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화 〉 꽃의 잔향 (4)
* * *
"이시연?"
듀랑발의 말에, 나 또한 눈살을 찌푸리며 현관쪽으로 다가간다. 매끈한 벽에 달린 인터폰에 비친 것은 정말로 다름아닌 이시연.
확실히, 결승전을 보기 위해 하는 일이 끝나자마자 온다고 하긴 했었지. 전이문이 없으니 비행기를 타고 오느라 꽤나 고생했겠구만.
"문 열어줘."
「예.」
나의 말에, 듀랑발은 현관문으로 다가가 도어락의 잠금을 풀고 문을 활짝 열어보인다. 그리고 그 바깥에 서있는 것은 역시나 하얀 제복을 걸친 흑발의 여성.
문이 열리자, 아리아 길드의 길드장, 이시연은 활짝 웃으며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저 왔어요!"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는 호텔 방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 순백의 제복과 허리춤에 찬 롱소드를 구석에 조심스레 내려놓으며,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우, 잠깐 안봤더니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서, 아주 팔이 빠질 뻔 했다니까요?"
이시연은 뻐근하다는 듯 자신의 어깨를 매만져보인다.
"어떻게 사태 초반부터 일이 더 많을 수가 있죠? 어휴 진짜..."
"......"
쌓인게 많은 것인지, 그녀는 내가 인사를 할 틈도 주지 않고 주절주절 푸념을 늘여놓는다. 한참이나 이어진 신세 한탄이 끝나고서야 비로소 얼떨떨히 웃으며 입을 여는 나.
"수, 수고하셨어요..."
"고마워요."
나의 말에 그녀는 싱긋 웃어보인다.
이어서 말없이 부엌 냉장고 쪽으로 다가가 생수 한병을 꺼낸 뒤, 뚜껑을 가볍게 비틀어 딴다.
"아."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패트병을 입에 가져다 대기 직전,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는 이시연. 그녀는 놀랍다는 얼굴과 함께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말하였다.
"격투대회, 아드레나인씨가 압승했다면서요? 비행기에서 소식 들었어요!"
"네? 네, 맞아요."
젠시야와의 시합 얘기를 꺼내는 그녀에, 나는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싱글벙글 웃으며 말을 잇는 이시연.
"덕분에 한국에서 완전 반응 폭발적이라니까요? 모르는 사람들한텐 월드컵 4강에 간 것과 비슷한 느낌일테니, 곧 팬카페도 생길 것 같아요."
"......"
그녀는 예상보다 파장이 엄청나다고 귀띔해준다.
하기야, 자국 출신 이름없는 뉴비 하나가 무려 허망급 아이템까지 지닌 랭커를 이겼는데, 화제가 안되면 그게 이상한 것이겠지.
...옆에서 그 말을 들은 아드레나인 또한 스스로가 자랑스럽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쭉 내밀었다.
「그, 그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 그래."
방금 전 내게 들었던 잔소리는 벌써 까먹은 것인지, 생각없이 뿌듯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 반룡소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그럼, 다음은 에데르타인이네요."
턱을 긁적이며 말하는 이시연.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며 무뚝뚝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그래도 그 얘기 중이였어요."
"흠......"
갈증이 많이 났던 것인지, 어느새 물 한병을 다 마신 그녀는 식탁의 의자를 꺼내 앉는다.
"에데르타인 뭐, 아드레나인씨한텐 별로 어렵지 않을 상대겠죠. 단,"
"...단?"
"...완력이 진짜 비상식적으로 강하니, 옷깃이라도 잡혀버리면 꽤나 골치 아플거에요."
"......"
에데르타인의 손아귀힘을 조심하라 귀띔해주는 그녀.
하긴, 아까 경기에서도 힘 하나는 장사로 보인 에데르타인이었으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보였다.
"...들었지?"
「당연... 주군은 걱정 마라...!」
아드레나인은 자신을 쳐다보는 나를 향해 굳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사실 별 걱정은 안되지만, 그래도 내일은 길드 연합 소속 길드의 모든 수장들이 보러올테니, 멋진 경기 부탁드릴게요!"
이시연 또한 어깨를 으쓱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향해, 아리송한 표정으로 묻는 나.
"그건 그렇고... 대체 무슨 일을 맡으셨길래 그리 바쁜거에요? 외교? 협상?"
나는 격투대회 관람을 빠질 정도로 급하게 처리했어야 될 일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러자 별거 아니라는 듯 태연하게 얘기하는 이시연.
"아, 특출나게 중요한 건 아니고, 청소년 변화자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어 달라는 정부 요청이 와서 말이죠."
"학교요?"
꽤나 뜻밖의 단어에, 나는 눈살을 찌푸려보인다.
파괴 된 도로조차 아직 완전히 복구하지 못한 한국이었는데, 그런 상황에 학교는 사치아닌가.
"예, 근데 정부에서 변화과정을 거친 청소년들이 힘을 잘 조절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라네요? 길드 후원자 자제분들까지 얽혀서 거절할 수도 없고, 여러모로 머리 아파요."
