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한국인이 되었다(1)
..그렇게 분명 한 번만 치고 끝낼 줄 알았다. 눈도 까뒤집어가며 절정을 했으니.
‘와, 근데 저렇게 정력이넘치네?’
내가 지 딸치는 광경을 보면서도 아무 말 안 하고 노려보고만 있자 더 해도 된다는 느낌이 들었나 보다.
이젠 아예 대놓고 날 바라보면서 손을 들썩거리고 있다.
저 여자 바지는 홍수 난 것 마냥 더 젖어가고.
솔직히 나도 남자라 여자가 내 몸을 보고 그 짓거리를 한다면, 아 그렇게 내 몸이 매력적이구나 생각할 수도 있었다.
저 여자는 앵간히 반반하게 생기기도 했고.
‘근데 여기는 남녀가 바뀐 세상이잖아 씨발 진짜...’
노골적으로 나를 쳐다보는 저 눈은 마치 꼴리는 여자보고따먹고 싶어 하면서도 현실로 이룰 수 없어 상상 속으로 해대는 남자의 눈이었다.
내가 살던 곳 기준으로.
‘여자가 여자처럼 느껴져야 좋지, 저건 그냥 남자랑 다를 바가 없네.’
저 눈. 금방이라도 앞에 놓인 케이크를 자르고 한입에 쑤셔 넣고 싶다는 듯 식욕으로 불타는 눈.
눈앞의 저 남자는 내가 힘만 썼으면 날 강간해서 제 욕구를 채울 수 있다는 저 망상.
그럴 수 있었다. 남자라면 예쁜 여자보고 망상하는 게 당연하지.
날 객관적으로 평가해봤다. 내가 봐도 존나게도 잘생긴 외모에. 180의 키와 쭉 뻗은 다리. 쓸어보고 싶은 하얀 피부.
알아보니까 이 세계에서도 남자 키 큰 거 좋아하는 건 똑같았다.
아무튼 난 지금 쟤한텐 꼴리는 상체를 드러내고 있는 혼혈 백마였다. 그것도 존나예쁜.
원래 세계에서 남자 기준으로 본 거긴 한데 그래도 대충 맞을거다.
‘좋다. 그래 내가 지금 기준으로 꼴리는 건 인정해. 그냥 꼴리는 게아니라 미치도록 꼴리겠지. 근데 그렇게 생각은 할 수 있는데 사람 눈앞에서 대놓고 저 지랄을 하나?’
주변에 사람만 없으면 당장에라도 미쳐서 나한테 달려들 것 같은 저 씨발년이 맘에 안 들었다.
저런 새끼들 때문에 내가 그 꼴 났었으니까.
‘예전에도 그 새끼들 아니었으면 내가 선수 접을 일도 없었겠지.’
예전 기억이 나서 갑자기 기분이 거무칙칙해졌다.
그래도 앞의 변태가 저 지랄을 하는데도 나는 내적갈등에 빠졌다.
저걸 끌고 나와서 먼지나게 패자니 모습은 여자라 좀 그렇고..
아니면 여자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그랬고. 신고한다는 것도 선택지엔 없었다. 귀찮기도 하고 자괴감 들잖아.
‘역시 아직 적응이 안되네.’
난처한 상황에 빠진 나는 짜증 나서 혀를 찼다. 근데 의도한 것보다 살짝 세게 차졌다.
"쯧."
조용한 지하철 칸 안에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렇게 크게는 아니지만 앞의 저년한텐 들릴 정도로.
시발 바로 후회했다. 갑자기 내가 호러물 주인공이 된 줄 알았다.
지금 지하철 안은 원래보다 사람이 적긴 해도 꽤 많은 사람이 북적거리며 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혀를 차는 소리가 퍼지자마자 그중의 여자들이 순식간에 나를 쳐다봤다.
‘이 새끼들..안보는 척하면서 다 보고 있었네.’
지혜롭게도 내가 핸드폰이랑 저 여자한테 정신 팔린 사이 저 여자들은 날 계속 바라보고 있었던 듯했다.
..솔직히 소름 돋았다 이거. 순식간에 10개는 넘는 쌍의 눈이 날 쳐다보는 것.
뭐 마침 나한테 사람들의 관심이 쏠린 사이에 기회를 이용해보기로 했다.
