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화 〉존나 웃긴 세계(1)
세화와 헤어진 하율은 집에 오자마자 땀에 젖은 옷들을 벗어 던지며 몸을 씻으러 갔다.
솨아아-.
하율은 샤워기 헤드에서 나오는 물을 맞으며 꿈만 같았던 하루를 되새겨 보고 있었다.
***
솔직히 처음에 세화에게 번호를 건네줄 때는 몰랐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 같은 여자한테 연락줄 리가 없었다.
외모도 그냥 괜찮은 수준이고 몸매도 그냥 나쁘지 않은 자기가 평범하다고 생각한 하율 이었다.
다른 여자들이 들었다면 뺨 싸대기를 후려칠 말이었지만 일단 본인은 그리 믿고 있었다.
그렇게 자조하면서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려왔다. 받고 보니 세화인 걸 알고 침대에서 튕겨 나오듯 일어나면서 온 집안을 오도도 걸어 다녔다.
와 무슨 자신감으로 번호를 줬을까. 아빠 말고 처음 해보는 남자와의 통화라 말도 버벅거려 추한 모습을 보였다.
근데 세화는 그게 중요한 게 아닌 듯했다. 자기가 다쳤다고 도와 달라는 말에선 썸같은 달달한 느낌은 안났다. 그리고 어디냐고 물어보길래 고민했다.
‘음..위치 물어보는 거 보면 아마도 급한 거겠지? 편의점에 왔었던 거 보니까 근처에 사시는 것 같은데 일단 편의점이라 하자.’
혹시 세화가 나보고 멀다고 안 와도 괜찮다 할 거 같자 고도의 계산을 마치고 먼저 대답했다. 다행히 블러핑이 세화에게 먹힌 듯했다.
그래도 혹시 너무 덥석 받는 게 아닌가 한번 튕기듯 찔러보곤 화장을 할까 말까 고민했다.
그러다 세화가 편의점에서 자기 집까지 3분밖에 안 걸린다 하지 않는가!
하율은 화장이고 뭐고 당장 옷부터 챙겨 입었다. 그 와중에도 최소한의 매력 어필은 챙겼다.
남녀 모두가 섹시하다 생각하는 검은색. 하율이 입은 흰 티에 풍만한 검은 브래지어가 비치자 꽤나 야릇하게 보였다.
‘일단 여기서 세화씨 집까지..3분안엔 절대 못 간다. 하아 어쩌지. 급하셔서 나한테까지 전화하신 거 같은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죽어라 뛰어가면 금방 도착하겠지.’
정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미남이었기에 그와 친해질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하율은 경주를 하듯 문을 열고 뛰쳐나가 그의 집까지 말 그대로 죽어라 전력질주 했다. 그렇게 초인종을 누르고 헉헉대다가 문을 열고 나온 세화가 야하게 입은 걸 봤다.
‘와..진짜 미쳐버릴 것 같다. 저번보다 차림이 더 하시네. 심지어..검은색.’
분명 매우 얇게 걸친 옷뿐인데도 그의 분위기와 어울려 싼티가 아니라 섹시함이 느껴졌다. 보기엔 예쁘지만 함부로 만지면 찔릴 것 같은 검은 장미꽃.
또 멍청하게 바라만 보다가 세화가 다쳤다며 자기 손을 보여주는데 그제서야 주변이 보였다. 피가 여기저기 묻어있는 바닥과 폭탄 맞은 듯 엉망인 집. 난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세화씨..왜 그런 거예요.’
일단 걱정은 조용히 묻어두고 그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세화에게 몰리는 게 느껴졌다.
그의 옆에 있는 나한텐 다른 여자들의 질투심과 부러움이 느껴졌다. 그의 차림새 때문에 우릴 더 엄청나게 보는 듯했다.
솔직히 여자친구가 된 거 같아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세화 씨는 역시 기분이 좀 안 좋으신 듯 눈매가 좁혀졌지만.
‘그래 다들 저렇게 대놓고 보는 건 실례지. 보라고 저렇게 입으신 것도 아닌데. 기분 많이 나쁘시겠다.’
하율은 여자들을 대신해서 사과하고 그를 빨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는데 안에서도 시선에서 자유롭진 못했다.
그렇게 세화를 치료하던 의사 선생님이 어쩌다 다친 거냐고 물어봤다.
