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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데이트(1) (15/94)



〈 15화 〉데이트(1)

촤르륵-.

조용한 방에선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나는  씹은 표정으로 입학통지서만 보고 있었다.

<강남연정고 이민 특별전형 입학통지서>

성명:류세화

나이:18

출신국가:러시아

학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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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보던 서류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눈을 감고 삐걱거리는 의자의 소리만 즐겼다.

"샤샤야..존나 보고 싶어."

진짜  대만 때리고 싶어서.

"그래..보다보니까 예쁘더라. 인정한다고. 살면서 문신 같은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하필  미성년자냐고..시발롬아. 이제 학교 가야 되는데. 니네 동네에서 얼마나 놀고 다녔길래 이래.'

학교는 약육강식의 공간이다.

약한 놈은 잡아먹히고, 강한 놈은 살아남는 그런..

'어..아닌가. 그냥 내가 다녔던 꼴통 학교만 그랬나?'

그때 또 주무관의 말이 생각났다.
내가 사는 곳을 보고 탄식하며  세화씨 어머니가 이래서 이쪽에 집을 구하셨구나 하고 내 어머니의 선견지명에 감탄했던 것.

아무래도 학군 때문이겠지.

강남.

이 나라의 높으신 자제들과 국가의 부가 모이는 곳.

사람들이 강남 하면 아 존나 부자동네 하고 생각하지 않는가.

난 의자에 파묻었던 몸을 일으켜 다시 서류를 봤다.

"강남 외곽 쪽 이긴해도..애들이 공부만 할 것 같긴한데."

예전에 도전한답시고 나한테 몰려와서 다이깨던 그런 일은 없을 듯했다.

'아. 지금으로 치면 내가 여자구나.'

하긴 여자한테 싸우자고 하는 미친 새끼들은 없겠네.

근데 안 그런다 쳐도 문제인게..나한테 어그로가 존나게 끌릴 것 같은데.

'이세계 기준으로..흰둥이 여자가 문신까지 해놨으니 안 끌릴 수가 없지. 혼혈 빗치 같잖아 씨발.'

아니면 곱게 자란 분들이 날 양아치로 보고 혐오의 눈빛을 보낼지도 모르지.

저런 하류층 새끼 하면서.

하아.

 좆까 그냥. 생각만 해도 존나 피곤해.

내가 몸을 일으키니  낡아 헤진 의자가 비명을 질렀다.

'일단 거울 좀 다시 보자. 견적 좀 재고 가릴  있으면 가려는 봐야지.'

진이 빠진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백인인지 동양인인지 둘 중 하나만 해줬으면 좋겠는 얼굴이  반갑게 맞아줬다.
 일단 들어가 있어. 너 보러 온 거 아니야.

"흐음. 보자."

마치 동물농장을 연상케 하는 유리에 비친 내 몸.

얼마나 여우랑 늑대를 사랑하면 저렇게 덕지덕지 박아놨을까.

그리고 과수원이라도 하는  꽃들도 그 주위로 예쁘게 박아놨다.

 외 레터링,구름...

미친 새끼가 많이도 해놨네.

아무튼 감상은 이쯤하고.

'일단 옷을 입었다고 가정하면..'

반팔을 입었을 때 문신이 보일 것 같은 곳을 예상한 결과.

왼팔, 쇄골, 목. 마지막으로  밑. 이정도.

왼팔은 손목뼈까지 타투를 그려놓은 덕분에 토시를 껴도 살짝 위험해 보이긴 했다.

그래도 뭐, 통과. 그 정도면 돼.

그다음은 쇄골.

왼쪽 윗가슴에서 부터 쇄골까지 덮어놓은 덕분에 이건  보일 것 같다.
일단 교복 와이셔츠 입으면 되니까 통과.

이제 목.

'이건 그냥 살  테이프 같은 거 붙이면 되겠다. 크기는 그렇게 안크니까.'

마지막으로..눈 밑.

