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3. 피바람이 부는 계곡(1)
- 피바람이 부는 계곡 -
여행하는 구름.
그로부터 두 달이흘렀고 어느새 카심은 이곳에서맥주를 들이켜고 있었다.
“크으.”
고된 일을 하고 먹는 맥주만큼 맛있는 건 없었기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 손님 이제는 안 우시네요?”
주문했던 음식을 가져온 사장이 웃으며 반겼다.
“기억하시는군요.”
“그럼요. 그렇게 서럽게 울던 남자는 처음이거든요.”
사실 그때 울지 않았지만, 딱히 정정하지는 않았다.
“사실은... 직원들끼리 내기했거든요.
누구는 전 재산을 잃었다, 연인과 이별. 등등.”
“어느 쪽이셨습니까?”
“저는 연인과 이별이요!”
“그럼 전 재산을 잃은 거로 하죠.”
잠깐 당황하던 그녀는 이내 웃었다.
“아하하! 뭐예요 그럼 앞으로 오더라도 서비스 못 주겠네요.”
장난스레 새침한 표정을 지은 그녀는 돌아갔고 잠시후, 서비스를 가지고 다가와 앉았다.
“그런데 진짜 이유는 뭐였어요?
저는 남자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거 처음 봤거든요.
자, 서비스니까 진짜로 말해봐요.
뭐 때문에 운 거예요?”
“제가 그렇게 서럽게 울었나요?
그렇게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은데.”
“어머, 막 크헝헝 하면서 펑펑 우셨거든요? 눈물 콧물 짜내면서.”
“...”
“콧물은 오버인가?”
“이왕할 거 침도 질질 흘렸다고 합시다.”
“아하하하!”
그녀는 빵 터져버리면서 크게 웃었고 웃음소리에 주위에서 시선을 줄 정도였다.
“재미있으신 분일 줄은 몰랐네요.”
그녀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안나에요.”
“카심입니다.”
그녀와 밤늦게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대화 화제는 끊이지 않았고 동시에 웃음도 끊이지 않았다.
어느새 밤이 되고 손님이 거의 다 나가는 것을 보며 안나는 깜짝 놀랐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요.”
“그러게요. 그만 일어나야겠군요.”
“... 잠시만요.”
“?”
“괜찮으면 제 방으로 가서 술 한 잔 어때요?”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그녀는 명백히 유혹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얼굴.
당연히 숨겨진 그녀의 몸도 꽤나 아름다웠다.
“고맙지만 내일은 할 일이 있어서요. 다음에 하죠.”
카심은 가볍게 웃으며 거절하곤 매장을 나가는데 그 걸음엔 주저함이 없었다.
그것을 보며 안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거렸다.
밖으로 나온 카심은 다시 고개를 돌려 주점을 보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이전 삶에서도 제법 친한 사이였으며 힘들었던 자신에게 꽤 큰 힘이 되어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도와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그녀는 이곳에 있지 않았고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찾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은혜를 갚지 못했다.
이번에는 그녀가 사라지기 전 꼭 은혜를 갚고 싶었다.
“이것도 좋은 점이네.”
갚지 못했던 은혜.
그것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
다음 날, 카심은 아벨리우스 세계 수정 앞에 서서 목록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바람이 부는 계곡.
원래라면 아직 밝혀지지 않아야 할 던전.
“지금 클리어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텐데.”
최근 많은 도전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우선은 어떻게 하나 구경해보자는 생각으로 던전으로 로그인했다.
화아악!
한순간에 풍경이 바뀌면서 피부가 쌀쌀할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리고 피바람이 부는 계곡 던전의 그 거대한 산이 눈에 들어왔다.
주위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는데 마침 어느 길드가 도전하려는 듯 모여 있었는데 그 사이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바로 마리엘과 레이첼, 리나, 데인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 모여 있는 이들은 칼라리스 길드로 때마침 마리엘도 방금 빛이 번쩍이며 나타나는 카심을 보았다.
“알고 온 거야?”
“뭘?”
“오늘 우리 길드가 도전하는 거.”
“아니.”
“그럼 운명이네?”
요염하게 웃는 마리엘의 미소는 꽤나 강력했다.
“헛소리 말고. 그래서 준비는 제대로 했고?”
“어머. 우리 길드 몰라? 리톰 영지 최고의 길드인데.”
카심은 별 감흥 없는 눈으로 준비하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보았다.
