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6화 〉 19. 전사의 탑(4)
* * *
불가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
61층에 온 카심은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곳은 성 하나가 있었다.
그때 입구가 열리더니 사람 형태의 인형이 걸어 나왔다.
“주인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딱딱한 인형의 목소리.
인형의 안내를 받은 카심은 따라갔다.
잠시 후, 화려한 문 앞에 도착했고 문이 열리자 안에는 61층 지배자인 룩시드로가 있었다.
“흐음. 당신이 그 소문의 카심이구나~”
“룰이 특이하던데.”
“아하~ 급하게 바꿨어.”
바로 그와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카심은 자연스럽게 맞은 편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누군가의 명이 떨어졌나 보네.”
“... 이야. 머리도 좋네?”
“요구 조건은?”
“왕께서 부르신다.”
“어차피 지금 대화를 했으니 클리어 조건은 달성했는데.
굳이 내가 그걸 따라야 하나?”
“풉, 푸하하하. 왕께서 부르시는데 거절이라...”
웃고 있던 그 표정이 한순간에 살벌하게 변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구나?
꼴에 실력 좀 있다고 말이야... 하늘 위에 또 다른 하늘이 있음을 모르는 애송이 새끼가.”
“엘룬의 밑인가보군.”
“엘룬... 엘룬? 감히 네놈 따위가 올릴 수 있는 존함이 아니다!!!”
한순간 터져 나오는 기합에 일순간 저택의 일부분이 날아갈 정도였다.
그럼에도 카심은 전혀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오히려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엘룬이 왕의 자리도 노리겠네.”
“뭐! 감히!”
“반응이 재밌네. 네놈은 진짜 왕이 엘룬이라고 생각하고 있군.
그 생각을 과연... 왕인 진 레이널이 알면 어떻게 될까?”
“그걸 왕께서 믿어주시리라 생각하느냐!”
“그 말은, 역시 확실히 너는 엘룬이 진짜 왕이라고 믿고 있다는 소리군.”
“헙.”
그는 어느새 기세가 쏙 사라지며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쨌든, 이야기는 잘 했다.
그리고 제안은 아까 말했다시피 거절한다.”
“뭐!? 네놈이...”
하지만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놈은 사라졌다.
이곳의 룰은 겨우 대화를 하는 거였으니 더 이상 놈과 이야기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이 층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창을 보자마자 손으로 치워 없앴다.
“마음에 안 든다.”
사실 제안을 듣자마자 기분이 확 더러워졌다.
만약, 이전이었다면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왕의 환심을 사서 다양한 정보를 얻거나 둘이 있을 때 암살을 노려본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움직이는 대륙]에서 신이란 존재와 대화 이후에는 생각이 달라졌다.
영생교, 왕국, 아벨리우스든 어떠한 곳이고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는 게 귀찮아졌다.
그리고 신처럼 보였던 존재가 말한 것.
과연 그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래라면 이것저것 조심하고 계산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과연 이게 옳은 방향인지 모른다.
“어떻게든 되겠지.”
***
카심이 거절했다는 소식을 들은 진 레이널의 얼굴이 분노로 변했다.
“감히...”
“... 어차피 놈은 머지 않아 제가 있는 곳까지 올 겁니다.
그때 제가 무서움을 가르쳐 놓겠습니다.”
진 레이널은 나가보라는 손짓을 했고 엘룬이 나가자마자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내가... 내가 이 나라의 왕이다.
이 나를...”
까드득.
그의 입이 부서질 듯 마찰을 일으켰다.
역시 진 레첼과 함께 놈은 죽여야 했다.
영생교까지 모조리 정리한 뒤에 자신은 진정한 왕으로 거듭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 이후, 카심은 지금 63층에 오른 상태였다.
두 사람은 원형 경기장 안에 있었는데 서로 아주 평범한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곳의 룰은 각 능력치가 100으로 정해졌으며 어떠한 특성과 특화도 사용할 수 없는 아주 순수한 실력대결이었다.
“허허, 내 나이가 들어 이런 것에 유리하니. 어쩔 수 없지.”
“하르트만 님의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한 수 배울 수 있어 영광입니다.”
“오! 듣자하니 거칠 것이 없는 청년이라 들었는데, 이리 예의가 바를 줄이야. 하하하!”
하르트만은 타 대륙의 왕국에서 유명한 기사 중 한 명이었다.