"하아.."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짜증 난 듯 얼굴을 찌푸린 뒤 붕대가 감긴 손가락으로 내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아직도 날 보며 딸딸이 삼매경인 저 여자를 죽일 듯 바라보며.
그러자 내게 쏠린 시선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쪽으로 몰렸다.
그걸 본 한 명의 꽤 건장한 여자가 변태한테 다가갔다.
“어이.”
“.....?!”
떡대녀가 부르자변태년은 그제야 사람들이 자길 바라보고 있던 걸 알아차렸는지 황급히 행위를 멈추고 손을 뺐다.
‘개씨발..존나게 번들거리네. 뭐 얼마나 친 거야.’
저년의 팅팅 부어있는 손가락을 봤다. 주름이 뜨고 하얗게 변한 손가락이 역겨웠다. 무슨 물로 저렇게 됐는지 말 안 해도 알 거 같았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이 떡대녀가 변태의 멱살을 잡았다.
“뭐,뭐하는 거야!”
“닥치고 일어나. 이 시발년이 여자 망신 다 시키네. 공공장소에서 뭔 짓거리야.”
떡대녀가 변태녀의 옷을 찢어 당기듯 말 듯하며 실랑이하는 걸 보다 안내방송이 울렸다.
ㅡ이번역은..
‘아, 벌써 내릴 때 됐네. 누군진 모르겠는데 도와줘서 땡큐. 역시 아직은 여자 패기가 좀 그렇다.’
나는 옥신각신 서로 몸싸움하는 두 여자에게 관심을 거두고 곧바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섰다.
그러자 떡대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변태를 잡고 있던 멱살을 풀고 쏜살같이 내게 와서 말을 걸었다.
‘..태세전환이 너무 빠르네. 아무래도 이게 주목적이었나 본데, 감사 취소다. 그냥 내가 해결할걸 시발.’
“저기 괜찮으십니까? 하하, 이거 남자분 앞에서 험한 꼴을 보여드렸네요. 저 사람이 여자 망신시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녀의 말에 왼쪽 팔로 머리를 넘기며 고개를 숙여 일단 감사인사를 전했다.
어찌 됐건 도와준 건 맞으니 인사하긴 해야지.
그나저나 머리 넘기는 게 이 몸의 습관인지 자꾸 팔이알아서 움직인다.
그 덕에 위를 덮고 있던 츄리닝이 한쪽으로 벗겨지며 내 왼쪽 팔이 전부 드러났다.
떡대녀는 나시만 걸쳐져 있어 훤히 드러나는 내 어깨와 가슴팍을 보며 동공을 지진난 듯 흔들었다.
그녀의 눈이 원래 세계의 남자처럼 변했지만 이제 이 정도는 감수하기로 했다.
‘그래...보고 꼴리는 거나 상상까진 터치 하지 않기로 하자. 행동으로만 안 하면 되지.’
“큼.큼. 일단 많이 무서우셨을 텐데 제가 좀 도와드리겠습니다. 필요하시면 같이 경찰서까지 가드리고요.”
그녀는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며 내게 크고 두꺼운 손을 내밀었다.
아 씹..귀찮아졌네. 내가 거절해도 끝까지 따라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여자.
어떻게 할까..난 그게 필요했다.
차갑게 거절해서 이 여자가 빡쳐서 날뛰지도, 그렇다고 여지도 남기지 않을 그런 말이.
그러다 내 눈에 저 멀리 앉아있는 외국인 한 명이 눈에 띄었다.
이거다.
사실 이 몸을 인정한 날 뒤부터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한국말이 술술 나왔다. 근데 또 이모랑통화할 땐 자동적으로 러시아어가 나가고.
내 입이 자동 번역기가 된 것 같아서 편했는데 지금은 좀 걱정됐다.
‘일단 해보자. 뭐 안 먹히면 그냥 차갑게 거절해야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되네?
낯선 외국의 언어를 들은 떡대녀는 다 잡은 물고기를 놓친 어부처럼 탄식을 뱉더니 아쉬운 듯 혀를 다셨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며 출입문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ㅡ취익
내가 나가려고 하자 또 그녀가 뒤에서 뭐라 웅얼거렸다.
“왓츄..얼네임?”
‘이제 그만하고 미련을 버릴 때가 되지 않았을까? 질척이는 게 수준급이네, 짜증나게.’
나는 그냥 아돈노잉글리쉬를 말한 뒤 도망가듯 내렸다.
