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 15. 목적(5)
* * *
그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미친 듯이 끄덕였다.
***
그날 밤.
카심은 마트 옥상에 혼자 있었다.
“후우.”
사실 아까 정말로 모두 죽여버리고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인다.
필요 없으면 죽인다.
이 마음이 너무도 강했었다.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더 이상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이전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을.
그토록 오고 싶었던 지구.
오히려 더 심란해져만 가고 있었다.
“신우씨.”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 카심에게 혜진이 다가왔다.
“혜진씨군요.”
“달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그때도 혼자 달을 보고 있었잖아요.”
카심은 피식 웃었다.
“근래에 자주 보게 되는군요.”
그녀도 가볍게 웃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또... 언제 떠나실 건가요?”
“곧 갈 생각입니다.”
“... 서울로 가실 건가요?”
카심은 대답하지 못했다.
원래는 서울에 조금 더 알아볼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과연 그게 의미가 있을까 생각도 들었다.
“저...”
그녀는 우물쭈물하더니 용기 내서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 떠민 게 아니었어요.”
“...”
카심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해 갸웃거렸다.
“제가 스스로 한 행동이었어요.
정말로... 신우씨와... 으흠.”
그때야 무슨 의미인지 알고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혜진은 다급하게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 절대 부담가지지 마세요.
오랜만이었어요.
가슴이 두근 거린 게.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그런 마음을 먹을 여유도 없었어요.
그런데 신우씨를 보고 나서 그럴 여유도 생겼다는 사실에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그러니... 그저 하룻밤 즐거움이라 생각해도 좋아요.
저는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살아가는데 있어서... 많은 힘이 될 거예요.”
고개를 숙인 채 말하는 그녀를 보며 카심은 고민에 빠졌다.
성욕이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언제나 불끈했다.
심지어 같은 지구인을 보니 더 욕망이 타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참은 것은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전 삶에서 좋지 않았던 경험이 있었으며 자신은 언젠가 떠날 사람이었다.
지구인이라해도 마찬가지다.
결국, 다시 돌아갈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런 인연이라 해도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거절할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그저 가벼운 마음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는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이 세상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만큼 암울한 세상이었으니까.
자신은 성인군자가 아니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병신도 아니었다.
주저하지 않고 다가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앗!”
그리곤 곧바로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두 사람은 이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거칠게 서로의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연인의 입술을 맛보아서 일까? 카심은 끌어 오르는 성욕을 참지 못했고 그녀를 들어 안았다.
그녀 역시 다리로 감싸 안은 채 더 격렬히 키스를 했고 카심은 옷을 벗기려고 손을 뻗었다.
띠링.
갑작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을 때 카심의 눈이 흔들릴 정도로 놀랐다.
이 세계는 아직 불안정하다.
존재하지 않아야 할 인간들이 있다.
그들을 제거하라!
가장 많이 제거하는 유저에게는 큰 보상이 주어진다.
단, 이 불안한 세계의 편을 들 수 있다.
그렇게 될 시 공공의 적이 된다.
[테날프 트래 랭킹]
로드리게스 : 42명
카심 : 23명
“...”
키스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신우씨...?”
그리고 보이는 혜진의 머리 위 붉은색 마크.
카심은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혜진은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하는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카심!!!”
그리고 뛰어 올라 온 로드리게스도 창을 봤는지 당황한 얼굴이었다.
카심은 로드리게스를 보다, 다시 혜진을 보며 그녀의 위에 떠 있는 붉은색 표시를 보았다.
카심조차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이게 무슨...”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랭킹에 또 다른 이름이 떠올랐다.
[테날프 트래 랭킹]
1. 로드리게스 : 42명
2. 카심 : 23명
3. 포레갈리안 : 3명
이것을 시작으로 다른 이름도 올라오기 시작했다.
맹렬하게 움직이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 멈추었다.
“하, 이거였나?”
카심은 헛웃음을 지은 채 떠오른 창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할 거야?”
로드리게스도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와주던 이 인간들을 갑자기 죽이라니?
혜진도 갑작기 소리 치며 올라온 로드리게스와 두 사람의 대화에 멍하니 서 있었다.
대화를 알아 들을 수 없지만 심각한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혜진씨.
지금 철수님한테 가서 모든 식량을 가지고 당장 지하로 이동하라고 하세요.
그리고 웬만하면 절대 지상을 이용하지 말고 당분간은 숨어 지내라고.”
“그게 무슨...?”
“곧 진짜 괴물들이 이곳에 나타날 겁니다.
저와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고 그들은... 이곳 지구인들을 모두 죽일 겁니다.”
혜진은 당연히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내 침울해졌다.
그녀는 거절을 이런 식으로 하려는 건가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을 설득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빨리 움직이세요!”
“네, 네!”
