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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화 〉 꽃의 잔향 (2) (80/85)

〈 80화 〉 꽃의 잔향 (2)

* * *

"피스티처...?"

나탈리아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름 하나에,나는 표정을 잔뜩 구겨보였다.

그도 그럴것이, 피스티처라하면은 난이도 S급의 시즌보스로 현재 러시아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있는 장본인이었으니까.

무력은 별달리 특출나지 않았어도, 그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으며 그녀가 사용하는 최면술 또한 매우 강력했기에 결코 만만히 볼 상대는 아니었다.

정신공격에 내성이 없는 사람들, 특히나 이 나탈리아처럼 변화과정을 거치지 않은 일반인들에게는 더 치명적으로 다가오겠지. 실제로 그녀의 군대 대부분이 세뇌를 당한 민간인들이라고 했으니 말이야.

어쨌거나, 아까전 나탈리아도 본인 입으로 러시아 출신이라 밝혔으며, 염탐자도 그녀의 상태이상을 확인해주고 있었으니, 지금 소녀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이가 피스티처임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하긴, 그녀가 아니고서야 이렇게 완벽히 최면술을 다룰 수 있는 이는 거의 없겠지.

"......"

나는 이번엔 그녀가 건네준 새하얀 꽃송이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에 따르면 이 꽃은 이른바 '초월급 아이템'. 퀘스트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무려 그 허망급 아이템을 뛰어넘는 물건. 효과는 딱 3번, 시전자의 미래를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하였다.

"근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들고있던 꽃을 뒤로 휙 던져버린다. 그러자 그것은 또다시 금빛가루가 되어 허공으로 사라졌다.

"내가 네 말을 어떻게 믿어?"

온데간데 사리진 꽃을 뒤로한 채, 나는 나탈리아,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의 몸에 깃들여있는 피스티처에게 말하였다.

"저게 초월급 아이템이라는 증거있어?"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지금 내 앞에 있는 것은 피스티처.

착하다고 정평이 난 시즌보스도 아니고, 정의로는 시즌보스는 더더욱 아니었다. 현재 가장 위험한 시즌보스로 뽑히는 그녀의 말을 어찌 한번에 믿을 수 있을까.

"초월급이 맞다 하더라도, 혹시 그 효과가 시전자의 목숨을 앗아가는거라면?"

"......"

"무언가 협상을 하고 싶은거라면 적어도 증거들은 가져 왔어야지."

"......"

쌀쌀맞은 나의 말에, 이 금발의 소녀는 그저 히죽히죽 웃어보일 뿐이었다.

"증거, 증거라......"

이어서, 무어라 웅얼거리기 시작하는 그녀. 호기어린 목소리가 뒷골목에 울려퍼졌다.

"그래, 기다리고 있어라. 조만간 정식으로 초대하도록 하지."

"뭐? 초대? 어디로?"

"......"

알 수 없는 말을 내뱉는 그녀에 내가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대답이 아닌 영혼이라도 빠진 듯 풀썩 쓰러지는 나탈리아였다.

"하..."

나는 깊은 한숨과 함께 땅바닥에 엎어진 그녀를 향해 다시금 특성 염탐자를 발동한다. 그러자, 아까와 달리 깔끔하게 사라진 '상태이상' 표시. 즉, 최면이 풀렸다는 것.

"지 할 말 다했으니 됐다 이건가..."

나는 고개를 푹 숙이며 중얼거렸다.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만, 목적이 자신의 존재, 혹은 자신이 나 옥시안을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거였다면 반은 성공한 셈이군.

"......"

초대든 뭐든, 조만간 다시 한번 보자고 한 그녀였으니 머지않아 다시 사람을 보내겠지. 이번에도 나와 접선을 위해 50명이나 이 이탈리아에 파견했다 했으니 말이야.

"...세리아나."

「예, 주인님.」

이어, 나는 세리아나를 부른뒤 고갯짓으로 까닥 나탈리아를 가리켰다.

"스타디움에 다시 데려다 놓고와."

