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84화 〉 꽃의 잔향 (6) (84/85)

〈 84화 〉 꽃의 잔향 (6)

* * *

"하암..."

이른 아침,잠에서 깨어난 나는 깊은 하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 꼭 보아야할, 메인이벤트라 할 수 있는 격투대회의 시작은 저녁이었지만, 이왕 이탈리아에 온 김에 여행 느낌을 물씬 느껴보고 싶어 내친김에 그냥 일찍 기상한 것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전하.」

"응? 응..."

...그리고, 까칠까칠한 눈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는 나를 맞이하는 렉타우스. 보아하니 어느샌가 사역마들이 다시 명계에서 현세로 나와 내 침대 옆에 쪼르르 서있었다.

"......"

처음엔 너무나도 부담스러웠지만, 이제는 이마저도 익숙해진 일. 나는 태연히 그들에게 손짓을 해보이며 말하였다.

"...너희도 잘잤어? 아드레나인은 벌써 갔고?"

세리아나, 렉타우스, 듀랑발 사이로 보이지 않는 조그마한 용인 소녀, 아드레나인의 부재에, 내가 그들에게 물었다. 그러자렉타우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였다.

"예, 새벽부터 경기 준비해야 된다고 서둘러 방을 나섰습니다. 혹여나 자신의 발소리 때문에 전하의 잠이 깰까 정말 조심하며 나갔습니다."

"그렇구나..."

오늘 펼쳐질 격투 대회 결승전을 대비하기 위해 해가 뜨기 전부터 호텔을 나섰다는 아드레나인. 생각보다 열정적인, 우승한 후 실실 웃으면서 내게 칭찬해달라 요구할 그녀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머금어졌다.

"...뭐, 그럼 우리도 빨리 나가보자."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역마들한테 말한다.

조금이라도 더 로마를 둘러보고 싶은 마음도 마음이었지만, 이시연과 8시까지 호텔 로비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어서빨리 나가 봐야지. 아무래도 그녀는 오늘 하루 자진해서 가이드를 해 줄 생각인 것 같았다.

"......"

그렇게 으리으리한 궁전과도 같은 호텔방의 문을 열며, 나는 바깥으로 힘차게 발걸음을 내밀었다.

***

.

.

.

.

.

"이야, 옥시안님! 안녕히 주무셨나요?"

"......"

사역마들과 함께 호텔 로비로 나가자, 이시연이 언제나 그랬듯 쾌활한 목소리로 우리를 맞이해주었다. 뭐가 그리 좋은 것인지 싱글벙글 웃으며 내게 말하는 그녀. 활기찬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퍼져 나갔다.

"오늘은 업무도 없으니, 제가 로마를 안내해드릴게요! 결승전 전까지 실컷 시내도 구경하고 쇼핑도 해요!"

...역시나, 그녀는 로마 시내를 같이 구경하자 권한다.

뭐, 저리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이미 로마에 몇번 와본 듯 하였고, 안내원이 있어서 내게 나쁠거는 없었으니, 나 또한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래요, 시연씨가 잘 안내해주세요."

"좋아요! 나름 역사가 깃든 로마니까, 볼 거도 엄청 많을거에요. 빨리 가요!"

어린아이 마냥 기대된다는 듯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그녀는 내 손을 잡고 서둘러 호텔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회전문을 타고 나가니, 이른 아침의 선선한 바람이 내 살결을 스치고 지나간다. 언제 느껴도 나쁘지 않은 그 상쾌한 공기에, 나는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이시연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무어라 제안하였다.

"음... 일단 아침 식사부터 하는게 좋겠죠? 이 근처에 제가 아는 좋은 식당이 있는데, 거기를 가봐요!"

"네네, 안내해주세요."

방방 뛰며 아침 식사를 하자 권하는 그녀에, 나는 귀찮음이 섞인 목소리로 대충대충 답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수 앞장 서 나와 사역마들을 식당으로 안내하기 시작하였다.

「...주군,」

"응?"

...그렇게 그녀를 따라 가던 와중, 뒤따라오던 듀랑발이 조심스레 나를 부른다. 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니, 그 육중한 갑옷의 데스나이트는 내 귀에 자신의 투구를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수상쩍은 모습을 보였던 그녀입니다, 어제 물어봤던 것을 다시 한번 물어봐 보시옵소서.」

"......"

의심이 가득 찬 목소리로 내게 말하는 듀랑발.

그는 어제 '초월급 아이템'이란 것의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정색을 하며 황급히 방을 떠났던 이시연이었으니, 오늘 다시 한번 그것에 대해 물어보라고 내게 권하였다.

"흐음..."

확실히, 어색할정도로 당황해하던 그녀의 행동.

꼭 초월급 아이템만은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무언가 캥기는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해보였다.

...궁금한 건 못참는 나였으니,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그녀를 붙잡고 초월급 아이템에 대해 다시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냐, 이따, 아드레나인의 경기가 끝나고 다시 물어볼게."

이내 천천히 고개를 저어보인다.

지구 멸망, 혹은 내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다급한 일도 아니었고, 단순한 피스티쳐의 거짓 정보일수도 있을 터이니, 이따 일정이 다 끝난 후에 물어봐도 될 터였다.

