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 준비 (3)
* * *
"그럼 시작할게요!"
"......"
롱소드를 뽑아들고 여우로이 아드레나인에게 접근하는 이시연을, 나는 멍하니 바라본다.
"레벨이 내려갔다라..."
분명 그녀를 처음 만났을때 레벨이 1200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 5줄어든 1195. 레벨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시스템이지만 줄어든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애초에 어라이징에는 레벨 다운이라는 시스템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일어난 일이지? 사태 이후 새롭게 생긴 버그 같은건가?
"야."
상당히 어지러운 머리에, 나는 결국 옆에서 아드레나인과 이시연의 대련을 관람중이던 링 메이를 불렀다. 시선은 앞만 고정한 채, 무심히 답을 내뱉는 그녀.
"왜."
"아니, 그,"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레벨 다운'에 대해서 질문을 던진다.
"너 혹시 레벨이 감소하는 경우 본적있냐?"
"레벨 감소...?"
나의 말에 눈살을 찌푸리는 링 메이.
새빨간 치파오를 입은 그녀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단어를 몇번 곱씹더니, 이내 화들짝 놀라며 곧바로 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레, 레벨 감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치는 그녀.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잔뜩 서려있었다.
"갑자기? 왜? 어디서 봤는데?"
"아니... 뭘 그렇게까지..."
못볼걸 보기라도 한 듯이 격한 반응을 내비치며 소리치는 링 메이. 나는 그런 과도한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거야."
땅바닥을 쿡쿡 쑤시며 중얼거리는 나.
일단 그 장본인이 이시연이라는 얘기는 꺼내지 않는다.
"별걸 다 궁금해하네."
링 메이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 뒤,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런게 가능할 리가 있냐. 레벨이 하락하는 시스템은 듣도 보도 못했다 야."
"......"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는 그녀에, 나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며 답한다. 평소에는 어라이징의 개발자 마냥 온갖 생색을 내더니, 정작 중요한 건 알지도 못하고,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알겠어."
끓어오르는 짜증을 억누르며, 다시금 시선을 대련중인 아드레나인과 이시연에게로 돌린다. 묵직한 기합과 검이 휘둘러지는 소리가 날카로이 들려왔다.
"레벨이 줄었다라......"
고작 5라는 작은 숫자였지만 어쨌거나 레벨이 줄었다. 분명 아무 이유없이 그런 현상이 일어나지는 않았을 터. 흡수를 당했다던지, 레벨을 대가로 무언가를 얻었다던지, 분명 무언가가 있을 것이었다.
"좋은 현상은 아닌거같고..."
레벨이 감소하게 된 원인이 긍정적인 거라면 결코 이시연이 조용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형 길드의 길드장으로서, 또 한국의 정신적 지주로서, 언제나 그랬듯이 국민들과 정보를 공유했겠지. 허나, 나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있는 것을 보아 분명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 졌다."
「주군! 내가 이겼다아!」
"그래, 잘했어."
...거친 숨을 몰아 내쉬며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는 이시연과, 환히 웃으며 내게 후다닥 달려오는 아드레나인.
"하, 이정도면 에데르타인도 문제없을거 같아요."
"그래요? 다행이네요."
멀리서 들려오는 이시연의 말에 나는 환히 웃으며 답해준다. 아직 명확한 것이 하나도 밝혀진 것이 없는데, 괜시리 얘기를 꺼내서 그녀의 경계를 사는 건 현명하지 못한 것이겠지.
"......"
일단 격투대회부터 끝낸 후,
진솔한 대화를 한번 나눠보도록 하자.
주먹이 곁들어 갈 수도 있지만 말이다.
***
.
.
.
.
.
'씨발.'
SSS급의 시즌 보스, 링 메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옥시안을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안거야?'
그녀의 입에서 '레벨 다운'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순간, 링 메이는 기겁하며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분명 얘는 못봤을텐데...'
상하이의 집에서 일어났었던 자신과 이시연과의 작은 다툼. 이시연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너무나도 수상한 냄새에 그녀는 이시연의 가슴을 꿰뚫었고, 그 결과 이시연이 허망급 아이템 '천사의 심장'의 소유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천사의 심장.
지정한 상대의 레벨을 반절 흡수하여, 그만큼 자신의 레벨을 높인다. 짧은 제한시간과 이후 소유자 본인의 레벨이 영구적으로 반절 감소한다는 패널티가 있었지만, 이론상 잘만 사용하면 옥시안마저 꺾을 수 있는 최강의 아이템이었다.
또한 자신의 레벨을 5씩 깎으면서 온몸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으니, 심장을 소유한 이상 죽을 걱정도 없다.
실제로 자신에게 가슴을 뚫렸음에도 불구하고 저기 멀쩡히 서있지 않은가.
'골치 아프게 됐네...'
그리고 그 당시,
이시연이 요구했던 한가지 조건.
상하이에서 철수할테니 천사의 심장에 대해 옥시안에게 말하지 말아라.
'......'
그 당시에는 인외변화자들을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가뿐히 그 제안을 승낙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어째서 옥시안에게 비밀로 해달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또한, 천사의 심장은 허망급 아이템 도감에도 실려있지 않은 것을 보아, 이시연은 심장의 존재를 꽁꽁 숨기고 있는 것 같았는데, 도대체 왜 그런것일까.
워낙 희귀하기 때문에 허망급 아이템은 발견 즉시 길드 연합에 보고하는 것이 원칙일텐데 말이다.
"흠......"
눈을 감고, 조용히 생각해본다.
비밀로 한다는 것, 특히나 옥시안에게 비밀로 한다는 것은 당연히 심장을 옥시안에게 사용할 예정이라는 것.
헌데 지금 아리아 길드와 옥시안은 협력관계.
'빼먹을 것만 빼먹고 처리해버리겠다는 건가.'
토사구팽을 위해 남겨둔 것인가.
아니면 혹시나 있을 옥시안의 폭주를 막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남겨둔 것인가.
...뭐, 어느쪽이 됐든 저 작은 분홍 머리의 소녀에게는 좋은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하......"
갑자기 아파오는 머리에,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이걸 얘기해줘야 되나...'
솓구쳐오르는 고민.
약속대로라면 평생 비밀로 간직하는 것이 옳지만, 이시연의 알 수 없는 의도가 너무나도 불안했다.
옥시안 다음의 타겟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도 단정할 수 없는 상황이고, 그렇게 허무히 죽을바엔 미리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게 낫지 않을까.
'미치겠네...'
어차피 시간 문제일 뿐, 언젠가는 들킬 문제.
다만 그 진실로 향하는 지름길을 알려줄지 말지, 그녀의 머리 속은 소용돌이치기 시작한다.
"썅......"
이마를 감싸안으며 깊은 고심에 빠지는 그녀.
이시연과의 약속, 옥시안을 위한 배려, 있을지 모르는 위협. 이것들 중 과연 무엇을 우선시 해야 되는 것일까. 침묵을 지켰을 시 닥쳐 올 파장은 무엇이고, 사실을 밝혔을 때 휘몰아칠 태풍은 무엇일까.
"...아드레나인, 내일 잘 할수 있지?"
「당연하다아... 걱정말거라아...」
"......"
하지만, 어느쪽이 되든 자신은 이 평화를 깨기 싫었다. 갈등, 위협, 그런 것들은 한번이면 충분했다. 그저, 그저 이 천공섬의 잔잔한 분위기를 오래 보고싶을 뿐.
"......화이팅."
...결국 링 메이는 목구멍까지 치솟아올랐던 문장 하나를 집어 삼켰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