「알겠사와요.」

아무런 능력도 없는 일반 인간인데, 이런 뒷골목에 홀로 놔두는 건 꽤나 위험할 터. 마침 아까 시합 배팅금도 못돌려 받은 듯 하였으니, 경기장 근처에다 내려놓으면 알아서 잘 하겠지.

「그럼.」

내 명령에 세리아나는 고개를 꾸벅 숙인 뒤, 그 금발의 소녀를 안아들고 밤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그럼 우리도 가자."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나는 남은 두명의 사역마를 데리고 예약된 호텔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냥 레반하워즘으로 돌아가 숙식을 해결해도 됐지만, 그래도 모처럼 해외에 왔는데, 이왕이면 호텔에서 숙박하며 여행 분위기를 내보고 싶었다.

더군다나 시합을 마친 아드레나인은 이미 호텔에 도착했을테니, 잔뜩 신이 난 그녀의 얘기를 들어주기 위해서라도 서둘러 호텔로 가는게 좋아보였다. 염문(?)으로 대화를 하기엔 한계가 있었으니 말이다.

"렉타우스, 듀랑발."

「예, 전하.」

「네, 나의 주군이여.」

"...아까 경기 어떻게 봤어?"

호텔로 가는 길, 이어지는 적막함에 질린 나는 뒤따라오던 사역마들에게 스리슬쩍 질문을 던져보았다. 오늘 치뤄진 2개의 시합. 나야 그저 눈요기로 봤을 뿐이지만, 과연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꽤나 궁금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듀랑발이었다.

「...저는 첫번째 경기를 인상깊게 봤습니다.」

"첫번째 경기?"

첫번째 경기라 하면은 게르나 에데르타인과 사무엘 피치스의 경기. 분명 일방적이었던 두번째 경기에 비해 보는 맛이 있긴 하였지만,

"...어느점에서 인상깊었지?"

「그 양갈래 여자의 무투가 꽤나 볼 만 했습니다.」

흥미로이 물은 나의 말에, 고개를 꾸벅 숙이며 답하는 데스나이트. 그는 부가적인 설명을 덧붙여 보였다.

「땅바닥을 딛지 못하게 하여 빈틈을 만드는 것과 강력했던 소규모 타격스킬, 적잖이 봐줄만은 하였습니다.」

"흐음..."

하긴, 나 또한 일반 유저가 소규모 타격스킬을 쓰는 것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 흥미롭게 볼 만한 부분이긴 했지. 특히나 그녀의 뒤로 솟아올랐던 거대한 정령과도 같은 형태가 상당히 기억에 남긴 하였다.

"...그러면 렉타우스는?"

듀랑발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돌려 렉타우스를 쳐다보았다. 상당히 지략가적인 면모를 보이던 그였으니, 무언가 더 세세한 분석을 내놓지 않을까하는 기대감도 은근히 샘솟아 올랐다.

「뭐, 듀랑발의 말마따나 첫번째 경기도 재밌었다만, 아무래도 저는 두번째 경기가 더 흥미로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는 렉타우스.

두번째 경기라면 아드레나인과 젠시야의 경기로, 너무 일방적인 싸움이여서 나는 별 볼 것이 없다고 느꼈는데 말이다.

「물론 경기 내용은 한심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상대방은 경험이 부족한게 너무 눈에 보이는데다가, 아드레나인 또한 약간의 계획 같은 것 조차 세울 생각은 하지도 않았으니 말이죠.」

상당히 실망스러웠다는 감정을 내비치는 그였지만,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그것이 전부는 아님을 내비쳤다.

「허나 그렇기에 분석할 거리는 더 많았습니다. 인간 형태의 아드레나인이 전개하는 공격 패턴부터, 허점들까지.」

입고있는 정장의 옷매무새를 다잡으며 말을 잇는 그.

「내일 붙게 될 상대방 또한 이를 파악했을테니, 이따가 숙소에 가서 같이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어, 그래."

걸어가면서 하기엔 할 말이 많다는 듯, 숙소에서 아드레나인과 같이 듣기를 권하는 그 아크 데빌. 자신감 넘치는 그의 말에, 나는 흡족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

내일 열리는 결승전.

