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편의점(1)
“아 씨발…. 머리 좆같이 아프네.”
칼로 헤집어지는 듯한 두통을 느끼며 잠에서 깼다.
어제도 술을 뒤질 정도로 퍼마시고 잠들어서 그런지 머리가 깨질 듯하다.
뇌를 찌르듯이 아파오는, 이런 고통도 이젠 익숙한 감각이었다.
그날 이후 관리 때문에 피우지도 않던 담배를 셀 수도 없이 피워대는 것도.
매일매일을 술로 보내면서 잠 못 드는 밤도 억지로 이겨내는 건.
눈을 뜨고 방안을 둘러보니 사방이 어둠에 잠긴 채였다. 아무래도 밤인듯했다. 내방은 창문이 있으니 낮이었다면 방 안이 밝았겠지.
슬쩍 몸을 일으켜서 내 아래를 보니 검은 나시에 세 개의 줄무늬가 그려진 츄리닝을 입은 채였다.
어제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실컷 마시고 집에 와서 옷도 안 벗고 잠들었나.
그러거나 말거나 옷을 갈아입을 생각도 안 하고 곧장 침대에서 나와 내 식탁에 있는 담배를 찾았다.
어둠 속에서 식탁 위에 원래 있을법한 위치에 손을 뻗어 훑어봤는데도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원래 이쪽에 뒀는데 어제 마시면서 다 피웠나.”
당장 필요한 데 없는 데에서 오는 짜증을 느끼며 내 츄리닝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원래라면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의 두툼한 감촉은 느껴지지 않고 꼬깃꼬깃한 한 장의 종이만 느껴졌다.
그 종이를 꺼내서 어둠에 익숙해진 내 눈으로 흘긋 보니 만 원권이었다.
“좆같네. 왜 만원만 나와, 지갑은 어디 가고…. 하 되는 게 없네.”
한숨을 내쉬며 다시 만원을 꼬깃꼬깃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담배랑 술을 사러 검은나시에 츄리닝만 걸친 채로 편의점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왔다.
꼴이 동네 백수에 방구석 폐인 같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누구한테 잘 보일 것도 없으니까.
‘그나마 편의점이라도 가까워서 다행이네.’
집을 나와서 3분 정도 걸으면 있는 편의점.
귀찮게 오래 걷지 않아도 내게 필요한 걸 금방 살 수 있다는 점이 내 마음에 작은 위안으로 느껴졌다.
문득 웃겼다. 이게 뭐라고 내 마음에 조그마한 위안이 되는지.
그렇게 금방 걸어 동네 편의점에 도착하고 문을 열자 짤랑거리는 편의점 특유의 문소리가 내 귀에 거슬리는 소음으로 다가왔다. 애써 무시하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어..어?”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편의점 알바생이 나에게 인사하려다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뭐지.
꼴이 범죄자 같았나.
흘긋 보니 긴 머리에 선이 얇은 얼굴 그리고 화장한 게 누가 봐도 여자였다.
하긴 씻지도 않고 나시티에 츄리닝, 그리고 거울 같은 건 보고 오진 않았지만, 머리카락이 각자 화나고 퀭한 내 얼굴이 예상이 갔다.
여자 혼자 일하는 편의점에 이런 모습으로 들어온 건장한 남자를 보면 무서워할 수도 있겠지.
그래도 너무 무서워할 건 없는데.
내가 아무리 정신이 망가졌다지만 엄한 사람 상대로 시비 걸거나 패는 그런 새끼는 아니었다.
심지어 여자한테는.
하지만 꼴이 이러니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 싶어 나는 알바생의 인사에 묵례로 대충 답하고 안에서 계속 어물쩍대다 괜히 알바생한테 걱정 끼치고 싶진 않아서 금방 물건만 사고 밖에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내 수중에 있는 건 만원.
이걸로 소주 2병이랑 담배 한 갑 정도는 살 수 있겠다.
