"
격투대회 출전권 때문에 기어코 죽냐!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젓는다.
「헤,헤헤... 주군, 내가, 내가 이겼다아...」
...세리아나가 없어진 걸 확인한 뒤, 피투성이 몸을 내쪽으로 돌리는 아드레나인. 환히 웃으며 무어라 중얼거리던 그녀도,
「내가, 이긴거....」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땅바닥에 철퍽 쓰러진다.
곧이어 세리아나와 마찬가지로 금빛 입자가 되어 사라지는 아드레나인. 내 앞에는 또다른 붉은 화면 하나가 나타난다.
[WARNING]
사역마 아드레나인이 사망하였습니다.
※리스폰 쿨타임: 24H
"미친놈들아......"
어이없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나.
별것도 아닌 것 때문에 재소환까지 24시간이나 기다려야 되잖아! 그 사이에 뭔일이라도 있으면 어떡하려고!
"그렇다고 진짜 서로 죽이면 어떡하냐..."
갑자기 몰려오는 듯 한 두통에 머리를 매잡는다.
그런 나를 보고 키득 웃어보이는 링 메이.
"왜 재밌기만 했구먼. 24시간이야 금방가니 걱정하지마."
별거 아닌데 왜 신경을 쓰냐는 듯, 링 메이는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그 다음, 턱을 긁적거리며 질문 하나를 던져보이는 그녀.
"...그래서, 내보낼 애는 정했어?"
"흠..."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 깊은 고민에 빠진다. 쓰러지는 타이밍도 비슷비슷했고, 실력 또한 생각보다 대등했다. 유의 깊게 볼거라곤 세리아나가 본의 아니게 아드레나인의 전략 아닌 전략에 말렸던 것이겠지.
"......"
짧은 생각 후, 나는 어정쩡한 웃음과 함께 궁금한 표정을 짓고있는 링 메이에게 답하였다.
"역시 아드레나인이 낫지 않을까?"
비록 스킬은 사용하지 못할지언정 기본적인 신체 스펙이 높고, 무엇보다 폴리모프를 하고있는 이상 옥시안과의 연관성을 사람들이 캐치하지 못할테니까 말이야. 세리아나한테는 아쉽게됐지만, 어쩔 수 없지 뭐.
"시연씨."
"네? 네!"
내가 고개를 돌려 무언가 딴생각을 하던 이시연을 부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자세를 고쳐앉는다.
"네? 네! 왜 부르셨어요?"
"......"
검정색 눈동자를 말똥말똥 뜨며 나를 쳐다보는 이시연. 나는 세리아나와 아드레나인이 쓰러졌던 땅바닥을 손가락을 가르키며 그녀에게 말하였다.
"그 격투대회, 아드레나인이 대신 나가도 괜찮....."
"아! 네! 그럼요! 당연하죠!"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간이 책상 위에 놓여져있던 초대장을 부랴부랴 회수하며,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그, 그럼, 아드레나인씨가 저희 길드 대표로 나가는거로 신청해놓겠습니다!"
"예? 예......"
준비물을 까먹고 온 학생 마냥 자신의 옷가지들을 황급히 챙기기 시작하는 이시연. 그녀는 순백의 제복을 고쳐 입은 뒤, 나와 링 메이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만 가볼게요! 죄,죄송합니다!"
"네?"
갑작스런 한마디 사과와 함께 부리나케 천막을 빠져나가는 그녀.
"잠, 잠깐!"
손을 뻗으며 그녀를 불러세워봤지만, 어지간히 급한 일인 것인지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서서히 시야에서 사라지는 이시연. 천막 안에는 그녀에게 못다한 말만이 울려퍼졌다.
"여기 하늘 위인데.....?"
***
.
.
.
.
.
.
"후......"
레반하워즘을 한참 헤매다 베를레히리의 도움을 받아 겨우 돌아온 이시연은, 디퓨저의 향긋한 냄새가 퍼져있는 자신의 사무실 불을 켰다.
"......"
본디 그녀의 성격대로 깔끔히 정리되어 있는 좁은 방. 노트북이 올려져있는 책상과 의자, 무수한 서적들이 꽂혀있는 책장, 그리고 간이 침대 하나까지. 단촐하다만 있을 건 다 있는 전형적인 사무실이었다.
"......"
그런 자신의 사무실을 멍하니 둘러보는 이시연.
그녀는 피식 웃음과 함께 방 문을 꾹 닫은 후, 노트북과 필기 도구들이 놓인 책상 앞에 마주선다.
"......"
잠시 방 안에 울려퍼지는 침묵. 새하얀 정적과 마주닿은 그녀는 깊게 심호흡을 해본 뒤,
"씨바아아알!"
...욕설을 내뱉으며 책상 위의 모든 것들을 엎어버렸다.
"......"
우당탕 거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잔뜩 메웠으며, 평소 차분하고 명쾌했었던 그녀의 분노 또한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병신같은년이...!"
