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8화 〉 격투대회 (5) (78/85)

〈 78화 〉 격투대회 (5)

* * *

"......"

"뭐, 뭐인거신가요? 저 말도 안되는 건?"

강력한 우승후보였던 젠시야가 압도적으로 밀리자, 옆에서 경기를 보고 있던 세르레니아 루인과 사쿠라 요코 또한 경악을 금치 못한다.

하긴, 허망급 아이템까지 지니고 있는 대형 길드의 부길드장이, 그것도 생전 처음보는 여자애한테 저리 쉽게 무너지는데, 놀라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터.

[크윽...!]

그 장본인인 젠시야는 온힘을 다해 아드레나인의 손을 빠져나려 노력하지만, 일개 유저의 힘으로 드래곤 로드의 악력을 떨쳐낼 수는 없었다.

[해신의 가호...!]

[...?]

"응?"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보겠다는 걸까, 결국 젠시야는 끝까지 놓지 않고있던 해신의 우산을 치켜들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우산 끝쪽으로 흡수되기 시작하는 새하얀 빛들.

"저건......"

묘하게 익숙한 그 빛들에, 나는 눈살을 찌푸린다.

분명 저건 지난번에 젠시야가 내 공간 붕괴를 캔슬시키면서 내뿜었던 빛들. 그리고 지금 그 빛들이 다시 나온다는 건 그녀가 저 허망급 아이템의 특수능력을 발휘했다는 것.

[꺼져.]

[......?!!]

아니나 다를까, 우산 끄트머리에 모인 빛이 마치 레이저 마냥 발사되어 아드레나인을 저 멀리로 날려버린다. 허공으로 솓구쳐 결계에 부딪힌 뒤 땅바닥에 떨어지는 그녀. 전광판의 HP게이지 또한 미약하게나마 줄어들기 시작했다.

[젠시야아아! 위기의 순간에서 벗어납니다아아!]

그 모습을 본 사회자가 광분하며 소리친다.

자신들이 응원하는 선수의 반격에 열광하기는 관중들도 마찬가지. 거대한 함성이 또다시 장내를 훑고 지나갔다.

[우와아아아아!]

[할 수 있다!!]

[멋있다아아!]

[......]

자신을 향한 응원에 힘입으며, 도도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젠시야. 제복에 묻은 먼지를 털며, 그녀는 진중히 전투 태세에 들어간다.

[아......]

...그리고 저 멀리, 경기장의 잔디 바닥에 처박혀버린 아드레나인 또한, 천천히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표정했던 아까와는 달리,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녀. 얼굴에는 데미지를 입었다는 것에 대한 분노, 두려움보다는, 그저 즐겁다는 감정만이 가득 차있어 보였다.

[김용용 또한 처음으로 데미지를 입습니다!]

설명을 이어가는 사회자.

그의 목소리가 경기장 내에 쩌렁쩌렁 울려퍼지며, 아드레나인의 HP가 처음으로 닳았음을 관중석에 널리 퍼뜨려주었다.

[...칫,]

반면 젠시야는, 자신의 특수 공격까지 막아버린 아드레나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잔뜩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차댔다.

[......이것도 버텨봐.]

이내 숨겨놓았던 비장의 수를 꺼내는 듯,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해신의 우산을 높게 치켜드는 그녀. 이어서 어디선가 몰려 온 먹구름들이, 뻥 뚫린 경기장의 천장을 가득 메꾸기 시작하였다.

[오......]

그리고 아드레나인은 마치 솜사탕을 바라보는 어린아이 마냥 그 광경을 가만히 서서 유심히 구경한다. 무슨 공격이 날아올지, 어떤 스킬을 전개할지는 이미 그녀의 관심 밖인 듯 하였다.

"......렉타우스."

「예, 전하.」

"아드레나인의 내구가 얼마나 되지?"