아까 담배 찾을 때 보니 라이터도 없던데 집에 가서 찾아봤자 없을 것 같아서 라이터도 사기로 했다.
나는 주류칸 문을 열고 소주 2병을 꺼낸 뒤 미로 처럼 곳곳에 뻗어있는 매대를 지나 계산하려고 카운터 앞에 섰다.
그런데 막상 계산하려고 앞의 알바생을 보니…. 알바생의 상태가 좀 이상했다.
왜 계속 내 가슴팍이랑 얼굴에서 시선을 못 떼고 번갈아 눈동자를 굴리는 걸까.
내 몸에 뭐가 이상한 게 묻었나 싶어서 나도 시선을 내려 내 가슴을 바라보다가 지퍼 내린 츄리닝 사이로 검은나시만 입어 가슴팍이 훤히 드러난다는 걸 알았다.
그게 앞의 알바생한테 흉하게 보여 계속 바라보고 있나 싶어 들고 있던 소주병을 매대에 탁 내려놓고 츄리닝 자크를 올렸다.
지이익-.
그제야 알바생이 정신을 차리는거 같더니 내 얼굴을 보면서 또 멍해지려는 거 같길래 손을 매대에 내려놓고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그제야 화들짝 놀란 그녀는 갑자기 나한테 사과를 해왔다.
“헉!? 죄송합니다…. 그게 제가 일부러 보려고 본 게 아니고…. 그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서, 정말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하다는 건지 모르겠네. 그냥 남자 가슴 바라보는 게 뭔 죄라고.
오히려 여자 앞에서 남자가 나시만 입고 내 가슴팍을 보여준 게 실례일 수도 있지 않나?
그냥 부끄럼이 많거나 착한 사람이다 싶어 나는 알바생의 죄송하다는 말에 별거 아니라는 듯 오른손을 들어 이리저리 흔들었다.
내 손짓에 알바생이 다행이라는 듯 후 숨을 내쉰 뒤 다시 사색이 되어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입을 여는 듯 마는 듯하더니 어딘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한마디 말했다.
“혹시..신분증 있으세요?”
아.
시발.
순간 지갑을 잃어버린 걸 깜빡하고 만원만 달랑 들고나온 게 생각났다.
내 나이가 22인데 아직 고등학생의 얼굴에서 많이 벗어나지 않은 외모로는 신분증 검사에서 벗어나기 힘들겠지.
‘정말 22살인데…하. 하필 지갑을 잃어버려서 지랄이야.’
이 참담한 현실에 직면하고 집에 가서 뭔가 증명할 걸 가져와야 하나 생각하면서 한 손을 턱에 받치고 고민하고 있을 때 알바생이 나에게 다시 말을 걸어왔다.,
“음...역시 한국어를 못하시나, H..How old are you?
???
나는 당황해서 이게 뭐 하는 건지 해서 알바생을 다시 바라보았다.
아니 누가 봐도 한국인인데 역시 한국어를 모른다고 하면서 갑자기 영어로 물어보다니.
혹시 신분증 있냐는 말에 답을 안 하고 고민만 하고 있어서 고등학생인 줄 알고 비꼬는 건가.
상황이 어찌 됐든 일단 내 나이를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22살입니다.’
"22 года."
"어…."
나와 알바생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알바생은 곤란하다는 듯 음..어 거리고 있었고 나는 난생처음 듣는 소리가 내 입에서 나갔다는 사실에 혼란에 빠져있었다.
아니 난 분명히 한국어를 말했다. 근데 갑자기 처음 듣는 언어가 내 입에서 나갔다.
뭘까. 요즘 술만 맨날 퍼먹어서 벌써 뇌에 이상이라도 온 걸까.
앞을 보니 완전히 당황한듯한 알바생이 큰일 났다는 표정을 짓고는 휴대폰을 계산대 중앙에 나도 완전히 볼 수 있게 눕혀놓고 뭔가를 급히 검색하기 시작했다.
