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화 〉 18. 소용돌이(5)
* * *
깜짝 놀란 진 레첼이 살폈고 다행히 숨을 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렀다.
“...”
천천히 눈을 뜬 카심은 몸을 일으키려는데 옆에 진 레첼이 누워있었다.
추워하는 듯한 느낌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일어나 가볍게 팔을 움직이는데 제대로 움직이는 느낌에 흡족하려던 순간 갑자기 얼굴이 일그러졌다.
“...”
다시 움직여봐도 팔은 문제 없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묘한 위화감이 전해졌다.
마치 티 없이 깨끗했던 것에 자갈이 들어간 느낌.
무시하면 무시할만하지만, 괜히 거슬리는 딱 그런 기분이었다.
“으음...”
마침 눈을 뜬 진 레첼이 카심을 보고 깜짝 놀라며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몸은 괜찮아요? 오, 오빠?”
“나쁘지 않아.”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걱정하지 마라.
내가 죽으면 안 된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창밖을 바라보는 카심의 눈은 꽤나 복잡한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최근 너무도 위험한 순간이 많았다.
아박투도 그랬고 특히 이번에는 알베이안이 다른 의도였다면 정말로 죽음을 피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몸 상태는 좋지 않았었다.
자신이라고 죽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여기서 죽는다?
누구보다도 억울했다.
그렇기에 더욱 아슬아슬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야만 이 어려운 상황을 조금이라도 타개할 수 있으니까.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어?”
“하루에요.”
“아직 시간이 있네.”
카심이 나가려고 하자 진 레첼이 다가갔다.
“어디 가세요?”
“남은 시간 준비해야지.”
카심이 나가자 진 레첼은 아쉬워했다.
자신은 당장 이 방에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따라가지 못했다.
자신도 뭔가를 준비하고 싶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다고 카심을 붙잡을 수도 없었다.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말자.
이것 또한 내 싸움.
이것을 못 이기면 오히려 모두에게 폐를 끼치는 거니까.
나는... 내 역할이 있어.”
마음을 다잡은 그녀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더욱 고민하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
칼라리스 길드가 사용하는 훈련장에 나오자 그곳엔 드로얀과 주웬이 칼라리스 길드원을 훈련 시키고 있었고 로드리게스는 홀로 훈련하고 있었다.
카심이 나타나자 로드리게스가 먼저 반겼다.
“어, 괜찮아?”
“그래.”
“좀 쉬지 그래도.”
“아니. 시간이 없다.
무엇보다... 아박투와 전투 이후 경험을 습득해야지.”
“나도. 이번 전투로 깨달은 게 많아.”
“그래?”
“응. 역시 장비가 중요하구나 싶더라구.
그런데 이 얻은 장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겠더라.”
“”
카심은 훈련장에 구비 된 창을 집었다.
형편없는 수준의 연습용 창이었지만 가볍게 들고 서서 자세를 취해 아주 천천히 창을 내지르는 것을 반복했다.
너무나도 단순한 동작이었지만 어째서인지 모든 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주웬과 드로얀 그 동작에 눈을 떼지 못했다.
“... 느껴지십니까?”
“그래.”
저 단순한 동작을 보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로부터 무려 5일 동안 거의 쉬지도 않고 심지어 밥을 먹고 늦은 밤까지 똑같은 동작을 반복하자 칼라리스 길드원들은 왜 강자들이 강한지 단번에 깨닫게 되었다.
덕분에 그동안 칼라리스 길드원들의 훈련량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다.
“후우.”
마침내 반복하던 카심은 멈췄다.
지금 이 동작 속에서 마력의 움직임을 다시 재정립했다.
마력의 깨달음과 그리고 아박투와 전투 이후 새로운 운용방식을 접목시킨 것이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팔에 훨씬 부담이 덜했으며 속도와 파괴력이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소닉붐은 강한 만큼 반동이 너무도 큰 기술이었다.
완벽한 육체를 지닌 이 몸으로도 버티지 못할 만큼 강했고 마력의 푸른 힘까지 더한다면 스스로도 주저할 만큼 몸이 터져 나갈 것 같은 고통이 전해졌다.
이제는 그것을 한 번 쓸 수 있는 것을 두 번에서 세 번 정도는 가능하게 되었으니 아주 큰 성과라 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라 마력의 운용도 한층 더 높아졌고 마력의 푸른 힘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졌다.