어라이징에 존재하는 무구들 중 가장 높은 내구도를 지닌 해신의 우산을 맞고도 멀쩡하다. 기관총 마냥 날아오는 은탄환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도 멀쩡하다. 심지어 허망급 아이템의 특수 능력을 적중당하고도 생채기 하나 난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이제 오히려 무슨 공격이 올 지 기대를 하는 것처럼만 보이는 아드레나인에, 결국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렉타우스에게 물었다.

「흠...」

그러자 턱을 긁적이며 잠시 고민에 빠지는 아크 데빌.

무언가 깊게 생각을 하더니, 이내 그는 손가락을 튕기며 경쾌한 목소리로 내게 답하기 시작했다.

「아드레나인이 보기에는 그래도 나름 드래곤 로드이니, 운석 몇개를 직통으로 맞지 않는 이상 저런 공격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겁니다.」

"운석?"

「예, 헌데 지금은 폴리모프 상태이니 그것보다는 약할 것 같군요.」

...이어서 '지난번에도 보았듯이, 아마 폴리모프 상태에서는 세리아나의 마력량 정도를 다 털어야지만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의 내구일 것입니다'라고 덧붙이는 그. 나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구나......"

하긴, 지난번에 서큐버스 퀸인 세리아나가 자신의 마력이 고갈날때까지 공격하여 겨우 그녀를 쓰러뜨렸었지. 그 마저도 세리아나 자신이 먼저 KO당하긴 했지만 말이야.

[......천재지변(??災?).]

그리고, 먹구름이 어느정도 모인 것을 확인한 젠시야는, 우산으로 아드레나인을 가리키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늘에 모인 먹구름들이 마치 지진이 난 것마냥 울렁이더니, 이내 무시무시한 낙뢰(?雪)들을 내뿜기 시작하였다.

[젠시야아아! 미친듯한 번개를 소환해냅니다아!]

"......"

...사회자의 말마따나, 경기장 바닥을 아예 갈아버리며 서서히 아드레나인 쪽을 향해 뻗쳐나가는 벼락들. 위력으로만 보았을 때는 지금까지 전개한 스킬들 중 단연 최고조로 보였지만,

[흥.]

아드레나인은 콧방귀를 치며 천천히 내리치는 번개들을 뚫고 젠시야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었다. 그 서슬에 여러 벼락이 그녀에게 적중하였지만, 전광판의 HP도, 그녀의 발걸음도, 그 어떠한 것 하나 동요하지 않았다.

[말, 말도 안됩니다! 생채기 하나 없이 번개들을 뚫고 걸어오는 김용용!]

[말도 안돼...]

[사,사람 맞음?]

기겁하는 사회자와, 입을 다물지 못하는 관객들.

나름 자신의 비장의 한 수라고 발동한 스킬을 완전히 무시하며 다가오는 아드레나인에, 젠시야 또한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같잖은 기술...]

생각했던 것보다 식상했던 공격에 실망한 것인지, 아드레나인은 잔뜩 표정을 구기며 젠시야를 향해 걸어간다.

[주군에 비하면 한없이 모자르다...]

...검정 단발머리의 소녀가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주먹을 꽉 쥐어보인다. 이어서, 어깨를 한껏 뒤로 젖힌 뒤, 맨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속도로 정권을 내지른다.

[김용용! 마치 용과 같은 기세로 주먹을 내지릅니다!]

배경음악처럼 깔리는 사회자의 중계와,

[치잇...]

서둘러서 우산을 펼쳐 방패처럼 자신의 몸을 감싸는 젠시야. 허나, 아까도 그랬듯이, 우산이 펼쳐지는 속도보다 주먹이 휘둘러지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아무리 단단한 방패라도 막기 전에 때려버린다면 무용지물일 뿐. 아드레나인의 주먹은 어정쩡하게 펼쳐진 우산을 지나 그 푸른 머리 소녀의 명치에 그대로 박히고 만다.

[.....!]