괜시리 의견이나 감정이 어긋나 아드레나인의 경기를 보기 전에 기분을 잡치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나의 주군이여.」

내 말에, 고개를 꾸벅 숙여보이고는 다시 몇걸음 뒤로 물러서 나를 쫓아오기 시작하는 듀랑발. 대화를 하느라 조금 뒤쳐진 우리를, 이시연은 해맑은 목소리로 재촉한다.

"...옥시안님! 빨리 오세요!"

"네네."

남자친구와 나 잡아 봐라라도 하듯,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이 가득해보였다. 그리고 뒷짐을 지고 사뿐사뿐 걸음의 속도를 올리는 나.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인적이 드문 뒷골목을 빠져나와 사람들이 바글대는 시내로 나올 수 있었다.

"...오늘 격투대회 결승이지?"

"응! 당연히 에데르타인이 이기겠지 뭐."

"3,4위전은?"

"무조건 젠시야!"

"......"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사람이 붐비는 로마의 거리. 그 덕분인지, 나와 사역마들이 걸음걸음을 내밀때마다 주변에서 숙덕거림이 내 귀에 들려왔다.

"...야 저기봐, 옥시안이야!"

"응? 설마, 옥시안이 여길 왜 와."

"우와, 코스프레 진짜 잘했다."

"야, 진짜 옥시안임? 어제 격투대회 보러 왔다고 듣기는 했는데, 진짜 아냐?"

"사진 찍어달라 할래?"

...계중에는 내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부터, 코스프레라고 의심하는 사람, 사진 찍기를 고민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가지각색의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좋다..."

언제 받아도 부담스러운 것이 사람들의 시선이었지만, 허나 지금만큼은 이 유럽 느낌이 물씬 묻어나오는 로마의 거리가 내 가슴을 더 설레게 해주었음으로, 나 또한 이시연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물론, 중간중간 지나가는 변화자들, 즉 엘프 혹은 드워프들이 그 분위기를 살짝씩 깨기도 했지만 말이다.

"...도착했어요! 여기가 주변에서 제일 유명한 식당겸 카페에요!"

"......"

그렇게 조금을 더 걷자, 우리의 앞에 나오는 고급스러우면서도 빈티지 풍이 물씬 묻어나오는 건물 하나. 이시연은 그곳이 아침 식사 장소이자, 나름 유서깊은 식당이라 내게 설명하였다.

"특히 여기 커피가 아주 명물이니, 빨리 밥먹고 후식으로 마셔봐요!"

...나를 안내해주겠다 해놓고서는 본인이 더 신나보이는 이시연. 붕 떠있는 듯한 그녀의 언행이었지만, 그래도 '로마의 맛집'이라는 타이틀은 나 또한 내심기대가 될 수 밖에 없었기에, 군침을 삼키며 식당의 문을 조심스레 열어재꼈다.

"......"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꽉 찬 테이블들과, 우글우글 거리는 타 손님들. 아침부터 사람이 많은 것이, 확실히 맛집이라는 이름값을 하고있는 듯 하였다.

"흠... 일찍 왔는데도 자리가 없네요."

한참을 둘러봐도 도저히 보이지 않는 자리에, 이시연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린다. 이윽고 그녀는 식당 구석에 위치한 2층으로 가는 계단을 가리켜보였다.

"2층으로 한번 가봐요! 귀찮긴 하지만 경치가 또 좋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이곳에서 밥을 먹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그녀에, 나는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그러자 이시연은 제발 자리가 있게 해달라는 듯 기도라도 하는지 두 손을 꼭 모으며, 조심조심 계단 쪽으로 향하였다.

...그렇게 나 또한 그녀의 뒤를 따라가던 와중,

"어이! 거기, 핑크머리 아가씨!"

"...응?"

가게의 앞편,

그러니까 계산을 하는 카운터 쪽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핑크머리.

즉 누가봐도 나를 일컫는 그 목소리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 위치한 것은, 흰머리가 수북히 난, 아무래도 이 가게의 사장으로 보이는 듯한 노인이었다.

내가 그의 존재를 인식한 것을 확인하자, 노인은 내 관자놀이에서 돋아난 산양같은 뿔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머리에 그 뿔! 당신 변화자지?"

어라이징하고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지긋한 노인이었지만, 그래도 변화자 정도는 구분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그. 그는 이어서 태연히 우리가 들어왔던 문쪽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면 말한다.

"미안한데 우린 변화자 손님으로 안받여!"

변화자, 즉 어라이징의 캐릭터로 변한 자들은 손님으로 받지 않는다 말하는 노인. 그는 기분이 언짢다는 듯, 조심스레 한마디를 덧붙였다.

"...영업방해로 신고받기 싫으면, 어서 나가는게 좋을 것이여!"

"......"

변화자를 내쫓는 가게.

그런 늙은 노인을 바라보잖니, 문득 지난번에 들었던 소식 하나가 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다.

...요즘들어 부쩍 변화자 차별이 심해지고 있다는, 좋지 못한 소식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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