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 18. 소용돌이(6)
* * *
“방금 그대가 한 말.
그것은 우리 성녀들에게만,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계시이거늘.”
진심으로 성녀는 놀라고 있었다.
“...”
그리고 카심 역시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혼란스러웠다.
사실 그녀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지만 절대 굽힐 생각이 없었다.
예정대로 진 레이널을 죽이고 영생교를 무너뜨리려 했다.
그런데 노아의 방주에 갑자기 저런 반응을 보이니 진짜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지구의 역사인 노아의 방주가 이곳에도 있는 것이며 설사 비슷한 단어라 하더라도 하는 짓이 거의 비슷할 수 있을까?
“역시 그대는 뭔가 있구나.
어쩌면 우리는 싸워야할 대상이 아니다.
정말로 협력 해야하는 것이지.
이 모든 게 오히려 우리 인간을 방해하려는 이의 계획일지도 모른다.”
“...”
혼란스러운 카심은 대답하지 못했다.
정말일까?
노아의 방주라는 말을 이용해 속이려는 게 아닐까?
그런데 속인다면 노아의 방주가 무엇인 줄 알고?
이러한 온갖 의문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본래 나는 그대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게 이러한 의문을 풀게 했다는 것은 필히 운명이겠지.
어찌하여 나에게 이런 호기심을 가지게 했는지 이제야 모든 의문이 해결되는구나.”
“하아. 나는 운명이고 예언이고 신이고 그딴 거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대 역시 지금 흔들리고 있구나.”
카심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부정할 수 없겠군.”
성녀는 다시 미소를 지었고 그 미소는 아주 맑으면서도 아름다웠다.
“역시나 그대는 다른 남자와 다르다.”
“미안하지만 나는 너에게 관심 없다.”
“흐음... 이 나에게 관심이 없다면... 설마...”
성녀의 말의 의미를 이해한 그들은 한순간에 로드리게스로 시선이 향했다.
알베이안도 자연스레 로드리게스로 향하면서 딱 분위기가 그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
로드리게스는 자신에게 시선이 쏟아지자 인상을 확 찡그렸다.
“설마 진짜야 카심?
어쩐지... 그동안 나에게 그렇게 잘해주던 게... 하긴 그렇지 않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장비를 내게 줄 리 없지.
물론 내가 매력적이긴 해.
그런데 미안하지만 나는 남자한테...”
“아니야 미친놈아.”
성녀는 쿡쿡 웃었다.
“참으로 보기 좋은 동료들이구나.
그런데 어째서 그러지?
그대 같은 남자에게 분명히 많은 여자가 꼬였을 터.
반응을 보니 모든 여자를 멀리한 거 같군.”
확실히 성녀는 예리했다.
이런 상황 하나로 많은 것을 알아차리고 있었다.
그리고 눈매가 살며시 날카로워지며 말을 내뱉었다.
“마치... 떠날 것처럼.”
“...”
카심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적인 대화는 거절한다.
그래서 나와 이야기를 나누고자 했던 진짜 이유는?”
“본래도 그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다. 동시에 설득도 목적이 있었다.
허나, 이야기를 해보니 우리는 이렇게 만나야 하는 운명이었겠지.”
“확신하지 마라.
설사 그렇다 한들, 지금 우리는 명백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순간 왕국에 대해 말할 뻔했다.
어떠한 정보도 흘릴 순 없기에 더 이상 대화를 할 수 없었다.
지금 상황을 주도하는 건 상대였기에 더 이상 대화는 좋지 않아기 때문이다.
“대화는 끝이다. 만약 나를 설득하고 싶다면 행동을 보여 증명해라.”
“만약 이전 대화 없이 그런 말을 했다면 웃어 넘겼을 것이다.
머지않아 그대가 믿을 만한 소식을 전해주도록 하지.”
일어나 돌아서는 카심에게 성녀는 나지막이 말했다.
“아이렌.”
“...”
자신의 이름을 말했지만 카심은 대답하지 않고 걸어갔다.
그런 그를 보며 아이렌은 미소를 지었다.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알베이안은 아이렌에게 물었다.
“정말로 그와 함께할 생각이십니까?”
“그의 선택에 달려있겠지.
참으로 재미있는 사람이구나.
하지만... 역시 뭔가 있다.