아드레나인의 상대는 '신세리아 르 메이'의 게르나 에데르타인. 그렇게 인기가 많던 젠시야마저 재치고 우승후보 1위로 점쳐지는 인물.

"재밌겠네."

옥시안의 사역마들 중 최강이라 일컫어지는 다크드래곤 로드와, 그에 맞서는 랭킹 1위 길드의 대표. 결과야 아드레나인이 이길 것이라는 건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그래도 꽤나 재밌는 경기가 나올 것만 같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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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이다 우승!"

......스타디오 올림피코의 인근 호텔 최상층에 위치한 어느 방, 아름다운 금발을 양갈래로 묶은 한 소녀가 신이 난 듯이 침대에서 방방 뛰며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젠시야 조기탈라아아악!! 이제 내가 100% 우승이다!"

자신의 미래를 상상만 해도 행복하다는 듯, 푹신한 배게를 꼭 껴안으며 히죽히죽 웃어보이는 그녀. 그리고 그런 자신의 부하, 그러니까 게르나 에데르타인을, 루인은 그저 한심하게 쳐다 볼 뿐이었다.

"아직 끝난게 아니니 방심하지마..."

그녀는 소파에 앉아 자신의 무기인 허망급 아이템 '달의 송곳'을 정돈하며, 무심히 충고를 날린다. 그리고 쌀쌀맞은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에데르타인은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보였다.

"뭐? 아니거든! 끝 맞거든!"

눈살을 찌푸림과 동시에 발끈 소리치는 그녀.

현상황은 자신과 함께 우승후보로 뽑히던 젠시야가 조기탈락하고, 웬 이상한 꼬맹이 한명이 결승으로 올라온 상황.

즉, 상상만 해도 골치아픈 해신의 우산 공략법을 찾아 볼 필요도 없을 뿐더러, 상대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하찮은 어린 소녀였을 뿐이니, 이제 누가봐도 남은 것은 게르나 자신이 우승하는 시나리오 뿐인 상황인 것이었다.

"......그 이상하고 어린 소녀가 젠시야를 이겼어. 조금은 긴장해."

...허나, 그래도 루인은 한껏 긴장이 풀린 부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보인다. 그런 그녀를 보며 뾰루퉁한 얼굴을 해보이는 에데르타인.

"쳇, 그냥 운이 좋았던 것 뿐이겠지. 아까 보니까 그냥 맷집만 조금 강해보이고, 별다른 테크닉이나 센스는 보이지 않았어."

나름 완전히 긴장을 풀지 않았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것인지, 자신이 분석한 상대의 패턴을 말해보는 그녀.

김용용.

아리아 길드의 대표로 나온 그 소녀에게는 딱히 특출나 보이는 건 없어보였다. 맷집 하나만 기가막히게 강해 어찌어찌 젠시야를 이겼을 뿐, 생각했던 것 만큼 숨은 무림 고수급의 포지션은 아닌 듯 하였다.

"...그리고 나랑 젠시야랑 같은 선상에 두면 섭하지."

에데르타인은 싱글싱글 웃으며 자신의 상관을 향해 말한다. 상대적으로 경험이 부족한 젠시야에 비해, 자신은 어라이징 베타 테스터 출신이며, 유일하게 홀로 시즌보스 공략에 성공한 인물.

젠시야를 이기고 올라왔다 치더라도, 그녀 자신에게는 별달리 큰 위협은 되지 않아보였다.

"......안전불감증이야, 너."

"뭐래."

경기를 지켜봤던 루인은 몇번이고 고개를 저으며 에데르타인에게 경고했지만, 한껏 자신감에 차있는 그녀는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맷집이 강해도 나한테는 그저 빈대떡이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자신만만히 말하는 에데르타인. 그녀는 경기장에서 보았던 그 검정 단발머리 소녀를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어쩌다 이겨놓고 자만에 빠져있을 허접한 년."

내일 내가,

이 에데르타인이,

차이라는 걸 느끼게 해줄게.

"불쌍한 꼬마, 울지나 않았으면 좋겠네."

...이어서 키득키득 거리는 웃음소리가 방 안을 메꾸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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