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 꽃의 잔향 (1)
* * *
「이겨서 다행입니다.」
"응."
대회 1일차의 시합이 완전히 끝난 후,
관객석을 빠져나오던 와중 렉타우스가 내게 말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무뚝뚝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나.
"그것도 압도적으로 이겨서 다행이지."
아드레나인이 이기는거야 원래 당연히 예상했던 일이고, 얼마나 젠시야를 압도하냐가 관건이었는데, 이정도면 뭐, 충분히 만족스런 결과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드레나인 본인도 뿌듯해하고 있겠지.
「흥! 제가 했으면 더 잘했을거시와요.」
반면, 옆에서 걷던 세리아나는 아직도 자신이 시합에 나가지 못한게 분한 것인지, 볼에 바람을 빵빵히 불어넣고 불만을 표해내고 있었다.
"다음번에는 너 내보낼테니까 기분풀어."
가끔은 어린애같기도 한 그녀를 애써 달래며, 우리는 엘레베이터를 타고 다시금 1층으로 내려왔다. 스타디움의 출구는 우리가 있었던 VIP석과는 달리, 정말 많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니 씨발! 젠시야가! 지는게! 말이 되냐?"
"이거 조작이야, 아니, 무조건 그래야 돼."
"내 돈......"
"......"
특히나 들어올때 봤었던 배팅소에는 더더욱 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는데, 대부분이 젠시야와 아드레나인의 결과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며 거세게 항의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기야, 어디선가 굴러온 햇병아리 하나가 우승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겨버렸는데, 저런 반응이 나오는게 당연하겠지. 이마 날린 돈들도 상당할테니 말이야.
"비켜 이 빡대가리들!"
"응?"
...그리고 그때,
한명의 소녀가 그런 군중들을 힘겹게 밀치며 배팅 환전소로 들어왔다. 붉은색의 야구모자를 쓴 그 금발의 소녀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환전하는 곳의 책상을 탁 치며 소리친다.
"그러게 내가 힙스터한 픽 뽑으라고 했지? 젠시야만 빨아재끼더니 꼴좋다!"
이후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두드려 보이는 그녀. 말하는 것을 듣자하니, 이 많은 사람들 속 유일하게 아드레나인쪽에 돈을 건 듯 하였다.
"무려 20배야 20배! 발상의 전환같은 건 모르는 이 근육돼지들아!"
큰 돈을 따게 된 것이 어지간히 신났는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띄운 채 주변인들을 놀리는 소녀. 허나, 행복에 잠긴 그녀와는 달리, 환전소에 몰린 대다수 사람들의 표정들은 그렇지 못하였다.
"젠시야도 이제 퇴물이라니까? 시대가 바뀌고 있다고!"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주변을 눈치채지 못한 듯, 실실 웃으며 자기자랑을 계속 이어나갔다. 그리고 그런 소녀를 바라보며 어정쩡한 웃음을 지어보이는 나.
"적당히 해야될 것 같은데..."
어찌보면 연애 문제보다 더 심각할 수 있는 돈 문제다. 신난 건 이해하겠지만, 주식이 대폭하락한 것과 다름없을 사람들을 앞에 두고 저리 놀려대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어린년이 건방지게...!"
"...어?"
...아니나 다를까, 소녀의 깐족거림에 결국 몇몇 건장한 남성들이 이를 갈며 군중들 속을 헤쳐나온다. 곰도 도망칠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소녀의 앞에 서는 세명의 남자들.
"놀리는 것도 적당히 해야지, 죽고 싶냐?"
"어? 아,아니, 그게..."
검정색의 제복을 걸친 그들은 허리춤에 찬 롱소드에 손을 가져다대며 소녀를 죽일 듯이 노려다본다. 살기가 느껴지는 그들의 위협에, 소녀 또한 그제야 무엇이 잘못됐음을 깨닫고 서서히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일,일단, 진,진정하세,요...?"
"닥쳐! 이 개같은 꼬맹이."
진정하라는 제스처를 취해보이는 금발의 소녀에, 어림도 없다는 듯 으르렁거리는 남성들.
검정색의 제복과 가슴팍에 새겨진 고양이 그림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젠시야와 같은 '검은 고양이들의 축제'의 길드원들인 것 같았는데, 돈도 잃고 자신들의 부길드장까지 쌍으로 욕보였으니, 뭐, 쉬이 화를 풀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
나는 무뚝뚝한 표정으로 기겁해있는 소녀를 향해 특성 '염탐자'를 발동하였다. 그러자 그녀의 야구모자 위로 짤막한 텍스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나탈리아 엘레나 스베틀라나]
LV. 17
종족: 인간
길드: X
※상태이상: 최면
"......"
일반 유저에 비해 한없이 빈약한 레벨.
아무래도 저 금발의 소녀는 유저도, 이종족도 아닌, 변화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반 순수 민간인인 듯 하였다.