문이 닫히고 뒤를 슬쩍 보니 떡대녀는 아직도 미련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아까 변태년보다 저 여자가 더 무서운 것 같네. 저 덩치면 내가 이길 수 있나?
빨리 이 몸도 어떤지 시험도 해봐야 하긴 하겠는데.’
다시는 지하철을타지 않을 거라 다짐하면서 계단을 올라가 역에서 나왔다.
정신 나간 사람들만 모여있는 밀집된 공간에서 탁 트인 곳으로 나오니 좀 살 것 같았다.
머리로는 아는데 아직까지는 적응이 안 된다.
여자가 시발 남자보고 발정 나서 지랄하는게 말이다. 성별만 여자지 그냥 남자나 다름없다.
원래 세계에서도 이 체격이면 함부로 못 건든다. 근데 여기선 남자가 덩치랑 키가 아무리 커봤자 여자를 못 이긴다.
‘아 프로급 괴물 격투선수 같은 경우는 제외하고. 근데 걔네도 동체급 여성 프로랑 붙으면 무조건 질 것 같긴 한데.
..원래는 누가 봐도 내가 포식자의 위치였는데 이젠 그들에게 내가 먹잇감으로 보인다.
덩치만 커서 맛있어 보이는 걸어 다니는 단백질 덩어리.
처음 본 사람한테 딸감으로 쓰인 걸 생각하니 참..세계가 바뀌긴 했다.
나는 혀를 차며 목적지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재밌는 생각이 떠올라 핸드폰을 꺼냈다.
‘여기 남자들은 나 같은 상황일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 궁금한데.’
나야 원래 그렇다 치고 얘네는 뭐 태어날 때부터 여기 남자 아닌가.
아까전 처럼 또 가만히 있으면 허락하는 줄 알고 뭔 짓을 할지 모르니 대처법을 좀 봐야지.
“한번 검색해볼까. 오. 찾았다.”
핸드폰을 들고는 츄리닝의 비어있는 팔을 망토처럼 휘날리며 앞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폼잡으면서 하는 건 병신같은 똥글이나 보는 거였지만.
제목:오늘 성추행 당할뻔 했는데 들어와줘..
내용:내가 원래 얼굴도 작고 좀 귀염상이란 소리 듣거든. 키도 한175? 그정도대.
암튼그래서 난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막 귀엽다귀엽다거리거든?근데 버스에서 사람많은데 키 한167? 암튼연예인누구 닮은 여자가 날바라보는거야.
무섭잖아 ㅠㅠ여자가 그렇게 뻔히 바라보고 잇으면. 막 다가오려 하길래 무서워서 그냥 빨리 내려버렷어. 진짜 남자가 한국에서 살아가는게 너무 힘든거같애.
익명94:쓰니 마니 무서웠겠다ㅜㅜ걱정마 쓰니 본거 아닐꺼야. 다른데보다가 잠깐스친거겠지.
ㄴ아냐ㅜㅜ진짜 나 바라보는 느낌이였어.
익명21:그냥 키좀커서 신기해서 본거겠지ㅜㅜ쓰니본거 아니니까 마음풀어.
ㄴㅜㅜ진짜 나본거라니까?
익명33:음..본인생각아닐까? 그런 여자가 굳이..?
ㄴ내가 처음에 글 적어놓은거 안보여?나 귀엽게 생겼다고 했잖아.
ㄴ익명33:너는 잘 모르겠다며?그럼 아닌거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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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보던 사이트를 끄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최악이다.
진짜 이 병신같은 새끼들. 도움이 일도 안된다.
‘아니 자기 귀엽게 생겨서 그런 일 당했다는 걸 존나 돌려 말하네. 진짜 죽여버리고 싶게. 나 같으면 진작에 댓글로 쌍욕 박았을 텐데.’
혹시라도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차선책이 나올 가능성을 기대하며 들어갔는데 똥통에 몸만 담그고 나온 기분이었다.
아까보다 복잡해진 기분으로 신속히 걸음을 옮겨 목적지에 도착했다.
웅장한 건물의 크기와 그 벽에 걸린 간판.
내가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 위해 국민이라는 자격을 주는 곳.
엘리베이터 버튼이 30개는 넘을 것 같은 고층 건물.
강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거대한 빌딩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거대함이 나한테 위압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묘한 감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끼며 내 앞의 고풍스러운 출입문을 밀고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