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격투대회 (1)
* * *
방대한 텍스트 중,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세르레니아 루인'이라는 이름.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그 글자들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고는 천천히 기억을 곱씹어보기 시작했다.
"세르레니아 루인."
분명, 신세리아 르 메이의 길드장이자 유저 랭킹 1위 타이틀을 걸고 있던 인물. 더불어 옥시안을 페이즈 2로 몰아넣었던 것으로도 유명한 사람이었지.
랭킹 1위라는 명성답게 이곳저곳에서 자주 거론되고는 했던 이름이었으니, 모르는게 더 이상한 상황이긴 하였다.
"...옥시안을 페이즈 2까지 밀어붙였다라."
그녀의 정체를 확인한 나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중얼거린다. 그녀의 업적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모든 길드가 공략을 실패했던 옥시안을 페이즈 2, 즉 각성단계까지 몰아 붙였던 것. 여러모로 그녀가 넘사벽의 강함을 지니고 있다는 걸 증명해준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걸 증명하기라도 하 듯, 버젓이 박혀있는 '2451'이라는 레벨. 이는 페이즈 2로 진입한 아우레키아, 그리고 SSS급의 시즌보스 링 메이와 유사한 수치였다.
"대단하네."
대단한 것인지, 어이가 없는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개 유저 주제에 시즌보스급의 레벨을 지니고 있는 그녀에 나는 혓바닥을 내둘렀다.
그녀가 이끄는 신세리아 르 메이의 길드원들 또한 전원 랭커, 혹은 랭커에 몸 담고 있었던 이들이라 했었으니, 지금까지 만난 유저들 중 가장 경계할 만한 이들이라 할 수 있으려나.
"오, 옥시안?"
"응?"
......한창 루인의 정보를 살피던 와중, 갑작스레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옆을 지키던 남성이 나를 발견하고는 얼떨떨한 얼굴로 무어라 소리치고 있었다.
"옥시안? 네놈이 왜 여기있는거냐!"
내가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인지,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하는 남성의 표정. 이어서 그는 곧바로 자신의 대검을 뽑아 나를 향해 겨누었다.
"음......"
PTSD라고 해야하나.
게임속에서 신나게 두들겨 맞았었으니 경계를 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고 무기까지 치켜드는 건 안좋은 선택이라 보는데. 적어도 내 사역마들이 전부 현세에 나와있는 지금은 말이야.
「감히 누구한테 칼을 겨누는게냐.」
...역시, 그가 칼을 치켜들자마자 세리아나는 자신의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아까 엘빈이 말을 건 것만 가지고도 내 시간을 뺏었다며 한껏 짜증을 냈던 그녀인데, 감히 칼을 겨누다니, 두 눈 뜨고 볼 수 있는 일이 아니겠지.
「하등한 인간 주제에...」
기분이 많이 나빴던 것인지, 곧바로 손바닥을 치켜들고는 마법을 전개하는 그녀. 내가 무어라 말릴 틈도 없이 대여섯발의 화염구체가 남성을 향해 날아갔다.
"세리아나...!"
그런 세리아나를 바라보며, 흰색 제복의 남성은 입술을 꽉 깨문다. 워낙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피하기는 글렀다 생각하였는지, 그는 대신 자신의 칼날의 평평한 부분으로 몸을 막는다.
"크윽...!"
이어서 일어나는 작은 폭발.
검은 먼지가 주변을 감쌌고, 남자는 충격으로 인하여 몇m를 날아가 관중석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세리아나, 이 좆같은 년이!"
허나, 누가 괴물같은 신세리아의 길드원 아니랄까봐 별 충격없이 가볍게 몸을 일으키는 그. 약간의 타박상을 제외하고는 딱히 데미지를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너희, 이곳에 온 목적이 뭐냐!"
남성은 다시금 자신의 대검을 치켜들어 우리에게 겨눈다. 보통 유저들이라면 이미 겁을 먹고 도망갔을 터인데, 끝까지 덤빌 생각을 하다니. 나름 랭킹 1위 길드의 일원이라 이건가.
「...반말이라, 아직 정신을 못차리셨군요?」
그리고, 남성의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새로운 목소리.
자신의 몸을 모래로 변환시킨 렉타우스가 어느새 남성의 앞으로 날아가 있었다. 그는 고압적인 남성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인지, 무뚝뚝한 목소리로 짤막하게 경고를 남긴다.
"렉타우스? 네놈도 있었냐!"
허나, 악마의 말 따위 듣지 않겠는다는 듯, 남성은 곧바로 렉타우스를 향해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몸을 모래로 변환시킬 수 있는 렉타우스에게 물리 공격이 통할리는 만무. 남성의 대검에 베인 렉타우스의 복부는 곧바로 그 상처를 복구해낸다.
「참으로 한심한 공격이군요.」
"뭐라고?"
「......제 차례입니다.」
"커헉!"