...뭐 믿는 구석이 있고 저리 까부는 줄 알았건만, 20레벨도 채 못넘기는 상태라니, 검은 고양이들의 축제의 길드원들을 이긴다는 건 아예 불가능하겠구먼.
"...길드는, 없고."
나는 계속해서 그녀의 스테이터스를 훑기 시작한다. 역시 일반인답게 소속된 길드는 없었으며, 종족 또한 인간.
"......응?"
...허나, 그 평범하디 평범한 스탯들 사이 속, 내 눈길을 끈 것은 텍스트의 맨밑, 붉은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 다소 보기 드문 단어 하나였다.
"......최면?"
소녀의 정보창 제일 아래,
선명히 박혀있는 '최면'이란 두 글자.
최면이란 일정 시간동안 상대를 자신의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상태이상으로, 그 강력한 위력에 걸맞게 희귀급 아이템이 있지 않고서야 일반 유저들은 절대로 쉬이 걸 수 없는 상태이상 중 하나였다.
"......"
...그 보기드문 글자에 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경기를 보러 온 대부분이 거의 200~300레벨 정도의 하급 유저들일뿐, 최면과 관련된 아이템을 소지하고 있을 법한 사람은 없어보였다.
게다가 지금같은 상황 속, 저 소녀에게 어울리는 상태이상을 뽑자면 '최면'보다는 '공황'이었다. 자연적으로 걸릴 수 없는 최면의 특성상, 아무래도 누군가가 이미 소녀한테 최면을 걸어놓고 조종하고 있는 상태인 것 같았다.
"재밌네."
일반인에게 최면을 걸고 다니는 악질 최면술사.
이건 저 소녀를 넘어 타인들에게도 지대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듀랑발."
나는 검은 고양이들의 축제 길드원들한테 내몰리고 있는 그 소녀를 바라보며, 옆에 서있던 듀랑발한테 조용히 명령을 내린다.
"저 여자애 데려와."
당장 최면에 걸린 장본인을 조사하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나아가 혹시 범인을 잡게 된다면 최면과 관련된 좋은 아이템 하나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나쁠 것은 없어보였다.
「알겠습니다.」
...어쨌거나, 나의 명에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이어서 그 육중한 갑옷으로 이루어진 몸을 이끌고서는, 환전소 앞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뭐야?"
"밀치지 마세요!"
「......」
상당히 과격한 그의 몸짓에 항의하는 몇명의 사람들. 허나, 듀랑발은 인간의 말 따위 관심 없다는 듯 그들의 짜증들은 싸그리 무시하며 소녀에게로 다가갔다.
"엉?"
"뭐야?"
「......」
이윽고 소녀와 남성들 사이를 굳게 가로막고 선 그. 이어서 무뚝뚝한 목소리로 소녀에게 말을 건네었다.
「따라와라. 주군께서 부르신다.」
"어, 어?"
갑작스레 등장한 데스나이트에 한껏 당황하는 소녀. 단지 떨리는 눈빛으로 그 검정 갑옷의 기사를 올려다 볼 뿐이었다.
"데, 데스나이트?"
"최상급 괴수가 왜 여기에?"
기겁하는 표정을 짓기는 검은 제복의 남성들 또한 마찬가지. 그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그 데스나이트를 향해 자신들의 검을 빼들었다.
"데스나이트다아아!"
"경비병, 경비벼어엉!"
...군중들 또한 자신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던 존재가 인외의 생명체임을 깨닫자 패닉에 빠지기 시작한다. 안그래도 시끄러운 마당에 더더욱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하는 스타디움의 로비.
"......아휴,"
나는 그런 그들을 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옥시안과 동행하지 않고있는 듀랑발은 그저 하나의 데스나이트로만 보일 뿐이니, 일반인들한텐 상당히 위협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나는 엑스트라 스킬 '통솔'을 사용하여 환전소 앞에 몰린 모두에게 말하였다.
"모두 그만..."
유치원생들의 투정에 짜증난 듯 한 목소리가 홀 내에 울려퍼진다. 그 마력이 섞인 목소리에, 하나 둘 움직임을 멈추고 시선을 내게로 돌리는 사람들.
"누구?"
"잠시만, 핑크색 머리에 붉은 드레스...?"
"옥시안...?"
"......"
나불대는 입들은 멈추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방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용해진 것이 통솔이 상당히 잘 먹혀들어간 것 같았다. 나는 이어서 멀뚱히 서있는 소녀를 향해 손짓한다.
"너, 이리로 와."
"네? 네..."
'통솔'덕인건지 옥시안의 네임벨류 덕인건지, 고분고분 말을 잘 들으며 내쪽으로 천천히 걸어오는 소녀.
"잠, 잠시만!"
"앗, 아아...."
"응?"
