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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화 〉류세화(2) (4/94)



〈 4화 〉류세화(2)

주변엔 서로 거리를 두고 길 곳곳에 띄엄띄엄 서 있는 높은 가로등들이 미약한 불빛을 발산하며 어둠에 잠긴 이 밤거리를 밝히려고 애쓰고 있었다.
편의점 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불빛들 또한 길거리와 내가 앉아있는 테이블을 비춰주고 있었다.

난 그 덕에  소녀가 테이블 위에 세워두고 있는 핸드폰 안에 보이는 정체 모를 얼굴의 낯선 눈동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자! 자기 얼굴 봤죠 오빠? 자기가 봐도 한국인처럼 생기진 않았지?”

보정 어플 같은 걸 깔아 놔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하기엔  낯선 눈동자는 내가 눈동자를 굴리자 무서운 속도로 따라붙었다.
내가 카메라 안에 비친 얼굴만 바라만 보고 있자 앞의 소녀가 나를 재촉해댔다.

“왜 자기 얼굴 처음 보는 사람같이 뚫어져라 봐요 킥킥. 본인이 봐도 그렇게 예쁘게 생겼어요?

처음 보는 거 맞아.

“아 진짜! 멍 때리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그래서 오빠 부모님 중에 누가 한국분이에요? 응?
나 진짜 갑자기 궁금해져서 그래.”

'두 분 다 한국분이라고. 네 좆 같은 장난에 우리 부모님을 언급하지 마. 재미없다고. 이제 농담 좀 그만해..제발 부탁할게.'

난 필사적으로 부정해봤지만 점점 저 장난치는 듯한 여자의 입꼬리는 나에게 빨리 인정하고 순응하라는 듯 꼿꼿이 버티고 있는  껍질을 깎아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갑자기 취했어요? 그러니까 누가 술을 그렇게 마셔요. 몸 생각은 안하..오빠? 괜찮아요?”

그녀는 내가 멍한 눈으로 자기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자 그 붉은 입술을 열어 걱정어린 말로 내게 물어왔다.

사실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원래 '류세화'는 사라지고 낯선 무언가로 바뀌었다는걸.

저 작은 화면에서 나를 바라보는 저 얼굴은 보정 어플 따위도 아니고, 저년이 나한테 병신같은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난 절대 인정하기 싫었던 사실을 머릿속에 떠올려 버렸다.

저건 나라고. 그리고 지금까지 들었던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일들 또한 함께.
해 본 적 없는 문신이 예쁘다는 말. 외국인이라 착각하고 내게 말을 건 것. 갑자기 처음 듣는 언어가  입에서 술술 나오는 것.

내가 듣고 저 사람들이 미쳤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게 저 사람들이 미친  아니라..자기가 보는 그대로 말하는 거였다.

 진짜 '류세화'는 어디로 갔는진 몰라도 이렇게 한순간에 사라지면 안 됐다. 난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있었다.
그건  가짜 '류세화' 로는 할 수는 없다.
많이 바라지 않았다. 제발 한 번 만이라도 내가 원할 때 내 원래 얼굴로 돌려달라고 믿지도 않던 신에게 빌고 싶었다.

점점 시야가 흔들렸다. 몸이 진정하라는 내 말을 듣지 않았다. 내 벌벌 떨리는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자 내가 앉아있던 의자가 뒤로 밀리며 크게 소리를 냈다.

ㅡ그그그극 덜컹!

난 일어나자마자 지금껏 마셨던 술들의 취기가 머리로 한꺼번에 몰려와 생각이 하얗게 비워지는 걸 느꼈다. 집으로 가야 했다. 어떻게든 일단 집에 가야 했다.
미친놈같이 마신 술 때문에  생각 말고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돌리고 한발을 앞으로 내딛으려고   다리에 힘이 빠져 헛디뎌 넘어질 뻔 하니 뒤에서  여자가 나를 도와주려 했다.

“오빠 위험해요! 어디 가려고 하시는진 몰라도 제가 일단 부축해 드릴게요.”
“아니...내 몸에 절대 손대지 마요..건들면 죽일 거니까..”

난 짐승이 으르렁거리듯 말한 뒤에  말에 놀란듯한 그녀를 내버려두고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위태위태하게 다리를 놀려 내가 있던 테이블이 보이지 않는  골목 구석으로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

6월 중간고사를 앞두고 매일 공부하던 미나는 오늘도 책상의 지박령이 되었다가 핸드폰에서 밤 11시가 되었다는 알람이 울리자 커피를 빨고 새벽까지 공부하기 위해 의자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피며 냉장고로 향했다.

냉장고 문을 열자 안에 보이는  엄마가 해두고 간 김치 장아찌 같은 밑반찬들이 보였다. 그중에 아무래도 커피는 없는 것 같았다.

“뭘 또 이렇게 해두고 갔어..안그래도 바쁜데. 음..그나저나 커피가 하나도 안 보이네? 아~이건 논란이 좀 있겠는데?”