보니까..외국어 번역기?
‘아니 나 진짜 한국인이라니까.’
나는 이 혼란스러운 상황에 얼타다가 다시 냉정히 정신을 차리고 다시 말해보기로 했다.
뭔가 잘못된 걸 거야, 내가 요즘 술만 퍼먹어서 뇌에 필터가 사라지고 아무거나 뱉었겠지.
다시 집중한 다음 뇌에 말할 한국어를 띄워놓고 천천히 말했다.
"저 22살입니다, 그리고 한국어 할 줄 알아요."
됐다. 내가 들어도 완벽하게 한국어로 나갔다.
나는 그 사실에 안도하며 살짝 미소 짓고 만원을 꺼내서 알바생에게 내밀었다.
알바생은 당황한 표정에서 좀 풀려나 다행히라는 듯 하아 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자기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그다음 내가 건네고 있는 만 원을 받고는 스캐너로 술병 바코드를 두 번 찍었다.
"3600원입니다."
3600원? 아 이 해프닝에 휘말려서 담배랑 라이터 사는 걸 깜빡했다.
‘이렇게 정신없는 건 오랜만이네.’
아무튼 다시 알바생에게 말했다.
‘말보X 레드 한 갑이랑 라이터 하나 주세요.’
"Пачка MarlboX Reds и зажигалка"
씨발 왜 또 내 입에서 이상한 말이 나가는 거야.
심지어 알바생 표정을 보아하니 날 좀 이상하게 보는 눈빛이다.
하긴 그렇겠지. 한국어 할 줄 안다고 해놓고 또 이상한 말 뱉고 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다시 뇌에 말할 한국어 문장을 띄워놓고 천천히 알바생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말보X 레드 한 갑이랑 라이터 하나 주시겠어요?"
알바생은 갑자기 이해됐다는 표정을 하며 밝게 웃더니 금방 라이터랑 담배를 꺼내 바코드를 찍었다.
"삑.삑. 8600원입니다. 아직 한국에 오신지 얼마 안 되셨나 봐요 하하."
존나 부끄럽다 씨발. 아니 누가 봐도 한국인이 이상한 말 뱉었다가 한국말 뱉었다가 하니 얼마나 미친놈같이 보였을까.
또 괜히 입을 열었다가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갈지 두려워 고개만 조그맣게 끄덕였다.
거기에 알바생은 신이 나서 이리저리 떠들었다.
"한국말이 아직 헷갈리시나 보네요. 저도 외국어 배울 때 그랬거든요. 영어로 나가야 되는데 답답해서 갑자기 한국말로 나가고...하하, 왠지 동질감 느껴지네요."
알바생은 그 뒤로 이리저리 떠들면서 만원을 돈통에 집어넣고 내게 거스름을 주면서 우물쭈물하더니 얼굴이 붉어지면서 내게 물었다.
"음..그런데 혹시 한국 오신지 얼마 안 되신 거면 여기 친구도 아직 많이 없으실 텐데 혹시 번호 주실 수 있나요? 아 다른 뜻은 아니고 그냥..제가 여기 한국에 대해서 제가 잘 알려드릴 수 같아서…. 저 되게 좋은 곳 많이 알거든요."
나는 생각했다. 이 대화는 뭔가 이상하다고. 나시에 츄리닝만 걸친 이 복장에 여자가 나한테 번호 따는 것도 그렇다 치자. 난 격투기 선수였고 그 때문에 몸이 좋았으니까.
근데 왜 자꾸 저 여자는 나를 외국인이라 보는 걸까.
생각해보니 처음 대화부터 이상했다. 한국말로 물어보고 갑자기 영어로 물어보지 않나,내가 한국말이 아니라 이상한 말로 대답했다 하지만 끝까지 외국인으로 취급하지 않나.