비명도 채 지르지 못하고 그대로 자리에 고꾸라지는 젠시야. 대신 인형이 받을 수 있는 충격의 한계치를 넘었던 것인지, 입에서는 피를 왈칵 쏟아내고, 전광판의 HP게이지 또한 이윽고 '0'을 가리켰다.

[아......]

[......]

[무,무슨......]

...승패가 결정된 순간, 평소 같았으면 환호성이 넘쳤을 이 격투 대회장에는, 그저 싸늘한 침묵만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젠시야... HP 0...]

결국 마지막을 장식한 것은 언제나 그랬듯이,

사회자의 떨떠름한 목소리였다.

[4, 4강 2경기, 스, 승자, 김용용...]

***

.

.

.

.

.

"총주."

"......"

이탈리아 로마, 스타디오 올림피코의 뒷골목.

해가 어둑어둑해져 오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이곳에, 보라색 로브를 뒤집어 쓴 한쌍의 남녀가 만난다.

자신들의 정체를 절대 들켜서는 안된다는 듯,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함을 가하는 그들. 먼저 입을 연 것은 남녀중 금발머리를 지닌 샤프한 남성이었다.

"우선, 젠시야가 졌습니다."

"...의외네."

나지막히 건네져 오는 남성의 말을 들은 여성은, 로브 안에 감춰진 자신의 고스로리 복장을 고쳐입으며 답하였다.

"젠시야가 졌다,라..."

...길드 알슈타인의 주도로 펼쳐진 격투대회 4강전, 누구나 젠시야 슬레이니브와 게르나 에데르타인의 양강구도를 예상하였건만, 정작 나온 것은 예상밖의 결과.

그 흑발의 여성은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남성에게 물었다.

"그럼 아리아 길드가 이겼다는건가?"

"예, 총주."

"하아......"

그녀의 질문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남성.

답변을 들은 보라색 로브를 뒤덮은 여성은 짜증난다는 듯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골치아파졌네..."

격투대회.

평소 같았으면 그 하찮은 여흥거리의 결과 따위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젠시야가 패배했다면, 그것도 '아리아 길드'의 선수한테 패배했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름 허망급 아이템 소유자에다 대형길드의 부길드장인 젠시야다. 그리고 상대역인 아리아 길드는 길드장 이시연을 제외한다면 그런 젠시야를 이길 수 있을만한 전력이 전혀 없을 터였다.

헌데 오늘,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것이 갑자기 나타나 젠시야를 압도하였다.

"누구냐."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젠시야의 패배'가 아닌 '젠시야를 패배 시킨 인물'. 만약 젠시야를 패퇴시킨 그 인물이 용병같은 것이 아니라 정말로 아리아 길드의 신입 멤버라면, 지금 그녀가 세우고 있는 '계획'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은 분명해보였다.

"신원 조회는 해봤나?"

잠시 무언가 생각한 여성은, 이내 무뚝뚝히 남성에게 질문 하나를 던졌다. 젠시야를 이길 정도의 인물이라면 최소한의 정보 몇가지는 있을 터. 허나, 잔뜩 기대에 부푼 그녀의 물음에, 남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찾아는 보았습니다만..."

"다만?"

"...'김용용'이라는 이름 빼고는 아무런 정보도 없었습니다."

"......"

별 성과가 없었다는 듯 깊이 한숨을 내쉬는 남성. 랭킹, 나아가 레벨 정도의 정보라도 기대했던 여성의 눈동자 또한 실망감에 가득차기 시작했다.

"아무런 정보도 없다고?"

여성은 그런 남성의 말을 못믿겠다는 듯, 다시금 되물어본다. 젠시야를 압도적으로 이길 정도의 인물이라면 랭커를 제외하고는 없을텐데, 아무런 정보가 없다고? 그게 말이 되나?

"...예, 헌,헌데, 지금 그것이 중요한게 아닙니다."