그리고 그런 소녀를 아쉽다는 듯 쳐다보는 남자들. 나는 그런 그들에게 메롱 혓바닥을 내밀며 약올리는 듯이 말한다.
"왜, 불만 있으시면 거기 제 사역마하고 얘기하세요."
"데스나이트가, 사,사역마?"
"그럼 설마 얘가 듀랑발?"
"그럼 당신이 옥시안이라고...?"
방금전까지 기세등등했던 그들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뭐, 그러든 말든, 아드레나인이 아닌 젠시야에게 배팅한 괘씸한 그들을 뒤로 한 채, 나는 소녀를 데리고 이 널찍한 스타디움을 빠져나온다.
내 뒤를 렉타우스, 세리아나, 듀랑발이 차례로 따랐고,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수근덕 거리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들려왔다.
"진짜 옥시안이야!"
"경기 보러왔다는거 뻥인줄 알았는데."
"사진이라도 찍어달라 할래?"
"......"
어딜가든 만국공통인 옥시안에 대한 관심.
이제는 이러한 반응도 슬슬 익숙해져가는 나에게, 뒤따라오던 세리아나가 물었다.
「...주인님, 레반하워즘으로 전이문을 열까와요?」
워낙 넓고 풍경이 좋아 현재 내가 집처럼 삼고있는 그 천공섬(???)으로 전이문을 열까 묻는 그녀에게,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시연이 근처 호텔을 잡아뒀다고 했으니, 오늘은 거기서 묵으려고."
처음오는 유럽, 이탈리아인데, 이왕이면 호텔에 가서 여행 기분 좀 내보지 뭐. 그리고 무엇보다,
"...얘를 데리고 레반하워즘에 가기엔 좀 그렇거든."
"......"
나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있는 금발머리 소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하였다. 그 잔혹무도한 EX급의 시즌보스가 자신의 옆에 있는게 믿기지 않는 것인지, 계속해서 내 눈치를 보는 소녀. 나는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말을 건네었다.
"쫄 필요 없어. 그냥 몇가지 물어보고 싶은게 있어서 데리고 온거야."
...게다가 그 많은 관중들 중 거의 유일하게 아드레나인에게 배팅해 준 소녀인데, 그 기개를 봐서라도 감히 헤칠 수는 없지.
"음... 이왕이면 보는 눈이 적은 곳이면 좋겠는데."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부근은 스타디움을 빠져나오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조금은 인적이 드물고 한적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
...그렇게 말없이 걷기를 약 3분.
어두운 뒷골목을 발견한 나는 소녀를 데리고 그곳으로 들어간다. 사역마들 또한 내 뒤를 따라 골목으로 들어온다.
"물, 물어보실게 뭔데요..."
마치 양아치한테 둘러싸인 것 마냥 잔뜩 겁에 질린 소녀. 나는 그녀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애써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였다.
"별거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뭐, 정작 최면에 걸려있는 소녀 장본인에게는 큰 문제일수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이름이 뭐야?"
간단한 질문 몇개로 대화를 시작한다.
나의 물음에, 우물쭈물거리며 답하는 소녀.
"나,나탈리아 엘레나 스베틀라나"
"......"
이름 정도야 이미 염탐자로 확인한 내용.
나는 그녀의 이름을 곰곰히 곱씹어본뒤, 몇가지 추가적인 질문을 던졌다.
"나탈리아 엘레나 스베틀라나? 이름이 러시아쪽 이름이네? 그럼 혹시 그쪽에서 온거야?"
"네? 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왔어요..."
"그럼 여기엔 언제왔어? 부모님은? 혼자 온거야?"
"여긴......"
정보를 캐낸다기보다는 살짝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던진 그 질문에, 소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려보이는 나이도 그렇고, 유저도 아닌 일반인 신분으로 이 시국에 러시아부터 그 먼거리를 오긴 힘들었을텐데 말이야.
"여, 여기엔......"
"응, 여기 이탈리아에는 언제 온거야?"
"여기엔..."
"여기엔?"
"......언제, 왔더라?"
"......"
헌데, 생각보다 간단한 질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급격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소녀의 동공. 그녀는 머리를 부여잡고는 미친듯이 무언가를 떠올리려 노력하기 시작한다.
"기, 기억이 안나..."
"......"
"내가 여길 언제, 어떻게 왔지?"
"......"
"내가 대체 여길 어떻게 온거지?"
"......"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마냥 소녀는 격한 패닉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이어서, 푸른색이었던 그녀의 눈동자 또한 서서히 빨간색, 즉 적안(赤?)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주인님, 저 소녀, 아무래도 세뇌에 걸린 것 같사와요.」
"응, 그런거 같아."
나름 세뇌와 최면쪽에 일가견이 있는 세리아나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을 살짝만 되짚어 주었는데도 바로 이런 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을 보아, 그녀에게 걸려있는 최면의 정도가 심하다는 걸 알수있었다.