미나는 일 때문에 안 그래도 바쁜 엄마가 미나를 위해 반찬을 싸두고 갔다는 게 마음이 아파 애써 자신한테 농담을 던지며 기분을 풀었다.

‘커피 없으면 공부하다 곯아떨어져 버리는  몸뚱아리..정말 예쁜 거랑  큰  말고는 쓸데가 없다~킥킥. 아, 그나저나 커피를 사 오긴 해야겠당.’

미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팬티만 입은 채로 벽에 걸려있는 옷걸이에서 엑스라지 사이즈의 후드티를 꺼내 입고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미나가 애장하는 수면 바지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후드 모자를 두른다면?

“오키 편의점 룩 완성.”

미나는 지갑을 챙긴  집에서 나와 밤이라 시원한 여름 공기를 만끽하며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커피를 사러 걸어갔다.
편의점까지 가는 길은 조용했고 길 곳곳에 불법주차된 차들을 마주하며 미나는 밤의 분위기에 취해 살짝 후드를 벗어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았다.
미나는 노란색으로 예쁘게 반짝거리는 달빛을 보고 있으면서 마음이 채워짐을 느꼈다. 저 달이 미나를 잠깐이나마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거 같았다.

'오늘 밖에 분위기 너무 예쁘다..아 진짜 나와보길 잘했당.'

그렇게 미나는 오랜 공부로 피폐해진 멘탈을 치유받으며 콧노래를 다시 흥얼거리면서 편의점에 거의 도착해갔다.

“오늘은~어떤 맛 커피를 먹을까요? 카라멜? 아메리카노? 갑자기 고민되...엥?”

미나는 멀리서 편의점 테이블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를 보더니 당차게 걷던 발걸음을 살짝 멈추었다.
뒤에서 본 그의 등판은 넓었고 어깨는 양옆으로 쭉 뻗어 있으면서 끝이 직각 형태로 깔끔하게 떨어진  모양이 예뻤다.

미나는 자신 말고 다른 여자들이  등판을 봤다면 뒷태 존나 예쁘다고 호들갑  떨었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거기서 발정  몇몇은 호들갑에서 그치지 않고 젖어서 팬티나 갈아입으러 갔을 거다.

정작 미나는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의 잘빠진 어깨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냥 남자 혼자서  이 늦은밤에 처량히 혼자 편의점 의자에 앉아있는 걸까 궁금해서 앞으로 다시 발걸음을 움직였다.
저 남자가 뭐 하는지 충분히 보이는 거리까지 간 미나는 그가 담배를 피는걸 보곤 살짝 거부감이 들었다.

미나는 담배 피우는 남자가 싫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남기고 간 아버지도 담배를 피웠고, 정숙하지 못한 남자들도 담배를 많이 피웠기에. 미나는 순종적이고 착한 남자 외에 다른 남자는 절대 좋아하지 않았다. 걸레 같은 새끼들이 미나의 외모를 보고 대준다고 접근했었어도 다 쳐낸 게 미나였다.

정작 순종적이고 착한 남자들은 무서워서 미나에게 다가오질 않아 아직 처녀를 떼진 못했지만. 한참 성욕이  나일 법한데 미나는 정작 그런거엔 별로 관심이 있진 않았다. 흔치 않은 타입이었다.
아무튼 담배 피는 남자를 보고 살짝 기분이 나빠진 그녀는 홧김에 짓 궂은 마음으로 그의 뒤에서 다가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살짝 시비조로 그를 불렀다. 미나는 이 남자가 담배를 떨어뜨리고 화들짝 놀라는 게 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나는 곧바로 후회했다.

‘아씨..갑자기 짜증 나서 모르는 남자 어깨를 잡는 것도 모자라 뒤에서 무섭게 불러버렸네. 이렇게까지 못되게 굴 생각은 없었는데..’

미나는 홧김에 저지른 멍청한 자기 잘못에 남자가 겁먹기 전 바로 사과하려는 찰나 꽤 의외의 상황에 살짝 당황해 손을 올린 상태 그대로 멈춰있었다.

‘엥? 뭐야 하나도 안 놀라네?’

보통 남자였으면 개구리처럼 튀어 올랐을 텐데 몸을 움찔거리지도 미동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있는 남자를 보곤 미나는 호기심이 생겨 그에게 합석을 요청했고 그 남자는 고개를 순순히 끄덕여 허락해주면서 갑자기 생각난  미나에게 말했다.

‘미성년자는 아니죠?’

만약 미성년자일 미나 때문에 담배 끄긴 싫다나. 착한 건지 뭔지 꽤 재밌는 남자였다. 그렇게 말한 것치고는 자기도 성인인지 아닌지 긴가민가하게 생겼으면서. 물론 중간고사를 준비하는 착실한 고등학생인 미나는 일단 그의 앞에 앉은  엄마 몰래 태우는 자기 담배를 보여주었다. 말 듣자마자 찔려서 움찔거리긴 했지만 태연하게 거짓말하면서 자연스럽게 그의 얼굴을 본 미나는 속으로 감탄을 삼켰다.