"뭐?"

얼굴 한가득 짜증과 의구심을 품은 그 고스로리 여성에게, 남성은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라며 차분히 고개를 저어보였다. 이어서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떨리는 목소리. 짧은 문장 하나가 어두운 뒷골목을 메웠다.

"......옥시안도 경기 관람에 왔습니다."

"......!!"

전세계 유일한 EX급 시즌보스이자 단 한번도 패배한 적 없는 극악무도한 악마. 또한 자신들을 파멸로 이끈 장본인이기도 한 그 분홍머리의 소녀가 격투 대회를 직관하러 왔다는 소식에, 여성의 표정은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하였다.

"옥시안이, 왔다고...?"

"예."

"......"

달갑지 않은 소식들의 연속에, 여성은 몇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내쉬었다. 현 아리아 길드와 동맹관계인 옥시안이었으니, 격투대회에 구경정도는 올 것이라고 어느정도 예상한 바. 허나 그래도 결코 반가워 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제발 방구석에 박혀있기를 그렇게 빌었건만..."

고개를 푹 숙이는 여성. 그런 진이 다 빠져보이는 그녀에게, 남성은 조심스레 말을 건네본다.

"...역시, 이번 계획은 다음으로 미루는게 어떨까요?"

아리아 길드 소속의, '김용용'이라는 예상치 못한 거물의 등장과, 도저히 웃을 수 없는 옥시안의 방문. 이런 여러 악재가 겹친 상황 속, 남성은 여성에게 '계획'의 시기를 미루자고 제안해본다. 허나,

"절대 안돼."

...들려오는 단호한 목소리.

여성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며 답하였다.

"아무리 옥시안이 왔어도, 작전은 무조건 강행한다."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남성을 바라보는 그녀.

어차피 이번 작전의 목표는 지난번과 달리 옥시안이 아니었다. 이번 그녀의 목표는 자신들을 나락으로 보낸 결정을 내린 '세계 길드 회의'의 길드장들, 그중에서도 아리아 길드의 길드장, 이시연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 '격투 대회'는 그런 길드 회의의 길드장들이 전부 모이는, 더군다나 '일반 관객'이라는 인질까지 잡아 협박할 수 있는, 그야말로 최고의 장소. 지금이 아니라면 언제 또 이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관객들을 인질로 잡으면, 제아무리 옥시안이라도 섣불리 나서지 못할 터."

관중들의 목숨을 빌미로 옥시안과 길드장들의 행동을 봉쇄하고, 그리고는 그 틈을 이용하여 원하는 바를 쟁취하면 된다. 인질들을 무시하기에는 보는 눈들이 너무 많고, 자신들의 입지 또한 위험해질 수 있기에 그들 또한 함부로 행동할 수 없겠지.

"...폭탄은 다 설치했나?"

작전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 그녀는, 마지막으로 남성에게 준비 점검에 대하여 묻는다. 그러자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금발의 남자. 자신감에 찬 목소리가 뒷골목에 울려퍼졌다.

"넵! 희귀 아이템 '하데스의 투구'를 사용하여 경기장 곳곳에 은밀히 설치해 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병력은?"

"최정예병 1백명, 현 시 외각에서 대기 중입니다."

"좋아!"

빈틈없는 남성의 보고에 만족감을 드러내는 여성.

그녀는 감정에 복받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드디어, 우리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새끼들한테 죗값을 치루게 할 시간이 왔다."

옥시안과 함께 자신들을 공격하라 명령했던 이시연부터, 지난번 길드 회의에서 자신에게 엄청난 굴욕을 안겨준 세르레니아 루인까지.

솟아오르는 치욕감과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며,

아리아 길드한테 참패를 당했던 길드 '아벨리아'의 2대 총주 로슈포르는, 이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전부, 죽여버린다."

...나지막한 달빛 아래에는,

까마귀 한마리가 울고 지나갈 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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