호기심을 해소하러 왔지만, 오히려 더 커져 버렸어.”
사내에서 다시 사람으로 변해 있었고 그녀의 눈빛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이질적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을 보며 알베이안은 가볍게 끄덕이며 멀어져만 가는 카심을 바라보았다.
***
다시 칼라리스 저택에 모인 그들은 묘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진 레첼은 결국 참지 못하고 주웬과 드로얀을 보며 물어야 했다.
“어떻게 됐어?”
“그게...”
진 레첼이 카심에 대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았기에 드로얀과 주웬은 쉽사리 말하지 못했다.
그때 로드리게스가 카심을 보며 물었다.
“어떻게 할 거야?”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면... 혼란스러운 상태다.”
“나라도 혼란스럽겠지.
그런 여자가 같이 살자고 하는데.”
“뭐, 뭐라구요?”
진 레첼이 놀란 얼굴로 카심을 보았다.
“그것 때문에 혼란스러운 게 아니다.”
“그럼 역시 넌 여자가 아닌 남자를...”
“예!?”
이번엔 더욱 경악하며 카심을 보았다.
어쩐지 자신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가 갑자기 납득이 되었다.
카심은 귀찮다는 듯 대답도 하지 않자 진 레첼은 울먹이며 주웬을 보았고 주웬은 가볍게 미소릴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 레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주웬이 이번엔 물었다.
“그나저나 참으로 무서운 자였습니다.
아주 자연스럽게 상황을 흔들고 잡더군요.
카심님께서 말릴 줄은...”
“나도 처음이야.
카심 네가 오히려 대화를 주도하지 못하는 건 본 적이 없었어.”
“... 후우.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 방향이 완전히 뒤틀렸으니까.”
영생교를 적으로 보고 움직여왔다.
그런데 그 근간이 흔들렸으니 카심은 지금 굉장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실이라면... 이제부터 자신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일까?
갑자기 걸어가던 길이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그때 갑자기 카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은 왕국으로 돌아간다.”
“카심님. 그게...”
주웬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지금 수배가 떨어졌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카심님께서 공주님을 납치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당연히 그 안에 저희들 역시 공범이라 하고 있었으며 로드리게스 또한 마찬가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영생교의 짓이겠지.”
“뭐? 그럼 역시 아까 그 말들은 거짓말이었던 거네?”
“아니 아마 그 전에 알려줬을 거다.
만약에 신뢰할 수 있게 한다는 명목으로 겨우 이것만 해제시킨다면 계획은 본래대로 진행하면 돼.”
믿을 만한 소식이 겨우 그거라면 절대 저들의 저의는 깨끗한 게 아니었다.
자신들이 만든 함정을 없애는 것은 그저 ‘0’ 과 같았으니까.
“잠깐, 그러면 우리 가족... 큰일 나는 거 아냐?”
왕국에서 지명수배했다.
당연히 그 가족부터 잡아들일 게 분명했기에 로드리게스는 잔뜩 걱정에 휩싸였다.
“걱정 마라. 이미 그럴 줄 알고 내가 조치 취한 상태다.
레온을 통해 그들을 안전한 곳에 옮겨 뒀다.”
“오! 역시!”
“예상하셨던 겁니까?”
주웬은 놀라워했다.
대단하다고 여겼지만, 준비가 너무도 확실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생각하고 있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당연한 움직임이니까.”
“그럼 곧 이 영지도 오지 않을까요?”
이번엔 진 레첼이 걱정스럽게 물어보았다.
“그건 이제 영생교가 막아주겠지.
곧 혐의를 벗게 해줄 테니까.”
“그런데 방금은 그것을 하면 오히려 못 믿는다고...”
“말 그대로 이것만이다.
이것은 필시 무조건 없애 줄 것이고 그 다음에 있냐 없냐에 따라 그들에 대한 판단이 바뀌게 될 거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확실히 다시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생각해서 판단할 필요 없었다.
그들의 움직임을 보고 판단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왕국은 나 혼자 간다.
그러니 세 사람은 앞으로 일에 대해 준비해라.
당장은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르니 개인적인 수련이 좋겠지.
판단은 스스로 하도록.”
“그러면 왕국에 가는 것도 나중에 미뤄도 되는 거 아니에요?
왕국에 가는 이유가... 오라버니를 죽이려고... 가는 게 아니에요?”