검은 머리와 하얀 피부 그리고 황금색 눈동자. 동양과 서양의 조화가 이루어진 듯한 얼굴. 아무래도 혼혈 같은데 솔직히 눈높은 미나가 봐도 존나 예쁘긴 했다. 물론 정숙한 남자답지 않게 그의 눈 밑에 새겨진 타투를 보곤 외모에 대한 감탄 말고 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 클럽죽돌이 같은 남자는 아무리 예쁘고 잘생겨도 절대 사양이었다.

그래도 지나가는 여자에게 자자고 물어보면 미친 듯 좋아할 여자가 한 바가지일 듯했다.
저 남자의 바다같이 클 거 같은 어장 안엔 과연 물고기가 얼마나 차있을까.

그래도 미나는 자신이 함부로 손댔는데 별말 안 하는 남자에게 감사함을 느껴 여기서 위험하게 뭐하냐는 질문을 했고,  남자에게서 들려오는 말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 남자 처음에 한국어로 말하더니 갑자기 러시아어로 말하고 있다.
지금 미나는 후드로 얼굴의 많은 부분을 가리고 있었고 만약 얼굴을 보여줘서 미나가 혼혈처럼 생긴 걸 봤어도 영어가 아니라 하필 러시아어로 미나에게 말을  게 신기했다.

이 남자도 나처럼 러시아 혼혈인가? 섞인  같긴 하더니 나랑 동지일 줄이야. 자기 같은 혼혈을 만난 미나는 신이 나서 조금 얘기하다가 곧바로 궁금한 걸 물어봤다.

‘제가 러시아어 할 줄 아는  어떻게 알았어요?’
‘..재주가 많네요.’

정작 그 남자는 미나가 재수 없다는 듯 약간 시큰둥하게 대답했지만 미나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이 혼혈인 걸 말하고  남자에게 부모님 중 어느 쪽이 한국분이냐고 물어봤다. 질문을 들은  남자도 미나처럼 반가워하길 기대했다.

하지만 미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기는 한국인이라고 드립을 쳤다.
..아니 솔직히 처음엔 웃기긴 했는데 갈수록 우겨대니까 미나도 승부욕이 돌았다.
핸드폰으로 남자의 얼굴을 비춰주고 하나하나 이게 순혈 한국인이냐고 캐물어서 그에게서 사실 나도 너와 같다는 항복선언을 받고 싶었다.

미나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에서 셀카모드로 전환한 뒤 그가 자신의 얼굴을   있게 해주었다. 근데 그 남자는 아무  없이 자기 얼굴을 정신 나간 듯 보고 있더니 갑자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려 했다.
미나는 떠나려는 남자가 몸을 휘청거려 위험하게 비틀거리길래 저러다 넘어질까 봐 도와주려 했더니 날 선 말과 함께 어딘가 두려움이 함께 느껴지는 말로 미나를 거부했다.
그리고는 저 어두운 골목 사이로 사라져 버렸다.

미나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자리에 앉아서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커피사는것도 깜빡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 가서야 그 사실을 안 미나는 그날 공부를 그냥 포기해버렸다.

***

 곳곳에 주차된 차들 때문에 거리가 난잡해 보였다. 주변의 빌라들에서는 사람들이 전부 자는  불이 꺼져있었고 덕분에 어둠에 잠긴 사방을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의 불빛만이 서로 거리를 두고 길을 밝히고 있었다.

늦은 밤이라 차가 다니지 않는 주택가의 길 중앙으로 걸어가며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안내표지판과 주차된 차들을 피해 나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걷는 나는 영락없는 술 취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편의점에서 집까지 몇 분  되는 짧은 거리 덕분일까. 내가 집이 있는 건물 앞까지 도착했을 때까지 어떤 사람도 마주치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난 평소에는 아무리 취해도 내가 가진 날카롭게 벼린 이빨을 언제라도 꺼내 날 지킬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뭘까. 오늘은 그냥 내가 마치 고슴도치가 된 것 같았다.

뾰족한 가시들이 삐죽삐죽 솟아있는 등이 아니라 몸이 뒤집혀 연한 속살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고슴도치.
자신을 보호할 가시가 없는 고슴도치가 된 나는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누구한테 당할 수 있다는  감정이 낯설었다.
나는 이런 상태인 나를 누군가가 볼지 몰라 왠지 모르게 두려워 내 작은 원룸까지 계단으로 황급히 올라간 뒤 떨리는 손으로 문 비밀번호를 눌러 집에 들어온  문을  닫았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긴장이 풀리며 몸을 지배하는 알코올 때문에 당장이라도 쓰러질  같은 몸을 옮겨 침대로 갔다. 지금은 거울을 보기가 싫었다.
왠지 모르게도.

그냥 푹 자고 일어나면 이 모든 게 한여름 밤의 꿈일지도 모른다고 바라며 식은땀으로 젖은 나시와 상의를 전부 벗고선 침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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