"야..이건 진짜 답이 없는데?"

안 그래도 길게 뻗은 눈매인데  라인을 따라 다 그려져 있다.

"이건..못가린다 씨발..걍 스티커라 하자."

양아치 남고생 되지 않기 프로젝트를 마치고 거울에서 벗어나 하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마침 통지서도 날라왔고 쇠뿔도 단김에 빼야지.

전화를 받은 하율은 밝게 내 이름을 불러주면서도 의아해했다.

"어 세화야. 조금 전에 통화했었는데..혹시 무슨 일 생겼어?"
"아뇨. 누나, 혹시 지금이라도 시간 돼요?"
"응? 설마..벌써 고등학교 어디 가는지 그거 날라왔어?"
"네."

하율은 고민하는 듯 낑낑대다가 결국 결정을 내렸다.

"미안..나도 시간 내고 싶은데 오늘 밤에 알바가 있네."

참. 이 누나 알바 하지.

"세화야 혹시 내일은 어때?"
"좋아요. 그럼 내일 봐요."
"그래. 고마워."

저 마지막 말에 하율의 착한 성격이 드러나는 것 같아 웃겼다.
뭐가 고맙다는거야.

'이 누나, 진짜 사기 먹는 거 아니야? 언제봐도 성격이..'

아무튼 대충 알았다고 답한 뒤에 통화를 끊었다.

이제 핸드폰  하면서 뒹굴거려 볼까.

***


드디어 오늘이다.

나 신하율의 남자랑 하는 첫 데이트.
약속 시각 한참 전부터 씻고 공들여 화장했다.

그런데 왠지 오늘따라 화장이 잘  먹히는  같아서 살짝 불평했다.

"하. 다시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이 없었다.

어느새 화장하고, 옷 고르고 외모 점검 하는 사이에 세화와의 약속시간이 다가왔으니까.

하율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전신거울 앞으로 갔다.

"그래..이 정도면 괜찮아. 자신감을 가지자 하율아."

속으로는 축 처져 있었지만 애써 자신에게 용기를 걸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어..근데 오늘따라 왜 이러지.'

"혹시 누구 기다리시나요?"
"예? 아, 네.."
"남자친구 기다리세요?.."
"아, 아뇨 남자친구는 아닙니다."
"그럼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죄송합니다.  뭐, 있어서.."

하율은 격세지감을 느꼈다.

여중여고 다닐 때는 남자랑은 접점도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는 번호를 따이네.

사실 그땐 눈을 덮어버릴 듯한 안경과 패션센스 때문이었지만 하율은 여중여고 테크 때문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이게 몇 번째지? 아무리 번화가가 그런 분위기라지만..기분은 좋다.'

하율은 번호따러 온 남자를 보낸 뒤 의자에 앉아 세화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



곰팡이가 피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인 옷장.

 안은 몇 개의 옷들만 애처롭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이거 보니까 나도 예전에 어떻게 살았는지 알겠네."

샤샤와 나는 취향, 성격 같은  거의 98퍼센트 일치하니까.

그래도 저 중 하나를 굳이 고르느라 고민 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늘 나시에 츄리닝만 입고 다니던 내가 지금 저 넝마들 중에서라도 새로 입어보려는 이유.

"오랜만에 사람 많은 데로 가는데 기분 좀 내봐야지."

방금 샤워를 마친 팬티만 걸친 몸으로 옷장 안을 뒤져보다가 그나마 옷이라고 쳐줄 만한 걸 꺼내 입었다.

그냥 무난한 흰 티.

슬림하게 달라붙으면서 곰 발톱으로 긁히기라도 했는지 허벅지가 크게 찢어지고 발목까지 오는 청바지.

'그래, 이 정도면 사람 새끼 답다.'

전신거울의 부재로 전체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대충 아래를 내려봐도 괜찮아 보였다.

그제야 옷장 문을 닫고 집에서 나오니 하늘이 쨍쨍하게 뿜고 있는 햇빛이  눈을 공격했다.