혜진은 돌아가면서도 우물쭈물했지만 결국 아래로 내려갔다.
“카심. 어쩌려고? 설마 전부 다 싸우려는 거 아니겠지?”
“만약에 그렇다면? 어쩔래.”
“스읍. 재미는 있을 거 같은데?”
고민도 없는 말에 카심은 웃으며 어깨를 쳤다.
“그럴 생각은 없으니 걱정마라.”
“휴우. 난 또 쫄았잖아.”
“지금 바로 돌아간다.”
카심과 로드리게스는 달빛 아래서 빠르게 움직이며 지구로 들어왔던 수정을 향해 달려갔다.
달려가던 카심의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만약 이게 의도적이었다면... 큰 실수 했다. 영생교.”
***
게임.
게임에는 수많은 대륙이 있다.
그리고 업데이트하며 새로운 대륙을 소개한다.
지구.
이 지구가 바로 아벨리우스 세계의 새로운 업데이트의 대륙인 셈이다.
이전 삶과 달리 지구가 업데이트된 이유.
지구인이 있는 것은 예상치 못한 역사의 변화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제대로 정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강제로 업데이트를 했고, 그 부작용으로 지구인이 남아 있었다.
이렇듯, 아벨리우스 세계를 게임의 시스템으로 본다면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해석이 된다.
영생교.
그들은 이전 삶과 비슷한 흐름의 움직임으로 보였다.
허나 아니었다.
망해버린 지구를 보고 99층으로 향하라는 메시지가 아닌, 이 지구인을 지키다가 죽으라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이 예상치 못한 것은 카심의 변화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한참 달려가던 로드리게스는 카심에게 물었다.
“영생교를 친다.”
“헉. 진짜? 적이 아닐 수도 있다며?”
“아니. 적이다.”
카심은 지구를 구하거나 지킬 마음 따위 없었다.
자신은 영웅이 아니다.
그럴 능력도 안 되고, 생각도 없었다.
차라리 영생교를 모조리 죽이는 게 나아 보이는, 악당과 어울렸다.
“착각했군, 성녀.”
더 속도를 높였고 넘어왔던 아벨리우스 수정, 아니 테날프 트래 수정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카심과 로드리게스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
“어? 여기 분명히 맞잖아.”
없었다.
돌아갈 수 있는 수정이 보이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이곳에 오자마자 충격적인 지구의 모습에 확인하지 못했었다.
아벨리우스 수정, 아니 테날프 트래 수정이 없다는 것을.
“이게 무슨...”
카심은 당황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며 더 큰 범위를 살폈지만 역시 찾을 수 없었다.
로드리게스는 너무 당황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게?”
“...”
카심은 다시 한번 창을 띄웠다.
어느새 랭킹에는 또 변화가 있었다.
[테날프 트래 랭킹]
1. 로드리게스 : 42명
2. 카심 : 23명
3. 포레갈리안 : 17명
4. 웁갈 : 1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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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다른 이들도 넘어왔다.
“설마...”
갑자기 드는 생각.
당연히 아벨리우스 세계와 같다고 여겼다.
하지만 강제적인 업데이트라 한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도 역시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지금 당장은 여기가 던전처럼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제대로 된 지역이 아니니 해결을 위해서 말이다.
“젠장.”
“왜! 무슨 일인데!?”
“당장은 여기가... 던전의 형태인 거 같다.”
“뭐? 그러면... 설마 진짜 그 사람들을 다 죽여야 하는 거야?”
카심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당장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조금 더 넓게 수색해보자.”
그렇게 며칠을 돌아다녔고 거의 도 지역 전체를 살폈지만 역시 보이지 않았으며 저쪽 세계의 인간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일주일이 지났을 때는 랭킹은 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테날프 트래 랭킹]
1. 포레갈리안 : 152명
2. 안나스 : 113명
3. 글로리아 : 107명
4. 글렌 : 9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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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면 분명히 만났어야 하는데 만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세계로 다양하게 퍼졌나?”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이 이름 중에는 보여야 할 이름이 없다는 것이다.
100위까지 있는 순위 중에 알베이안이 없었다.
“하...”
헛웃음을 흘린 카심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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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교의 성녀인 그녀는 송신용 아티팩트를 들고 있었다.
“고생했다. 알베이안. 속인 것은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오히려 성녀님의 혜안에 더 감탄했습니다.
“이해해주니 고맙구나. 그럼 고생하도록.”
연락이 끝나자 그녀가 들고 있는 송신구를 옆에 있던 시녀들이 받았다.
“참으로 신기한 인간이었지만 우리 영생교에 방해가 되니...”
매혹적인 미소를 짓는 그녀는 높은 단상에서 일어났다.
“아박투에게 전하도록. 왕을 죽이고 진 레이널을 왕위에 올리라고.”
본격적으로 영생교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