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16. 실패(5)
* * *
카심도 이쯤 되었을 때 차라리 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여러분들. 지금 여러분들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저 던전에서 몬스터를 잡는 것과 같아 보입니까?
저들이... 몬스터로 보이십니까?
누가 보아도 인간이지 않습니까?
비록 다른 대륙에 살고 있는 이들이지만 분명한 인간입니다.
당신들은 지금 당신들이 살고 있는 주변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군가의 친구이며 누군가의 아들이고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어머니를 말입니다.
이곳에서 주는 상품.
과연 그게 얼마나 대단하기에 저런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렇게 얻는다 한들, 대단한 영웅이 되리라 생각합니까?
아무런 죄 없는 인간을 죽인 잔혹한 인간 주제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영웅이 될 수 있겠습니까?”
너무도 뻔한 신파극 같은 대사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그 힘은 달라진다.
“물론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기 전과 후는 다르다고 봅니다.
비록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피치 못할 사정이라 여길 수 있으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같은 사람을 학살하고 자신의 재미를 위해, 상품을 위해 죽이는 행위는 도저히 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쓰레기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본능이 있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개소리라도 합리화를 할 수 있다면 어떤 개소리라도 받아들인다.
이어진 이 말은 이것을 위함이었다.
그 덕분에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던 이들도 이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공감한 건 아니었고 특히 순위가 높은 이들에게는 의미가 없었다.
그들은 뒤늦게 이 상황에 난입했다.
“저런 애새끼 말에 이리 동요하다니.”
“어이가 없구만 없어.
뭐, 우리가 더 좋지 독식할 수 있으니까!”
그들이 움직이자 같이 계속 따라 움직이던 이들도 함께 움직였으며 고민하던 몇 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수는 100명이 넘어서고 있었다.
사실 그들 대부분은 카심이 없을 때 뒤늦게 참여한 사람들이었기에 소문으로 들었다 하더라도 전혀 믿지 않았다.
애초에 소문이 너무 과장되어있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겨우 20대밖에 되지 않는 이가 특화 레벨 8?
지나가는 개가 웃을 정도로 허황된 이야기였다.
그들 뒤로 나타난 이는 각각 이곳 테날프 트래 랭킹 1위와 4위 그리고 7위였다.
셋 모두 특화 LV 8로 방금전 카심의 전투를 보지 못했기에 가소롭다는 표정으로 서서 달려나가는 부하들을 보았다.
카심과 로드리게스도 그들을 보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와, 막상 하려니까 엄청 긴장되네.”
“걱정하지마라 몇 명 안 맡길 테니까.”
“후우. 어떻게 할까?”
“너 혼자 저 세 명 맡아라.”
“어, 어? 세 명?”
하지만 이미 카심이 사라졌다.
“야, 야! 이 미친놈아 내가 저 세 명을 어떻게 상대하라고!”
그 세 명은 바로 특화 레벨 8인 랭커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특화를 내뿜으며 달려오고 있었고 둘은 붉은색이었으며 한명은 파워 특화인 노란색을 띄고 있었다.
“제엔장!!”
로드리게스는 거의 모든 힘을 쏟아내며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다.
콰아아아앙!!!
“크헉!”
로드리게스는 파워 특화 공격을 맞고 날아갔지만 버티는 것을 보며 꽤 놀라워했다.
로드리게스는 다시 자세를 잡았지만, 표정은 좋지 않았다.
“크응... 뭐 그래도 칸 형님보단 덜 아프네.”
하지만 다시 달려드는 세 명을 보니 얼굴이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계를 넘어서지 않으면 앞으로 더 위험한 적이 있다는 사실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으아아아아!!!!”
로드리게스는 괴성을 지르며 특화를 내뿜고는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
스피드 강화.
서러웠던 나날들이었다.
차라리 파워 강화라도 됐으면 사냥터에 끼워주었을 텐데 스피드 강화라 그 누구도 끼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불구하고 악착같이 버티며 겨우 7레벨로 만들었다.
그때부터는 그나마 제값을 해내기 시작했고 어떻게든 돈은 벌었다.
그럼에도 언제나 무시와 멸시는 가득했다.
심지어 자신보다 레벨이 낮고 실력이 없는 놈들 조차도 무시했다.
실제 그들은 조금 더 강한 몬스터를 자기보다 잘 잡긴 했다.
물론, 싸움에서는 자신이 유리했음에도 많은 길드에서는 그들을 원했다.
자신보다 어리고 자신에게 맞았던 놈이 원하는 길드에 들어갈 때 자신에게 짓던 그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이후 더 악착같이 살았지만, 희망은 찾지 못했다.
“와...”
그런데 지금 희망을 찾았다.
엄청나다는 말로도 표현이 되지 않았다.
황홀했다.