'아으, 씨발..'

손으로 눈을 가리며 휴대폰을 꺼내 보니 약속시간이 애매했다.

'서둘러야겠다.'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내달려 택시에 타고 약속장소에 도착하니 시간이 살짝 남았다.

서늘한 공기로 채워진 차에서 나오니 좆같은 온도의 공기와 오랜만에 보는 번화가의 거리가 나를 반겨줬다.

기업들의 빌딩들만 가득  도시, 강남.

다른 장소에선 개쩐다 소리를 듣던 차들이 이 도시에선 흔하디흔한 가정용 차가 되어버리는 씨발 미친 동네.

그러나 그 차디차기만 한 도시에도 사람이 놀만 한 구석은 있었다.

내가 지금 있는 장소가 '사람이 일만  순 없지 않느냐'  욕망이 결집된 이 번화가였다.

 무더운 여름에도 여전히 놀러 다니는 사람은 많았다.
 증거로 저 카페에서 나오는 커플과 어디 피시방에서 나오는지 우르르 몰려나오는 고딩들을 제출한다.

인도가 양옆으로 감싸진 도로를 지나다니는 차가 빵빵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하율과 만나러 가던  불쾌한 감각이 느껴져왔다.

'와, 시발 나온 지 얼마나 됐다고 땀이나냐.'

벌써 젖어가는 듯한 내 흰 티를 느끼며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시원한 커피 하나 사 가야겠다. 아니 두잔.

'저번에 누나가 커피 하나 사달라 했으니까..그러고 보니 돈도 보내야겠다.'

전생에 내가 애용하던 브랜드의 카페 입구로 들어갔다.

마침 근처에 있네.

딸랑-.

"어서오세요, XX벅스 입니다!"

카페로 들어오자 알바생들의 우렁찬 인사부터 들려왔다.

고개만 끄덕여 인사한 뒤 계산대 앞으로 가서 형식적으로 메뉴를 봤다.

옆에는 나처럼 이 날씨에서 도망쳐온 사람들이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어차피 내 원픽은 있기에 바로 주문하려 알바생 앞에 섰다.

그러자 알바생이 뭔가 애매하다는 듯이 시선을 깔더니 옆에 있는 사람한테 조용히 속닥였다.

"야, 아니 언니.."
"왜?"
"이 손님 외국인인지 아닌지 모르겠거든? 만약 영어 쓰시면 언니가 와서 좀 해줘."

언니라 불린 알바생은 그 말을 듣고  보더니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거였나..'

"자바칩 XX푸치노 한 잔, 아  잔 주세요."
"아, 네 크림 올리시나요?"
"네 두  다요."

내가 그냥 한국어로 주문해버리니 언니알바생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떨궜다.

'그러게, 나도 아쉽네. 입까지 풀고 있던데. 근데 그거 알아? 나도 영어 존나 못해.'

러시아인이 어떻게 영어를 배우겠는가.

미국과 냉전까지 벌였었는데 그럼. 자존심 상했겠지.

'그래서 그렇지, 샤샤? 네가 배워뒀으면 3개 국어인데 아깝다.'

성공적으로 주문을 마치고 달달한 커피를 마시길 기다렸다.

벌써부터 상상됐다.

차가워서 표면에 맺힌 물방울과 마시기 위해 잡았을 때 딱 느껴지는 시원함.
달콤하면서 쓰지도 않아 정신 차리고 보면 반절을 비우게 되는 그 맛.

"자바칩 XX푸치노 두 잔 나왔습니다!"

알바생이 건네주는 커피를 받아들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멀리서 본 하율은 남자한테 번호를 따이고는 의자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누나 인기 많나보네.'

왠지 모르게 내가 기뻐하며 입가에 웃음을 띄웠다.

그리고 뒤에서 몰래 다가가 무방비로 드러나 있는 목에 차가운 커피를 댔다.

"으앗! 차거! 어..세화?"


"누나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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