하율을 보고선 묘하게 가늘어진 눈으로. 뭘 물어보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아니에요 선생님..저 아닙니다. 그런 여자 아니에요. 저 정말 착하게 살았습니다.’
그러자 세화가 그냥 어쩌다가 다쳤다고 했다. 심지어 나보고 은인이라 했다! 다행히 선생님은 눈빛이 바뀌어 묵묵히 다친 손가락만 꼬맸다.
‘은인..나보고 은인이라 하셨어. 확실히 호감은 샀고 거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상상만으로 행복하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안했는데 벌써 자식이랑 손녀까지 본 하율이었다.
어느새 치료가 끝나자 세화는 먼저 일어나고 하율도 뒤따라 가려했는데 의사선생님이 낮은 목소리로 하율을 불렀다.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보호자분.’
‘아 예 신하율입니다.’
‘그래요 하율씨. 처음엔 솔직히 하율씨랑 저 분이랑 사귀는 줄 알았어요. 그러면서 하율씨가 다치게 한 줄 알았고. 근데 저분이 하율씨 보고 은인이라고 했으니까 믿고 말할게요.’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지? 설마 뭐 잘못됐다거나..그런건 아니겠지 설마. 하율은 침을 꼴
딱 삼켰다.
‘넵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방금 저 분..어쩌다 손 다친 거라고 했는데 의사가 볼땐 아닙니다. 그냥 무조건 거울 같은거 주먹으로 부순거에요. 안 그럼 상처가 저 난리까지 될 리가 없어요. 그리고 아까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남자가 자기 피부 꿰매고 있는데 굉장히 태연하게 있었습니다. 하율씨는 방금 같으면 보통 남자는 어떻게 할거 같아요?’
어..생각해 보니그랬네. 세화씨는 심각할 정도로 시큰둥했다. 뭔가 심각함을 느낀 하율이었다.
‘보통은..아마도 울거나 눈만 꼭 감고 있지 않을까요. 일단 가만히 있진 못할 거 같습니다.’
‘그렇죠? 근데 자기 상처 헤집는 걸 눈으로 보고만 있었어요. 그것도 덤덤하게. 그러하다는 건 이런게 익숙하다는 뜻이에요. 마취해도 자기 살 집게로 뒤지는 건 느껴지거든요.’
‘그..그런가요 선생님?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저분이 얇게 입은 덕분에 몸을 좀 봤는데 자해한 거 같은 흉터는 없었습니다. 아니면 많이 해놓고 문신으로 다 가렸다거나. 일단 옆에서 잘 지켜봐 줘요. 상처가 많은 사람 같으니까. 젊은 청년 보니 자식새끼 생각나서 괜히 오지랖 부려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율은 이상함을 느꼈다. 세화와 얘기해보니 그렇게놀기 좋아하는 남자도 아닌 것 같은데 몸에 문신이 많았다. 취향이라기엔 남자 몸 치고 많긴 했고. 설마 정말 그런걸까?
하율은 복잡해진 심정으로 세화랑 밖으로 나와 앉아있다가 그것에 대해 물어보려다 결국 말을 돌렸다.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좀 그랬다. 그렇게 잡담만 늘어놓다 세화의 집까지 갔다.
푸른 하늘 아래서 마주 보니 이제야 세화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울었었는지 붉어진 눈가. 어딘가 지쳐 보이는 내리깐 눈.
겉으로 보기와 달리 약해진 듯한 그의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아 코피 나오네. 하율은 물로 대충 닦은 뒤 다시 생각을 이어갔다.
아무튼 서로 인사를 나누다 하율은 마지막에 그에게 이거 한가진 말할수 있었다.
힘들 땐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내가 친구가 되어준다 했다.
그에 세화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하율은 그 웃음을 보며 세화를 안아주고 싶었다. 저 꽃이 꺾이질 않았으면 했다. 세화가 언제나 고고한 늑대같이 빛나길 바라는 하율이었다.
샤워 다 하고 톡이나 보내볼까.
***
집에 들어온 나는 곧장 핸드폰부터 켰다. 일단 연락처부터확인해보니 뭔 이모밖에 없었다.
‘전화기록도 이모,이모. 아 그중에 몇 개 있네. 이민 뭐시기 때문에 온 거랑 하율씨 한테전화한 거.’