이전 삶에서도 그는 아주 훌륭한 사람이었다.
옳은 일에 힘을 썼으며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며 구하곤 했다.
하르트만은 굉장한 실력자였다.
능력치도 능력치였지만 검술에 관해 아주 뛰어난 이였으며 많은 사람이 그에게 배우기를 청할 정도였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젊은 후배님.”
“예.”
파팟!
순식간에 접근한 하르트만의 움직임은 능력치의 수치가 100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어려울 만큼 빨랐다.
거리를 좁히고 검이 찔러 들어오는 그 동작은 정말로 매끄러웠으며 군더더기하나 없었다.
그의 실력은 정말로 대단했다.
나이가 많은 만큼 경험이 너무도 많아서 검술 실력만 따진다면 거의 상대를 찾기 어려울 정도였으며 그래서 지금 그를 마의 벽이라 부르고 있었다.
하르트만이 막은 도전자만 해도 100명은 훌쩍 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마의 벽이 올라가면 뒤늦게 올라가는 이들이 있을 정도였다.
두 사람의 공격이 쉴 새 없이 부딪혔다.
하르트만의 공격에는 수많은 허초가 섞여 있었는데 카심은 그 모든 공격을 피해내고 있었고 심지어 카심 역시 놀라울 정도의 창술로 공격했다.
“허!”
하르트만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상대는 이제 20대의 젊은 청년.
그런데 마치 자신보다도 훨씬 베테랑 같았다.
파앗!
그때 카심은 자신의 볼을 살며시 스쳐 지나갈 정도로 아슬하게 피하자마자 오히려 앞으로 내딛었다.
보통 창의 경우에는 거리를 벌리기 마련인데 오히려 앞으로 들어오는 한 수에 하르트만도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했지만, 이 거리는 검이 훨씬 유리했기에 그는 너무도 정석적으로 대처하려했다.
그러나 솟아오른 것은 창이 아닌 손이었다.
“흡!”
하르트만.
그는 너무도 정석적인 검술을 하는 사람이었다.
경험이 많기에 당연히 변수에 있어서 대처도 너무도 훌륭했다.
그러나 그의 최대의 단점이 있었다.
아는 게 너무도 많기에 자신이 예상하지 못하는 범위의 움직임을 하는 순간 대처를 잘 하지 못한다는 게 문제였다.
깜짝 놀란 하르트만이 재빨리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카심은 그대로 창을 던졌다.
창을 던지는 것도 예상치 못했다.
하르트만이 다급히 창을 쳐올리는 순간, 순식간에 아래로 몸을 날린 카심은 그대로 다리를 손으로 휘감더니 발로 꼬아 잡고는 넘어뜨렸다.
놀란 하르트만이 칼을 움직이려는 순간이었다.
우드득!
“끄, 끄아악!”
관절이 뒤틀린 하르트만은 고통스러워했다.
카심은 그 사이에 창을 집어 들고는 목에 가져다 댔다.
“끄으... 허. 이거 참 놀랍구만.
내가 본 적 없는 생전 처음 보는 격투술이라니... 윽.”
“주짓수라는 것입니다.
상대의 관절을 공격하지요.”
“크으... 관절을 공격하는 방식의 격투술을 접해본 적이 있지만 방금 같은 움직임은 참으로 기묘하군요.
그런 전광석화같은 움직임이라니.
끽해야 내가 본 건 팔 관절을 부러뜨리는 것뿐이었는데.”
그는 고통 속에서도 오히려 즐거워하고 있었다.
“이 나이에도 배울 수 있게 해준 그대에게 진심으로 감사... 윽, 합니다.
과연... 소문보다 더 하군요.
어디까지 가실 생각입니까?”
“끝입니다.”
여기가 아닌 위를 말하고 있음을 알았다.
“... 젊음이 부럽습니다.
하지만 제 위로는 이제 진짜 괴물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부디 조심하시기를.”
번쩍임과 함께 창이 떠올랐다.
63층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
마의 벽 하르트만.
그 이름이 가지는 무게는 상당했다.
카심을 인정하지 않던 이들조차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도 관심이 많았지만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디까지 올라갈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그를 두고 내기도 하는 곳도 있었다.
“자자! 다음 지배자에 도전을 언제 할까!?
돈을 걸어 주시고!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만 걸 거면 이쪽!”