그때 창에서 푸른 빛이 일렁거렸다.
마력 200이 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된 마력의 운용방식.
편하게 푸른 힘이라 불렀다.
이능과 다른 이 힘이 대단한 것은 이능과 같이 사용이 가능하며 그 능력이 합이 아닌 곱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런 파괴력과 반동이 있던 것이기도 했다.
“그 사이에 육체 능력도 더 늘었을 거 같은데.”
다만, 역시 걸리는 것은 아주 조금 변한 듯한 신체의 감각이었다.
챙! 채챙!
그때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로드리게스와 주웬 드로얀은 1:1:1로 대결하고 있었다.
대결이었기에 특화 없이 움직이고 있었으나 거의 실전을 방불케 했다.
로드리게스도 그간 성장했는지 확실히 움직임이 전에, 비해 훨씬 좋았다.
방패를 이용해 상대의 공격을 막는 것을 넘어, 막으면서 동시에 힘을 줘 상대의 균형을 무너뜨려 훨씬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이어지는 제법 위협적인 공격을 구사했다.
때로는 무모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장비를 이용해 믿은 움직임이었다.
그 덕분에 놀랍게도 드로얀과도 맞먹을 정도로 잘 싸웠다.
“젠장! 치사하잖아!”
“으하하. 형님도 그럼 좋은 장비 차시던가요!”
그 사이를 파고든 주웬은 두 사람을 동시에 공격했고 드로얀과 로드리게스는 어느새 한 팀이 되어 주웬을 공격했다.
그들 역시 진지했다.
이번에 전투 이후 자신들이 앞으로 싸워야 할 놈들의 수준을 알았으니, 긴장이 되지 않을 리 없었다.
파바밧! 카캉! 콰지직!
치열한 대결을 이어가던 세 사람은 갑자기 멈칫하며 고개를 동시에 돌렸다.
“나도 끼지.”
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카심을 향해 공격 태세를 취했다.
카심은 특화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진심으로 상대할 생각이었다.
그러자 카심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기세가 세 사람을 덮쳤다.
“헉.”
“크흠...”
“... 그 사이에 이렇게나.”
자신들이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압박감이었다.
로드리게스야 그러려니 했지만 카심을 상대해봤던 주웬의 경우에는 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채 1년도 되지 않는 시간.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는지 도무지 보고도 믿기지 않았다.
***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 사이에 데미안과 소니아와 싸웠던 초원에 네 개의 기둥에 얇은 천으로 엮어 그 아래에 의자와 함께 몇 조각품으로 꾸며져 있었다.
이미 성녀는 그곳에 앉아 있었고 바로 뒤에는 알베이안이 서 있었다.
잠시 후, 다가온 카심과 로드리게스 그리고 주웬과 드로얀은 그것을 보며 신기해했다.
“와 언제 이렇게 만들었데?”
로드리게스가 신기해하며 보고 있을 때 카심은 자연스레 성녀가 만들어 놓은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의자는 단 두 개였기에 로드리게스와 주웬 드로얀은 자연스레 카심 뒤에 섰다.
“반갑구나.”
“그래.”
카심도 반말을 하자 알베이안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무리 그래도 예언자께 예를 다하...”
“너에게나 대단한 예언자지 나에게는 그냥 제법 섹시한 여자일 뿐.”
“감히 예언자님께.”
알베이안은 처음 진심으로 분노한 눈빛으로 카심을 노려 보았다.
“됐다. 알베이안.”
그러나 성녀의 행동에 그대로 다시 돌아왔고 그것을 보며 얼마나 이 영생교가 깊은 신앙이 있는지 알 수 있기도 했다.
“오히려 나를 그렇게 봐주니 흥미롭다.
그 누구도 나를 그렇게 보지 못하거늘.”
“안타깝군.”
“아하하! 참으로 흥미로운 사내로다.”
처음 보는 성녀의 행동에 알베이안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웃음도 잘 볼 수 없던 사람인데 저런 식의 웃음은 수십 년 동안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성녀는 앞으로 턱을 기대며 매혹적인 눈으로 카심을 바라보았다.
“어떤가? 영생교로 오지 않겠나?
그대라면 내 옆에 있어도 될 것 같구나.”
“예, 예언자님.”
“지금까지 모든 예언자가 결혼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전 예언자이자 우리 어머니도 결혼해 나를 낳았지.”