만약 이들이 여기서 실패하게 된다면?
아마 큰 타격을 받게 될 것이고 칼라리스 길드는 역사대로 사라질 것이다.
물론 상관없지만, 문득 원래대로 흘러간다는 사실이 자체가 지금은 왠지마음에 들지 않았다.
“계획은?”
계획이란 물음에 마리엘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음? 다른 방법이 있는 건가?”
“저기 끝에 벽에 도달하면 되는 거 아니에요?”
그때 다가온 레이첼과 리나 데인도 바라보자 카심은 그들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마리엘은 그 반응에 눈을 빛냈다.
“다른 방법이 있구나? 그리고 오빤 그걸 알고 있고.”
카심은 가볍게 끄덕였고 네 사람의 눈동자가 커지면서 서로 바라보았다.
“뭔데? 뭐가 다른 건데?”
“우선 너네 아빠한테 말해라.”
그 누구도 몰랐던 연금술사 던전에 대해서도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너무도 당연히 안다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기에 마리엘은 다급하게 끄덕이며 앞쪽에서 간부끼리 모여 회의를 하는 마웬에게 달려갔다.
“아빠!”
“아이고 우리 딸. 왜? 아빠 보고 싶어서?”
“오빠가 찾아왔어.”
“오... 빠? 아빠를 잘못 부른 거지?”
“아닌데?”
한순간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 끝으로 눈에서 불이 튀어나왔다.
“클리어고 나발이고 당장 죽여야 할 놈이 있군.”
살벌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을 때 옆에 있던 부 길드 마스터인 뮬이 마리엘에게 말했다.
“오빠라니?”
“연금술사 던전 클리어를 도와줬던 사람.”
“그 말은 여기 클리어 방법을 알고 있다는 말 같은데?”
“역시 뮬 언니, 똑똑해서 내가 좋아한다니까.”
뮬과 마리엘은 주먹을 부딪쳤다.
뮬은 30대 여성으로 초록빛이 감도는 단발머리에 아주 냉철한 인상의 여성이었다.
그녀는칼라리스 길드의 대부분에 그녀의 의견이 들어갈 정도로 길드 내에서 뛰어난 지능을 가지고 있었다.
“잠깐, 클리어를 알고 있다니?
여기 클리어는 그냥 저기 끝에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스페르 길드도 끝까지 가니까 여왕개미가 등장했다며?
그놈들은 약해서 도망쳤다지만 그거 잡으면 끝일 텐데.”
“그래도 오빠는 그 연금술사 던전에 대해서도 알았던 사람이잖아.
분명히 다른 게 뭔가 있을지 몰라.
거기다가 직접 아빠한테 말해보라고 했어.”
“우선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네요.”
뮬의 말에 마웬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연금술사 던전에 대해 알았던 것을 보면 그래도 들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그게 무슨 소립니까?”
옆에 있던 간부 중 한 명인 브랜든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운 좋게 연금술사 던전을 알았다 하지만 이거는 아까 마스터가 말 한대로 저 끝에만 가면 보스가 나오는데.
왜 그런 놈 말을 들어 봅니까?”
전투 담당 간부로 그는 사실 몰래 마리엘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기에 그녀가 오빠라고 하는 소리에 질투심을 내뿜는 것이다.
뮬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한심하다는 듯 보았다.
“그래서 확인을 해보자는 거지.
어이없는 소리면 무시하면 되는 거니까.”
브랜든은 차마 뮬에게 말로써 이길 자신이 없었기에 더 이상 반대는 하지 않았다.
잠시 후, 마리엘과 함께 카심이 걸어왔다.
“음?”
마웬은 걸어오는 카심을 보다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그 의아함이 커져갔고이내 바로 앞에 마주 섰을 때는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빠?”
두 달.
겨우 두 달 사이에, 내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아무리 뛰어난 유저라 하더라도 겨우 두 달 사이에 저렇게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
애초에 분위기라는 것은 절대 저 짧은 시간에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최소 10년은 굴러야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것이다.
“아빠 뭐해?”
“아, 아니다. 그래 이 던전의 클리어 방법을 안다고?”
“예.”
그때 뒤쪽에서 상황을 엿듣고 있던 전투 대장인 브렌든이 비웃으며 다가왔다.
“지랄. 이미 여왕개미가 나오는 것을 봤는데 뭘 클리어 방법을 안다고?