깊게 한숨을 내쉬는 이시연.
얼굴에 짜증이 한가득 묻어나는 것이, 어지간히 하기 싫어보이긴 하였다.
"내부는 복지 신경쓰랴, 외부에서는 지원요청. 격투대회 보러오는게 아니었으면 분명 과로사로 죽었을거에요."
그녀는 술 한잔 거하게 마신 직장인마냥 주저없이 푸념을 늘여놓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손뼉을 짝 치며 이야기를 이어기는 그녀.
"아, 그건 그렇고, 혹시 오늘 마주쳤던 길드장들이 있나요?"
"길드장?"
오늘 본 길드장이라면,
파도의 우울 길드장인 사쿠라 요코와 신세리아 르 메이의 길드장 세르레니아 루인 둘 뿐.
예선전에는 흥미가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바쁜 것인지, 그다지 많은 길드장들이 찾아오지는 않았다.
"세르레니아 루인이요? 그 여자가 왔다고요?"
"네? 네, 자기 부하 데리고 왔던데요."
"오호..."
나의 말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이시연.
내가 고개를 갸우뚱 거리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사태 이전에는 머리카락 한 올 보기도 힘들었던 여자인데 요즘은 여기저기 많이 돌아다니네요. 뭔가 꾸미는게 있는건가."
이상하리만츰 활발히 돌아다니는 그녀에 대해 무언가 캥기는게 있는 듯한 이시연. 탐정이라도 된 듯한 그녀에게, 나는 주제를 바꾸어 질문을 던졌다.
...솔직히 세르레니아 루인이나, 사쿠라 요코나, 귀찮게만 하지 않는다면 나한테는 별 상관 없는 인물들이었다.
"요즘 세계 정세는 어떤가요?"
뉴스를 통해 간간히 접하고 있는 국제 소식이었지만, 아무래도 제일 많이 접하고 있을 당사자에게 묻는 것이 가장 낫겠지.
내 물음에 이시연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한다.
"세계 정세요? 세계 정세... 대부분 나라들이 큰 불은 거의 잡은 상태고, 아직까지도 혼잡한 곳은 아프리카, 인도, 러시아 정도에요."
숨을 잠시 고르고는 설명을 이어나간다.
"아프리카 같은 경우는 유저들 비율이 너무 낮아 진압이 잘 되지 않고 있어요. 세간에다가는 아누비스가 버티고 있다, 곧 지원군이 와 반격할거다, 이러고 있지만,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요. 길드 회의에서도 아예 대륙을 포기하자는 말까지 나오고 있고요."
"오..."
뉴스나 정보회에서 알려주는 소식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녀의 말에, 나는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귀를 기울였다.
"...인도 같은 경우는 좀비 로드 워하드가 깽판을 치고 있죠. 중국의 화양연화가 대신 가서 싸우고 있긴 하지만, 워낙 세력이 커서 꽤나 고전중이라고 하네요."
"......"
인도의 상황은 뉴스에 보도 된 것과 딱히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상대가 세력을 불리는 것에 최적화 된 좀비 로드였으니, 분명 골치 아픈 상황일 것이 뻔하겠지.
"마지막은 러시아인데, 의외로 지금 제일 위험한 곳이 러시아에요."
"...러시아?"
"네, 피스티처가 있는 곳이죠."
"......"
피스티처.
아까 전 나탈리아라는 꼬맹이를 통해 나와 접선한 시즌보스. 그리고는 각종 이상한 소리를 늘여놓았으니, 오냐오냐 좋게 봐줄수는 없는 상황.
"능력도 특출나지 않고 피지컬도 별로니 게임이었다면 별 문제없이 처리했겠지만, 여기서는 달라요."
처음으로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는 그녀.
"민간인들을 세뇌시켜 군대로 삼기때문에 함부로 공격할수도 없고, 그러는동안 최면에 걸리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니...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함락되고, 그 다음 목표가 저희가 될 까봐 걱정이에요. 블라디보스토크가 그녀의 거점이니, 유럽으로 진출하는 것보단 한국쪽으로 남하하는 것이 훨씬 가능성이 크겠죠."
"흠......"
그녀의 말을 들은 나 또한 사색에 빠진다.
비웃음과 함께 들려왔던 '조만간 제대로 초대하겠다'라는 피스티처의 마지막 말. 혹시 그게 곧 한국을 침공하겠다는 걸 돌리고 돌려서 말한건 아니었을까?
"...아 맞다."
그리고 그녀의 대화 중 무엇보다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퀘스트를 통해 얻었다는 '초월급 아이템'. 자칭 자연의 섭리까지 거스른다는 최고급 아이템.
듣기로는 전혀 안믿기는 얘기였지만, 사실일 가능성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을 터.
"아 저 그리고 궁금한게 있는데,"
"네? 뭔데요?"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과 함께 이시연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든 싱긋 웃어보이는 그녀.
...나는 천천히 그 베일 속의 아이템에 대해서 물어본다.
"혹시 초월급 아이템?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예?"
질문을 들은 이시연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