그리고,
"......옥시안."
"......"
새빨간 피와 같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사악한 미소와 함께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소녀. 순식간에 변한 인상부터 목소리까지, 무언가 다른 영혼이 그녀에게 들어왔음을, 세뇌든 최면이든, 그 무언가가 극한으로 치달았음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소녀는 빳빳이 나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건 내 전언(??)이다."
"전언?"
"그래, 앞으로 할 이 말을 전하려고 50명이나 이탈리아로 파견했지. 너가 먼저 알아봐줘서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야."
"......"
마치 하나의 무전기가 되어 누군가의 말을 전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녀. 그녀는 감정 따위 없는 목소리로, 말그대로 전언을, 자신에게 최면을 건 이의 말만을 전할 뿐이었다.
"그래, 무슨말을 하고 싶은거지?"
대체 어떤 거청한 말을 전해주려 하기에 50명이나 내 뒤에 붙인거지? 이런 어린 소녀한테까지 최면을 걸어가며?
선전포고? 협박?
아니면 아우레키아와 같은 스토커?
혹은 단순히 성질을 긁는게 목표라면 이미 반절은 성공한 것 같은데?
"...다 틀렸어."
"......"
내가 신경질적으로 내뱉은 말들에, 소녀는 웃으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이어서 손가락으로 내 목에 걸려있는 새빨간 진주 하나를 가리키는 그녀.
"네 목에 걸린, '허망급 아이템' 피의 진주."
동시에 씨익하고 사악한 미소를 지어보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뭐? 탐난다고? 혹시 뺏어가겠다고 선포하는거야?"
"......아니지, 전혀 아니야, 끝까지 들어."
내가 한껏 짜증을내자,
금발머리 소녀의 몸을 빌린 '누군가'는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어보인다. 이후 그녀는 천천히 다시금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본디 '희귀급' 아이템은 게임의 판도를 바꾸고, 너가 갖고 있는 그 '허망급' 아이템은 게임의 질서를 거스른다고 하지,"
...소녀는 자신의 아담한 어깨를 으쓱여보이며 말한다. 이후, 핏물과도 같은 적색 눈동자를 번뜩이는 그녀. 냉혈한 목소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럼 그 위에는 뭐가 있을까? 생각해본적 없어?"
"...뭐?"
알 수 없는 소녀의 말에, 나는 잔뜩 표정을 구겼다.
허망급 아이템의 위? 들은적도 없고, 이미 허망급 아이템이 아이템의 등급 중 최상의 등급이라는 건 공고히 퍼진 불변의 사실인데?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계속 생뚱맞은 소리하면 죽여버린다."
"......역시 넌 너무 어려."
"뭐?"
당장 본인을 눈앞에 두고 혀를 쯧 차는 소녀.
이어서 그녀는 아담한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게 펼친다.
그러자 그녀의 손으로 모여드는 금빛의 입자들.
"......이게 뭐야?"
점점 모여들어 새하얀 꽃 한송이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금빛 입자들에, 나는 눈살을 찌푸려보인다. 그리고 그런 꽃송이를 바라보며 중얼거리는 소녀.
"'허망급'보다 높고,"
"오로지 퀘스트로만 얻을 수 있으며,"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들,"
...이윽고 소녀의 손에는 아름다운 백합 한송이가 제 형태를 완전히 갖추었고, 그녀는 그것을 조심스레 내게 건네었다.
"......초월급 아이템."
"뭐?"
난생 처음 들어보는 단어에, 나는 얼빠진 목소리를 내뱉는다. 그러자 쿡쿡 웃으며 추가적인 설명을 보태주는 '누군가'.
"그건 내가 퀘스트를 클리어해서 얻은 초월급 아이템, '엘로이의 꽃'."
"...엘로이의 꽃?"
"효과는 단 3번, 시전자의 미래를 보여준다."
"......"
"뭐, 한번은 내가 썼으니 남은건 이제 두번이겠지만 말이야."
"......"
계속해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는 소녀에, 나는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그녀가 건네준 백합 한송이를 빙빙 돌리며, 나는 무관심한 목소리로 물었다.
"다 필요없고, 너 누구냐? 그것만 말해."
초월급이니 엘로이의 꽃이니, 무언가 장황한 말들을 잔뜩 늘여놓긴 했지만, 애초 내 목표는 그저 최면을 건 놈을 알아내는 것 하나. 저 녀석이 무슨 말을 내뱉든, 무엇을 건네든, 그런건 관심 없었다. 단지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만 알아내면 될 뿐.
"...나 말인가?"
"그래 너요. 지금 원격으로 말하고 있는 너요."
"하아......"
...내 물음에,
눈앞의 금발의 소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이어서,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짤막한 단어 하나.
"......피스티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