혼자서 100명을 상대하고 있는 저 사람의 움직임은 이 단어와 가장 어울렸다.
스피드 강화를 지닌 이들의 눈은 보통 유저보다 훨씬 뛰어난 편이다.
그런데 자신의 눈으로도 그 움직임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의 눈엔 마치 그의 모습이 여러 명처럼 보일 것이다.
“히익!”
달려나가던 한 유저는 순식간에 자신의 앞에 나타나 창을 휘두르는 것을 보며 다급하게 방패를 치켜들었다.
캉!
“헉!”
스피드 강화인데도 어찌 이렇게 충격이 강한지 방패가 날아갔고 순식간에 파고 들어온 그의 발이 얼굴을 가격해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그리고 다시 모습을 나타낸 것은 거기서부터 100미터가 떨어진 곳이었다.
지금 이들은 카심을 노리는 게 아니라 뒤쪽 생존지 사람들을 노리기 위해 퍼진 것이다.
제법 똑똑한 방법이었지만 카심은 단 혼자서 그 넓은 범위마저 커버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니 오히려 그들에게는 독이 되고 있었다.
혼자서 카심을 상대하는 꼴이 되어버렸으니 제대로 버티지도 못하고 날아가거나 혹은 죽기 일쑤였다.
결국 그들도 위기를 느꼈는지 결국 카심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카심은 사방에서 뛰어드는 그들을 보고는 갑자기 자세를 바꾸더니 창을 고쳐 잡더니 한순간 분위기가 바뀌었다.
달려들고 있던 이들은 갑자기 바뀐 분위기에 위험함을 느꼈지만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힘이 눈 깜짝할 사이에 어깨로 향했고 마력이 폭발하듯 가속화 시켜 창이 앞으로 뻗었다.
파아아아아앙!!!!!!
“...”
“무, 뭐...”
그들 가운데로 약 50명의 모습이 한 번에 날아가 쓰러졌고 앞쪽에 있던 이들의 몸은 형체도 알아보기 힘들 만큼 찢겨져 사방으로 파편을 튀었다.
거기다가 땅은 완전히 뒤집혔기에 그 파괴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이 속도를 멈추지 못해 30명 정도는 카심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슈아아악!
30명이지만 사방에서 쉴 새 없이 이어지는 공격 속에서 카심은 엄청난 속도로 모조리 피하며 막아냈다.
카카캉! 채챙! 티팅!
쏟아지는 공격 속에서 카심의 눈동자가 번쩍이더니 창이 앞으로 쇄도했다.
“크아악!”
“악!”
“윽!”
10명이 한 번에 날아가 바닥에 쓰러져 큰 부상에 괴로워하거나 치명상을 입고 죽었다.
“흐아압!”
한 명이 몸을 회전시키며 대검을 크게 휘두르는 순간 카심의 창이 손을 찔렀다.
푹.
“크윽!”
그가 뒷걸음질 치는 순간, 양쪽과 위에서 몇 사람이 튀어나와 공격을 퍼부었다.
쾅!!
하지만 이미 그곳엔 카심이 없었고 나타난 것은 자신들의 뒤였다.
푹, 푸아악!
“으아아악!!!”
한 명의 어깨가 터져버렸다.
카심의 창이 그의 어깨에 박히는 순간 회전으로 인한 폭발력을 더한 것이다.
이어지는 공격에 또 몇 명이 날아가 땅에 처박히고 죽어버리니 그들은 어느새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안 와? 그럼 내가 가지.”
카심은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혹여나 도망치지 않게 하기 위해 다시 달려들었다.
한편, 그 사이에 로드리게스는 세 명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내고 있었다.
“허억, 허억.”
당연히 상태는 아주 좋지 않았다.
얼굴은 시퍼렇게 사색이 되어있었으며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만 같았다.
전투가 시작된 지 겨우 10분의 결과였지만 레벨 7이 레벨 8을 상대로 무려 10분이나 버텼다는 것 자체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놀라고 있는 것은 세 사람이었다.
“...”
“허허, 참.”
“어이가 없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다.
쿠궁! 후우웅!
세 사람의 힘의 파동이 터져 나오는 순간 주변 일대가 출렁거렸다.
“아...”
로드리게스는 그 어마어마한 힘의 파동에 입을 쩍 벌렸다.
죽는다.
이건 절대 막지 못한다.
하지만 그래도 입술을 질끈 깨물며 버티려는 그때 왼쪽 어깨에서 감촉이 느껴졌다.
“고생했다.”
고개를 돌리니 카심이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질뻔 했다가 이내 화가 났다.
“이 미친놈아! 나보고 죽으란 거냐!”
“어차피 뒤지기 직전에 구할 생각이었다.
도움은 많이 됐을 테니 뒤에서 쉬어.”