한숨만 나왔다. 이 정도 아싸일줄은 몰랐다. 일단 하율을 연락처에 저장한 뒤에 인터넷으로 들어갔다.
‘일단..대통령부터. 이건 뭐야 씹. 지금까지 쭉 여자 대통령이었다가 한명만 남자 대통령이네.’
분명히 지금은 남자가 대통령이었는데 어느새 여자로 바뀌어 있다. 일단 하..그 다음은 역사부문.
근데 역시나 였다.
‘민족의 성웅과 대왕님은..시발 신라때 빼고 남자 왕이 한명도 없구나.’
나는 알아버렸다. 이 세계가 어떻게 되먹은건지. 남성가족부가 떡하니 있고 핸드폰 기사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성폭행 하는게 나온다. 난 그걸보고 뭔 말 같지도 않은 기사야 하면서 관련된 문서를 찾아봤다.
<남성과 여성의 근력차이에 대해. 남성의 신체는 왜 여성보다 신체적으로 뒤떨어질까?>
-그건 인류가 석기시대를 지낼부터 알아봐야 한다. 고대부터 여성은 번식욕과 거친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해....(중략)그래서 결국 남성의 근력이 여성 전체 근력의 40~60% 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이야..지랄이구나 지랄이야. 참 재밌는 세계다 시발. 설마 이 몸도 이 세계 남자를 따라가는 건진 모르겠는데, 일단 나중에 확인해보기로 하고. 다음.’
다른 사이트를 또 들어가봤다.
<서울시가 지금 하고 있는 짓>
내용:공공화장실 몇만개 점검했는데 몰카 0개구요 ㅋㅋㅋㅋ세금 녹는다 녹아. ㅅㅂ남자 화장실 몰카 많다고 지랄하던 새끼들 다어디감?
[남고딩허벅지:ㄹㅇㅋㅋ세금 낭비 씹오짐. 형냐들그렇게 몰카몰카 거리더니 ㅉㅉ]
[티라미수사랑:뭔소리야 너네 보는 야동사이트에서만 해도 몰카물존나 많은데. 그리고 닉네임 바꿔라 더러우니까. 자궁이 뇌를 지배하는 한녀충 수준 잘 알았어ㅋㅋㅋ.]
ㄴ[쎽쓰마렵다:형냐 왔어?ㅋㅋㅋㅋ걱정마 형냐같은 갈좆돼지파오후남은 줘도 안먹어.]
[티라미수사랑:나 남자 아닌데? 군대 갔다왔는데?]
ㄴ[하나둘셋:ㅋㅋ병신. 복무신조랑 총기번호 불러봐.]
[티라미수사랑:우리부대는 그딴거 없었는데ㅋ?]
ㄴ[강한해병윤지영: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ㅅㅂㅈㄴ웃기네]
ㄴ[남고딩허벅지:ㅅ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세상 군대네]
“풉. 아 시발 웃기긴 하네. 덕분에 군대 갈 필요는 없겠다. 악, 뭐야 이거 씨발!”
무심결에 아래 글 클릭했다가 건장한 남자들이 핫팬츠를 입고 춤추는 움짤을 봤다. 존나 더러웠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데도 여자들은 댓글로 오빠 거리며 환장해댔다. 벌써 젖어서 한발 빼러 갔다는 댓글도 많이 보였다. 쭉 댓글들을 보다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쪽 남자들은 노출을 잘 안 하는 거 같네. 어쩐지 더운데도 다 꽁꽁 싸매고 있더라.’
이쪽 남자들은 밀었는지 어쨌는지 몸에 털이 별로 없었다. 그건 여자도 똑같았다. 남자는 약간의 피부화장, 여자는 전이랑 똑같거나 좀 덜 하고 다니거나. 미리 검색하고 말하는 거다.
혹시라도 밖에 나가서 눈이 썩기전에 대비는 해야지.
‘그럼 내 상태를 반대로 생각하면..존나 예쁘고 쭉빵한 여자가 검은 민소매만 입고 풍만한 가슴골을 내보이고 다닌 셈인가?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
어쩐지 존나게도 쳐다 보더라.
그래 일단 속이 좀 후련해졌다. 뭐가 어떻게 된지도 알았고 피곤하니 좀 쉬기로 했다. 이민관리국인지 뭔지 가서 내일은 신분증도 새로 받아야 하고.
푸흡.
아 진짜 다시 생각해봐도 존나게 웃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