만약 나를 검머외로 봤어도 처음에 한국말로 질문하고 내가 가만히 있을 때 영어로 다시 물어볼 리가 없다.
처음엔 신분증 있냐는 질문에 바로 대답 안 해서 날 미성년자로 착각하고 비꼬는 건가 싶었지만, 끝까지 내가 외국인이라 주장하는 걸 보니 비꼬려고 그렇게 영어로 질문했을 리도 없고.
설마 22년을 한국에서 살아온 누가 봐도 한국인인 나와 외국인을 헷갈려 한다는건 역시..
정신이 좀 이상한 여자다. 자기 눈에 달려있는 눈알 두 개가 눈깔사탕이 아니라면 나를 바로 영어권 외국인으로 볼 리가 없지.
좀 꺼림칙해져서 대충 장단 맞춰서 얘기하고 빨리 나가려고 했다. 아무튼 고맙게도 이여자는 끝까지 나를 외국인으로 착각(?)..한 덕분에 신분증 없이 술이랑 담배를 살 수 있게 해줬으니까.
일단 고맙게 생각하고 알바생의 질문에 대답하려 했는데..
대충 내가 한국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이다..생각하고 말할려다 멈칫했다.
내 병신같은 뇌 뒤틀림 때문에 또 이상한 말로 나갈 수도 있겠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술 때문에 갑자기 뇌에 문제가 생긴 게 확실했다. 그래도 상관없긴 했다.
이미 내 인생은 더 나아갈 길도 없었으니까. 술을 더 꾸준히 많이 마시면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침대에 누워서 죽어있지 않을까.
아무튼 머릿속으로 문장을 만들고 다시 알바생에게 말했다. 대충 대답해주고 빨리 밖에 있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 술을 먹고 오늘날도 지우고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번호 열기?통과?가 안돼서 번호가 없네요. 만들자마자 알려드리러 올게요."
‘존나 쪽팔리네 이게 뭐하는 짓일까 씨발….’
일부러 개통이란 단어 안 쓰고 외국인같이 한국어에 미숙한 마냥 말했다. 전에 알았던 사람들이 지금 이러고 있는 나를 봤다면 이렇게 말했을 거 같다.
‘푸하학ㅡ 세화 저 병신은 선수 짤려서 많이 힘든가 보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날 비웃는듯한 그 얼굴들이 눈앞에 보여 하마터면 그 얼굴들이 아른거리는 허공에다 주먹을 뻗을 뻔했다.
만약 내가 그러면 아무리 앞의 이상한 알바생이라도 비명을 지르면서 경찰에 신고하겠지.
아무튼 컨셉이 먹혔던 것인지 알바생은 거절당했음에도 미소를 띄우고는 어딘가에서 메모지랑 펜을 꺼내서 뭔가를 적고는 그 메모를 나한테 건네줬다.
"이거 제 번호인데..나중에 번호 만들면 꼭 알려주세요. 아 그리고 얼굴이랑 몸에 문신 정말 예쁘세요!"
역시 미친년이다. 나는 문신 같은 거 살면서 한 번도 새긴 적 없다. 진짜 헛것 보이는 거 같은데 약이라도 빤 걸까?
아무튼 나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후 술과 담배를 챙겨 편의점을 나갔다.
그리고 밖에 설치돼있는 파라솔 밑 의자에 앉아서 술병을 깐 뒤에 반쯤 마시고 담배를 꺼내 입에 문 뒤 불을 붙였다.
나는 내 목을 감싸는 연기를 느끼면서 머리가 도는 걸 느꼈다. 오랫동안 안 펴서 그런 것인지 술 때문에 도는 건진 몰라도 오늘 하루도 빨리 보내버리고 싶었다.
이 술을 다 마시고 나면 비틀거리면서 집에 돌아가 죽은 듯이 자겠지.
그리 생각하며 담배를 다시 물려고 할 때 누군가가 뒤에서 어깨를 잡으며 나를 불렀다.
"저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