로드리게스는 훌쩍이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100명에 가까운 시체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카심은 로드리게스를 뒤로하고 앞으로 걸어나가기 시작했다.
최대로 힘을 끌어올린 셋은 다가오는 카심을 보다가 뒤쪽에 자신들의 부하들이 죽은 것을 보고는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 시간에... 혼자서 저길 다 죽였다고?”
그들의 긴장도가 바뀌었다.
아무리 자신이라도 그 짧은 시기에 저렇게 만들 순 없다.
아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저 수라면 시간이 걸려도 힘든 일이다.
그때 떠오른 소문.
그게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후우웅.
그때 불어오는 힘의 파동.
그것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
“후우.”
오싹!
작은 숨소리에 불과했지만 세 사람의 눈동자가 급격히 커지며 등골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그들은 꽤 오랜 경험자였다.
위험한 인물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특히 저 눈빛.
마치 자신들이 봤던 가장 무서운 몬스터의 눈빛과도 같았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세 사람은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카심의 모습은 이전 삶의 모습과 조금씩 겹쳐지고 있었다.
***
후웅!
할버드의 날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카심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그의 몸이 순식간에 회전하고는 할버드에 달린 창이 다시 한번 목을 노리고 들어왔다.
슈슈슉!
창보다는 못하지만, 그의 실력이 웬만한 창과도 마찬가지 수준의 찌르기를 구사했다.
파바박!
뒤로 빠르게 회피하며 거리를 벌렸으나, 어느새 뒤에서 나타난 또 다른 사람이 할버드보다 거대한 도끼로 내려쳤다.
콰아앙!!!
“해치웠나?”
“그 말 하면 안 돼.”
“헛!”
파워 특화를 지닌 이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면서도 도끼를 뒤로 휘둘렀다.
그러나 손에 걸리는 감각은 없었기에 곧바로 뒤로 돌려 상대를 확인하려 했다.
허나 또 보이지 않았다.
오싹!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그 감각에 다급하게 도끼를 위로 들어 올렸다.
카앙!!!
“흥! 겨우 스피드 강화가 나에게 힘으로...”
까가각!
갑자기 회전하는 카심의 창에 그의 무릎 한쪽이 꿇렸다.
“흐읍!”
믿을 수 없는 스피드 강화의 강한 공격에 눈이 부릅떠졌다.
카심은 다시 한번 공중에서 공격하려는 순간 옆에서 나타난 검을 보고는 자세를 바꿔야만 했다.
챙!!!
공격을 막기는 했으나 카심의 몸이 충격으로 인해 한참이나 날아가 착지했다.
그러나 착지함과 동시에 검과 도끼는 거의 동시에 달려들어 공격했고 그 속에서 카심은 빠르게 그들의 공격을 피하며 막아내었다.
“으아!!”
그리고 위에서는 할버드를 든 사내가 공중에서 뛰어 올라 떨어지고 있었다.
카심은 빠르게 뒤로 빠지려고 했지만 어느새 공중에는 또 한 명이 더 있었다.
“으랏차!!!”
로드리게스였다.
쾅!!!
두 사람의 공격이 공중에서 부딪히자 폭발처럼 터지며 멀어졌고 카심 역시 달려드는 두 명의 공격을 뿌리치며 그들의 가슴에 주먹과 발을 박아 넣어 밀어냈다.
“큭!”
“흡!”
서로 거리가 떨어지면서 잠시 대치 상태로 변했다.
“후후. 체력 다 회복했다.”
“벌써? 하여간 부러운 몸이네.”
“그렇지 않아도 맞기만 해서 빡쳤는데 나도 때려야 할 거 아냐.”
“그래야지. 난 네가 쫄아서 다시 오지 않으면 앞으로 버릴 생각이었다.”
“너야말로 평소와 느낌이 다르던데? 지쳐 보인다?”
카심은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뭔 생각으로 저 많은 인원을 다 상대한다고 했는지 몰라.”
만약 정말로 저 모두를 상대했을 것이면 계획은 ‘실패’ 했을 것이다.
오히려 예상과 달리 흘러간 것이 행운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랬다면 다른 방식으로 전투를 진행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한 놈 상대할 수 있겠어?”
“어. 저기 저 파워 특화 놈. 내가 잡는다.”
로드리게스의 눈빛도 꽤 많이 달라져있었기에 카심은 끄덕이며 그들을 보며 창을 고쳐 잡았다.
“그럼 부탁한다.”
“!!”
로드리게스는 처음 듣는 카심의 말에 활짝 웃었다.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뒤에서 따라가기만 했다.
스스로도 그게 당연하다 여겨왔었다.
그런데 카심은 지금 자신을 옆에서 두고 있었다.
“실망시켜도 실망하지 마!”
싸움이 다시 시작되면서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