알베이안은 입을 쩍 벌렸다.
이것은 자신도 예상치 못한 발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대에게 너무도 큰 흥미를 느끼고 있는 순간이었다.
내 제안은 진심이다.”
로드리게스와 주웬 드로얀도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너무도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저, 저런 사람이라면 이해는 하겠다마는...”
“로드리게스.”
주웬의 작은 호통에 로드리게스는 입을 다물었다가 드로얀을 보니까 드로얀 역시 곁눈질로 살며시 끄덕였다.
그 모습에 성녀는 더욱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카심을 보았다.
“흔들릴만한 제안이지만.
내 목적은 너희들을 무너뜨리는 것.
즉, 당신을 죽이는 것이다.”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에 오히려 성녀는 더 미소가 짙어졌다.
그러나 알베이안의 눈빛은 보다, 더 살벌하게 변했다.
심지어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그의 위로 수십개의 붉은 빛 검이 솟아 오른 상태였다.
그 덕분에 로드리게스의 머리 위로 거대한 검은 빛 검이 떠올랐고 주웬과 드로얀 역시 이능을 뿜어낸 상태였다.
그러나 역시 성녀의 손짓에 알베이안의 이능이 사라졌고 셋도 눈치를 보더니 이능을 없애야 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나를 죽이고 싶은 것인가?”
“영생교를 위해서 다른 모든 이를 희생하는 너는 희대의 살인마니까.”
“과연. 그럴 수 있겠구나.
허나 내가 하는 일은 오히려 이 세계를 구하는 일이다.
그대가 잘 모르기 때문이지.”
“사이비 놈들은 항상 자신들을 모른다고 하지.”
성녀는 다시 뒤로 등을 기대었다.
“던전 브레이크. 이게 우리가 했다고 생각하느냐?”
“그럼 아닌가?”
“아니다. 왜냐하면, 원래 발생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
카심의 미간이 좁혀졌다.
“우리는 오랫동안 준비해왔다.
이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인간들을 위해.
살아남도록 말이다.”
“계속 설명해봐.”
흔들려하는 카심을 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실제로 지금 카심은 다소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다.
“확실히 우리는 누군가의 위에 서려는 것도 맞다.
지금까지 준비를 해왔고 동시에 우리는 그럴 자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심은 잠시 바라보다 끄덕였다.
저 말이 맞다면 저것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그대는 단편적인 부분만 보고 우리를 이해해왔을 것이다.
그 부분만 본다면 분명히 우리는 악당이지.
허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말했다시피 우리는 그러한 위치에 서야 하니까.
그렇다면 그 전에, 장악해야만 하지.
훗날 큰 혼란이 왔을 때 우리가 제대로 이끌려면.”
그때 저 멀리서 누군가 마차를 타고 왔고 그곳에서는 각종 간단한 음식과 차가 배달되었고 로드리게스와 드로얀 주웬도 앉을 수 있는 테이블도 마련되었다.
하지만 카심을 비롯한 세 사람은 누구도 먹지 않았다.
그러자 성녀는 웃으며 카심 앞에 놓여있는 차를 수저로 먹어 독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카심은 손도 대지 않았고 그 모습에 세 사람 역시 마찬가지로 요지부동이었기에 성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차를 먹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전사의 탑을 가보았겠지?”
“...”
“그곳은 참으로 신비한 곳이었다.
왜 전 성녀들이 언젠가 꼭 알게 될 거라는 말을 이해하겠더구나.
그곳이 바로 우리 인간이 살 수 있는 하나의 공간이라는 것을.”
그곳에서 살고있는 이들은 아벨리우스 세계에 대해 모르는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그곳에서 정착한다?”
“아니다.”
만약 맞다고 했으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었다.
전사의 탑은 절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주 오랜 시간 대기실에 머물고 있으면 경고와 함께 강제로 퇴장당하기 때문이다.
“그곳과 같은 공간을 만드는 것이다.
바로 우리 영생교에.”
차를 다시 마신 그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방법을 찾았다.
이미 수많은 동식물도 키우고 있지.”
“노아의 방주같군.”
무심코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반응을 성녀가 보여주었다.
“!!”
쨍그랑!
“예언자님!”
성녀는 먹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정도로 놀랐다.
“그것을... 어찌 아느냐?”
“... 무슨 소리지?”
“방금 그대가 한 말.
그것은 우리 성녀들에게만,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계시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