정말로 무수히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 같은 암시장은 더 많이 퍼지고 있었다.
그럴수록 카심에 대한 인기는 점점 하늘로 치솟을 정도였고 수많은 영지까지 퍼졌다.
카심과 알던 사이는 그런 소식에 당연히 경악했다.
특히 아카데미에서 같이 지냈던 학생들의 경우엔 그 충격이 더 컸다.
“와, 맞지? 이 사람. 우리랑 같은 아카데미 다닌 사람? 진짜 미쳤다.”
“그러니까. 그냥 차원이 다른 인간이었네. 어쩐지!”
“심지어 로드리게스 그 놈도 지금 엄청나다더라.
벌써 51층 지배자가 되었다던데?”
“큭큭. 그레이 너 새끼 그때 로드리게스한테 존나 처맞았잖아. 아직도 기억나네.”
장비를 정검하던 그레이는 인상을 팍 썼다.
“닥쳐. 씨발.”
그레이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자신에게 빌빌 기던 놈이 이제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아득히 높아져 있었기 때문이다.
“씨발, 씨발.”
그렇다고 복수도 할 수 없다.
하는 순간, 자신의 가문까지 모조리 박살나버릴 테니 말이다.
그리고 리오나도 길드 생활을 하면서 당연히 그 소식을 듣고 있었다.
“진짜 이 사람들은 뭘까요?”
리게릭도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간혹 그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들이 있다.
그들과 비교하면 우리 딸만 힘드니까 그러지 말도록!
우리 딸도 충분히 대단하니까!”
“그래도 섭섭하네. 그 이후로 연락 좀 주는 줄 알았는데.”
“아마 너를 생각해서 일 것이야.
저 정도 위치에 있으면 정말로 위험한 일이 많이 생길 테니까.”
“흐음...”
리오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로부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카심은 어느새 70층을 향하고 있었다.
***
70층부터 존재하는 지배자들은 이제 거의 다 거물급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길드의 수장이나 누구나 들어봤을 법한 수준의 유명세를 지닌 존재들이었다.
물론 그중에 몇몇은 다른 대륙이나 다른 왕국에서 온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 역시 지금은 이미 그에, 준하는 유명세를 가지고 있었다.
쾅! 콰콰쾅! 쿠구구구궁!!!!
쉴 새 없이 일어나는 엄청난 폭발은 70층과 싸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폭발 사이에서 두 명이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둘은 나무를 스쳐 지나가며 서로를 향해 공격을 퍼부었다.
카캉! 푸푸푹! 콰직!
카심의 창이 무섭게 상대의 얼굴과 몸을 노렸지만, 그는 독특한 형태의 창날을 이용해 막아냈고 상대 역시 빠르게 찔러 주변 나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둘은 동시에 튀어 올라 공중에서 다시 한번 공격을 퍼붓고는 착지하자마자 상대는 튕기듯 뒤로 빠졌고 카심을 그를 쫓았다.
어느새 도착한 지형은 제법 큰 절벽.
70층의 지배자는 그 절벽을 향해 뛰어내리며 씩 웃었다.
“이 안으로 오는 순간 네놈의 패배다. 자신 있다면 들어...”
그러나 카심은 주저하지도 않고 그를 향해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신속을 사용해 순식간에 바로 앞으로 달려갔다.
“무서우니까 떨어지기 전에 죽어라.”
파아아앙!!!!!
“크아아악!!!”
소닉붐을 적중당한 70층 지배자는 엄청난 속도로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
하지만 표정이 좋지 않았다.
상대의 수준이 높긴 했지만, 충분히 죽일 생각으로 시전한 소닉붐이었는데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인은 바로 [불 완벽한 육체]로 바뀐 특성으로 인한 본능적인 거부감으로 몸에 무리가 온다는 것을 알고 완벽하게 힘의 전달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소닉붐은 몸에 큰 무리가 왔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불 완벽한 육체]로 변하면서 힘의 이동이 확실히 아주 미세하게 이전보다 깔끔하지 않았다.
“전사의 탑 안에서 이 버릇을 고쳐야 할 텐데.”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곳에서조차 몸이 이런 반응을 보인다면 진짜로 죽는 환경에서는, 본능이 훨씬 제약을 걸 게 분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푸른 힘을 사용할 걸 이라는 후회와 함께,어쩔 수 없이 저 깊은 절벽 사이를 향해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