모래가 자신의 상처를 메꾸는 것을 확인하자, 이번엔 자신의 차레라는 듯, 렉타우스는 순식간에 남성의 목을 잡아 허공으로 들어올려버린다. 꽤나 덩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힘없이 렉타우스의 손에 따라 올라가는 그.
「전하는 당신같은 쓰레기가 감히 입에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크헉, 숨, 숨이...!"
「저승에서 평생 후회하도록 하세요.」
"커,커헉...!"
이내 대검마저 땅에 떨어뜨린 채 발버둥 치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렉타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악을 해보았지만, 옥시안의 사역마 중 무투 최강인 그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을리는 없었다.
"어? 저,저거, 말려야되는게 아닌가와요?"
"......"
그 모습을 보며, 한껏 당황한 채 외치는 사쿠라 요코. 그녀의 말을 들은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인다. 예의를 고쳐주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죽여버리까지 한다면 골치가 아파지니까.
......그렇게 렉타우스를 향해 그만두라 명령을 내리려 한 순간이었다.
[쾅!]
"응...?"
렉타우스가 있던 자리가 엄청난 굉음과 함께 연기에 휩싸인다. 동시에, 서있던 곳에서 어느샌가 사라져있는 세르레니아 루인.
"......!!"
연기가 겆히자, 놀랍게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렉타우스가 아닌 흰색 제복을 걸친 연금발의 소녀. 더 놀라운 것을 뽑자면 렉타우스의 손에 들려있던 남성이 그녀의 손으로 옮겨가 있었다는 것이다.
"대, 대장......"
"입 다물어 멍청한 새끼야."
"크윽...!"
얼굴에 잔뜩 분노를 서린 채 남성의 목을 조이고 있는 세르레니아 루인. 아까 전 들었던 맹한 목소리와는 달리, 매우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흠.」
그리고 어느새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긴 렉타우스였다.
워낙 빨랐던데다 연기로 가려져서 잘 보지는 못하였지만, 아마도 루인이 렉타우스에게 공격을 날림으로서 남성을 빼앗고, 렉타우스는 점프 혹은 모래화를 통해 그 공격을 순간적으로 피한 것이겠지.
"내가 분명히 옥시안을 보더라도 가만히 있으라 했을텐데."
"죄, 죄송합니다... 순간 흥분해... 크악!"
"......"
무어라 변명을 늘여놓던 남성을, 루인은 다시 벽으로 집어 던져버린다. 그래도 랭커들만 속해있는 신세리아 르 메이 였으니, 별달리 크게 다치지는 않겠지.
"......"
이어서, 랭킹 1위의 여성, 세르레니아 루인은 천천히 내 쪽을 향해 내려온다. 묘하게 진행되는 긴장감.
"흐응......"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고, 내 사역마들은 하나같이 전투 자세를 취하며 얼굴을 험상궂게 일그러뜨렸다.
"......"
영화관과도 비슷하게 생긴 VIP 관람석 속,
불과 몇계단 위까지 다가 온 그녀.
그리고는,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잘못했다."
"응?"
"부디 부하의 결례를 이해해다오."
"흐음......"
너무나도 뜻밖인 루인의 행동에,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명색이 랭킹 1위에다 과거 나를 몰아붙였던 경력이 있으니 덤비지는 못할지언정 자존심은 세울 줄 알았건만, 이렇게 쉬이 고개를 숙일지는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앞으로는 교육을 잘 시키도록 하겠다."
"......"
"방침도 새로 정하도록 하겠다."
"......"
"원한다면 내 핫도그도 주겠다."
"...응?"
"그러니까 제발 용서해다오."
애처롭다시피 용서를 구하는 세르레니아 루인. 이렇게까지 자신을 숙이고 나오는데, 굳이 더 추궁할 필요가 있을까?
"......"
아니, 어쩌면 이 기회를 틈타 확실히 밟아버리는 것도 괜찮을수도. 무엇보다 훗날 가장 위험이 될 수 있는 그 '신세리아 르 메이'였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내가 위라는걸 각인 시켜 줄 필요는 있겠지.
"......"
결국 나는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이어서 허리를 숙이고, 요사스러운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가져다 댄 뒤,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한번만 더 눈에 거슬리는 행동 했다가는,"
"......"
"그때는 가차없이 다 죽여버릴거야."
"......"
"대답."
"......알겠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답을 내뱉는 세르레니아 루인. 미묘하지만, 식은땀 하나가 그녀의 이마에 맺히는 것 또한 볼 수 있었다.
"좋아!"
랭킹 1위의 대답에 만족한 나는, 그녀의 어깨를 한 번 툭 친 뒤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때마침, 타이밍 좋게 점멸되는 스티디오 올림피코의 전등들.
[신사숙녀 여러분!]
이내 하나의 거대한 불빛만이 경기장 한가운데, 상당히 화려한 복장을 입은 남성을 비추었다. 마치 파티에라도 나온 듯 한 그는 과장된 몸짓과 함께, 또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우리를 향해 외쳤다.
[지금부터 세계길드배 격투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곧이어 엄청난 함성이 경기장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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