옆에 있던 간이 침대를 발로 한번 걷어찬 뒤, 이제는 텅 비어버린 책상을 붙잡으며 잠시 숨을 고르는 이시연. 피가 흐를 정도로 입술을 깨물며, 무어라 중얼거린다.
"평소답지 않아? 화나게 만들지 마?"
방금전까지 같이 있었던 분홍머리의 소녀를 상상하자, 자동반사적으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지가 뭔데?"
무시당하고 협박당한, 누군가의 아래가 되었다는 감정이 계속 가슴 한 켠을 메웠다. 평소의 그녀였더라면 이렇게까지 행동하지는 않았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
계획이 실패했으니까.
옥시안을 격투대회에 내보내겠다는 그녀의 계획이 실패했으니까. 더군다나 레반하워즘에서 길을 잃고 헤매버리는 수치스러운 모습까지 보여주었으니, 화가 2배로 치솟아오르는 듯 하였다.
"아 씨발."
다시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사역마를 다루는 수준부터, 하는 행동, 사태 이후 지내왔던 근황 등, 옥시안, 아니, 저 옥시안의 탈을 뒤집어 쓴 자가 너무나도 한심하고 한심했다.
나라면 저 힘을 저렇게 안쓸텐데.
나라면 옥시안의 힘을 최대 효율로, 나의 야망을 이루도록 아주 값지게 사용할텐데.
이런 질투심과 열등감은, 언제나 이시연의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길드장님.]
"......응?"
......책상에 기대 감정을 추스르던 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 이시연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한다.
"들어와."
[......]
그녀의 답에 천천히 열리는 사무실 문.
아리아 길드를 상징하는 새하얀 제복을 입은 남성 하나가 걸어들어온다.
[......]
남성은 난장판이 되어버린 사무실 안을 보고 잠시 흠칫 놀라는가 싶었건만, 이내 시선을 거둔 뒤, 이시연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보였다.
[보고드릴게 있어서 왔습니다.]
"뭔데."
짜증난다는 듯이 답하는 이시연.
남성은 조심스레 서류 하나를 전달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저번에 말씀하신 마약 밀수입과 인외변화자들의 장기밀매 사업, 김위원님과 TL그룹 왕회장으로부터 협력 허가를 받아왔습니다.]
"......"
그의 말에, 이시연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서류 봉투를 슬며시 열어본다. 두둑한 종이들의 밑에 찍혀있는 몇몇의 붉은 지장들. 쓸모없는 문서가 아니란 걸 확인한 그녀는, 남성 길드원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길드 내에 이 사업 아는 사람, 몇이나 되지?"
[저와 최상급 간부진을 제외하고는 없습니다. 입단속 또한 잘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좋아."
만족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연.
이것은 사태 이후 더 큰 돈을 얻기 위해 그녀가 고안해 낸 사업. 엄청난, 상상 이상의 금액을 얻어다주는 대신,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 있는 비윤리적인 사업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아무리 자신의 길드라도 무어라 말이 나올 수 있으니, 사전에 입단속을 하는 것이 최우선.
[......그럼.]
"......"
이시연이 서류를 확인하는 것을 보자, 이제 자신의 역할을 끝났다는 듯 곧바로 뒤를 도는 남성. 미련없이 자리를 떠나는 그 길드원을, 이시연은 손을 뻗어세우며 멈춰세운다.
"잠깐."
[......]
그녀의 제지에 다시금 시선을 돌리는 그.
남성이 발걸음을 멈춘 것을 확인하자, 이시연은 제복의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뒤 몇번 터치를 해보인다. 6~7번의 짧은 터치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성에게 무어라 명령을 내린다.
"네 문자로 전화번호 하나 보냈어."
[예.]
"당장 그 번호 주인의 신상 정보, 털어올 수 있을만큼 다 털어와. 돈은 필요한만큼 갔다 써도 좋고."
[......알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핸드폰으로 온 문자를 확인한 뒤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시연이 이제 진짜 끝났다는 듯 나가라는 손짓을 해보이자,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사무실 문을 향해가는 남성.
[......헌데,]
...허나, 그는 중간에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이시연에게 물었다.
[누구, 전화번호입니까?]
그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아리송한 목소리.
호기심 가득한 질문에, 이시연은 피식거리며 짧은 대답 하나를 날렸다.
"옥시안."
[......!!]
3글자에 불가함에도, 남성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는 엄청난 놀라움.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곧바로 표정을 가다듬고 인사와 함께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그렇게 문이 닫히고, 또다시 찾아온 정적.
이제 이 방에 그 누구도 없음을 확인한 이시연은, 한숨을 내쉬며 푸른색 홀로그램 화면 하나를 띄어보인다.
"......"
***
《퀘스트》
名: 세계 정복
내용:
1) 길드 랭킹을 1위로 상승시키시오(현 4위)
2) 모든 허망급 아이템을 수집하시오(현 1/7)
제한시간: 198d 7h 24m 21s
보상:
초월급 아이템 '별의 눈물'
실패시: 플레이어의 데이터 소거
***
"......"
장황한 내용의 텍스트가 적힌 화면.
......더 이상 노닥거릴 시간은 없어보였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