진 레첼은 그래도 막상 피붙이를 죽이러 간다고 하니 본능적으로 마음이 쓰라렸다.
“다른 이유다.
들키거나 크게 위험한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고.”
“... 그럼 다행이구요.”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
어쩌면 내가 없는 사이에 영생교가 다른 맘 먹고 공격해 올지도 모르기 때문에...”
문득 말을 하다가 말았다.
순간 뭔가 실수했음을 느꼈다.
아직 저들은 적이다.
그런데 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시점에서 판단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다.
이렇게 되면 정말로 갑작스러운 공격에 아주 큰 치명을 입을지 몰랐다.
“아무래도 다 같이 움직여야 될 거 같네.”
이들이 모두 죽으면 아무리 자신이라도 멘탈이 관리가 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모든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했다.
움직이기 전에 먼저 마리엘을 만났다.
“마리엘. 그런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시나 위험한 일이 발생할 수 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정보원과 연결을 시켜 줄 테니 그들이 피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줄 것이다.”
“걱정하지 마. 이미 한 번 겪어 본 일이잖아. 두렵지 않아. 그런데 어디 가려고?”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여야지.
아마 앞으로는 더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계속 여기에 있다면 너희들도 휘말려.”
마리엘은 쓴웃음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그래도 도와주겠다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 오빠랑 로드리게스 그리고 드로얀님과 주웬님의 대결을 보고 완전히 다른 세계구나라는 걸 느꼈어.
우리가 있다면 오히려 방해만 되고 모두 죽기만 하겠지.”
“어릴 땐 허영심에 가득차 있더니.”
“그땐 그때고! 그리고 겨우 2년도 아직 채 안 됐거든?
무엇보다 오빠도 나랑 나이 차도 별로 안 나!”
웃으며 마리엘의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마리엘은 웃으면서 말했다.
“죽지 마.”
“그래.”
마지막으로 나누는 악수.
마리엘은 걸어가는 카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면 자신 있었는데, 내 착각이었네.
역시 그때 확 덮쳤어야 했는데.”
결국, 마지막 남은 감정을 완전히 접었다.
***
카심과 진 레첼, 로드리게스와 주웬 그리고 드로얀이 어두운 건물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잠시 후, 그곳의 문이 열리더니 레온이 들어왔다.
“죄송합니다. 워낙 바빠서 말이죠. 움직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고생했습니다. 지금부터 왕국 내부로 들어가려 합니다.”
“수배가 있는 건 아시지요?”
“예.”
“방법은?”
모두 시선이 카심에게 쏠렸다.
“한 모험가가 아주 재미있는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과연 저 아벨리우스 세계는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연결이 되어있다면 다른 영지에 있는 아벨리우스 수정에서 왕국에 있는 수정으로도 갈 수 있지 않을까?”
레온은 깜짝 놀라 물었다.
“설마...”
“가능합니다. 그 방법으로 갈 겁니다.”
“허! 들어본 적은 있지만... 저조차도 그게 사실인지는 모르거늘. 어찌 아시는 겁니까?”
“거의 대부분 굉장히 멀어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기도 했지만, 지름길이 있습니다.
꽤 값진 정보가 될 겁니다.”
“푸하하! 값지다마다요.
이걸 이용한다면... 앞으로 이동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뀔 겁니다.
귀족 놈들이 독점하고 있는 그 더럽게 비싼 텔레포트 장치가 무너지겠군요.
자연스레 왕국에도 타격을 입을 것이고.”
“그곳에서 나오는 비용으로 앞으로 일에 보태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면... 영지도 하나 살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준비해 달라고 하는 거 여기에 있습니다.”
그가 들고 온 것은 투구였다.
각자에 맞게 얼굴을 가릴 수 있는 디자인이었고 모두가 투구를 쓰고 이곳 리톰 영지의 수정으로 향했다.
“피바람이 부는 계곡으로.”
번쩍이는 순간 오랜만에 아벨리우스 세계로 들어왔다.
그런데 들어오자마자 반긴 것은 바로 알람이었다.
과도한 신체의 사용과 강제 복원으로 인한 부작용.
[완벽한 육체] > [불 완벽한 육체]
“...”
카심은 오자마자 뜬 알림에 인상을 찌푸렸다.
왜 그런 위화감과 몸에 변화를 느꼈는지 이제야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