듣자 하니 작업 인부놈이라고 들었는데 새끼가 그냥 관심받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옆에서 소리치고 다가오는 브랜든을 보며 마리엘은 날카롭게 쏘아붙였지만브랜든은 물러 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카심은 반응은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들어보실 겁니까?”
“어이! 내가 말하고 있잖아!”
브랜든이 소리치자 그때서야 카심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갔다.
“아, 당신이 길드 마스터였나? 미안하군.
난길드 마스터랑 이야기하러 왔는데 이쪽인 줄 알았거든.
이 상황에서 소리치는 것을 보니 당신인가보군.”
브랜든은 오히려 당황한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아, 아니 나는 길드 마스터가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모두를 무시하고 소리치는 데 그럼 당연히 당신이 길드 마스터지.
지금 모두를 개무시하고 스스로가 최고라고 행동하고 있는데?”
브랜든은 마웬의 눈치를 살피며 당황했다.
“우하하하!”
마웬이 크게 웃다가 카심을 보았다.
“자네 진짜 이제 막 유저가 된 녀석이 맞나?”
브랜든은 왜 저러나 싶다가 결국자신을 놀린 것임을 알고 더욱 분노했다.
“감히 이 새끼가 날 가지고 장난쳐!?”
멱살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옆에서 거센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브랜든. 이 상황에서 네가 또 그렇게 행동하는 건,
진짜 날 무시하는 행동이라고 봐도 되겠지?”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브랜든이 결국 뒤로 물러서야 마웬은 혀를 차며 다시 카심을 보았다.
“내가 사과하지.”
“예.”
보통 사과한다고 하면 아니라고 손을 젓는데 예라고 하니 또 한 번 마웬은 웃었다.
“그래. 이렇게까지 했는데 자네의 말은 확실히 자신이 있겠군.”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오히려 카심이 가지고 있는 정보에 대해 신뢰성이 생겼다.
제대로 된 정보도 없는 놈이 이렇게 대담하게 행동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데 갑자기 이어지는 말에 의아했다.
마웬이 한 말과는 이어지는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뭘 줄 수 있습니까? 설마 이 정보를 그냥 들을 생각한 건 아니죠?”
그들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만약 정보가 제대로 된 것이라면 정말로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자신들도 모르게 당연히 그게 거짓이라고 여기고 있으니 마치 당연히 일단 들어 볼 생각만 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말을 하기도 전에 저렇게 말하는 대담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그래. 그게 만약에 진짜라면 아주 비싸겠지.
좋아. 이 정보가 사실이라면 어떠한 소원이라도 들어주지.
단, 우리도 조건이 있다.”
카심은 말해보라는 눈으로 보았다.
“직접 참여하는 것.”
마웬의 의도는 더욱 더 말에 신뢰성을 받기 위함이었다.
직접 참여하게 된다면 거짓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마웬은 카심의 수준을 보고 싶은 게 더 컸다.
도대체어떻게 해서 두 달만에 사람이 저렇게바뀌었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
카심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브랜든이 다시 비웃었다.
“저것 봐라. 새끼가 잘못된 정보 가지고 있으니 직접 참여할 수 없는 거겠지.
어쩌면 스페르 길드가 보낸 첩자 일 수도 있습니다.
지들이 망했으니 우리도 망해야 할 테니까!”
이번엔 브랜든의 행동을 말리거나 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의견이었다.
거기다가 참여하지 않는다면 사실 정보를 들을 가치도 떨어지는 게 맞았다.
“두려운 것인가?”
“그런 거 보단...”
카심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다시 마웬을 보고 말했다.
“이 인원으로 클리어 할 수 있을 거 같지 않아서요.”
“...”
마웬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단호한 목소리와 흔들림 없는 눈빛 때문이었다.
그것도 자신을 앞에 두고 말이다.
“뭐!?”
“저런 미친 새끼가! 감히 우리를 무시해!”
“내가 말했잖아! 저 새끼는 첩자라고!”
이번에 그들을 막아선 건 뮬이었다.
“마스터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그러면서도 뮬 역시 그렇게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흐음, 아무리 봐도 그 말은 네가 말하는 정보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마웬은 은근슬쩍 떠보았다.
그 역시 뛰어난 경험자였기에 반응을 살펴보려고 한 것이다.
카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말했다.
“그럼 없던 일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