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데이트(2)
더워서 뒷머리를 올리고 있던 하율의 목에 소름 끼치는 감각이 파고들었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있는 세화였다.
웃으면서 안녕이라고 장난스럽게 읊조리며 커피를 건네는 세화.
하율은 얼떨결에 커피를 받아 들고는 저 곰인 척 하는 불여우를 눈에 담았다.
물론 자신을 위해 의도했을 리 없지만 그렇게 보이는 걸 어쩌나.
크게 찢어진 청바지에선 하얀 살결이 먹음직스럽게 드러나 있고, 흰 티는 땀에 조금 젖었는지 달라붙어서 분홍색.. 열매가 살짝살짝 비쳤다.
"누나"
그리고 몸 위로 드러나는 문신들과 저 야릇한 복장들이 어우러져 요망한..
"누나!"
"어!"
하율은 그제야 감상을 마치고 세화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계속 부르고 있었는데 어디다 정신 팔고 있었던 거에요?"
하율은 자기도 모르게 살짝 흘러나온 침을 닦으며 최대한 어른답게 말했다.
"쓰읍. 음. 세화야."
"네."
"그..오해하지 말고 들어. 네가 지금 입고 있는 티에..비치거든?"
'휴, 겨우 말해줬다. 남자는 이런 거 조심해야지.'
세화는 자기 가슴을 흘끗 보더니 흰 티를 펄럭였다.
그 때문에 옷이 말려 올라가 살짝 드러나는 탄탄한 복근이 하율의 시선을 빼앗고 있었다.
"죄송해요. 땀 때문에 그런가 보네. 말리는 중."
"아, 아니야. 너 혹시 가리개 같은 거 안 붙여?"
"그런 걸 뭐하러 붙여요?"
"그렇구나..아니야."
하율은 세화의 무방비함에 경고하려다가 말았다.
'그래..요즘은 남자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지. 괜히 이런 거 말하면 데이트폭력이니 하고..생각해보니 연인도 아닌데 무슨.'
그런 말도 해줄 수 있는 사이가 되면 좋겠다고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될 리가 없지만.
..알면서도 왜 자꾸 감정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상처가 많은 아이일 텐데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
"그럼 이제 갈까? 네 교복 맞추러. 아, 그리고 커피..고마워."
사실 하율은 카페에서 같이 먹고 싶었지만 세화가 사주는 커피라도 감지덕지하기로 했다.
"아니에요. 누나가 저번에 커피 먹고 싶다 그랬으니까."
"그래. 그럼 이제.."
"잠깐만 누나. 가만히 있어봐요."
뭔가를 본 세화는 하율을 멈추더니 몇 발자국 뒤로 갔다.
그리고는 한껏 꾸민듯한 하율의 복장을 눈에 담으며 생각했다.
큰 가슴이 부각되게 해주려는 듯 딱 달라붙는 흰 반팔티가 허리에서 끊기고, 잘록한 허리와 그 아래로 내려갈수록 넓게 퍼져가는 골반.
포동포동한 하얀 허벅지와 대조되게 가느다란 종아리가 길게 뻗어있는 다리.
마지막으로 저 작은 얼굴을 보니 길게 묶은 포니테일이 찰랑거리며 하율의 예쁜 얼굴을 더욱 귀엽게 보이게 했다.
처음엔 목소리와 긴 머리 유무 따위의 병신같은 거로 성별을 구별했는데 마음이 갈수록 안정되어가는 것인지 이제는 이런 게 잘 보인다.
'많이 꾸몄네. 지금 보니까 연예인 해도 되겠다.'
감상을 마친 나는 하율에게 감탄을 담은 목소리를 들려줬다.
"오늘 되게 예쁘시네요."
"괜찮아. 굳이 그렇게 말 안 해줘도 돼. 나도 아닌거 알아.."
하율은 빈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 생각했다.
아까까지 차있던 외모에 대한 자신감은 세화를 볼수록 사그라들었다.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는 게 아니라 세화가 친구가 되어주는 것에 감사해야 할 정도로.
세화는 저 기어가는 목소리를 듣고 하율이 또 특유의 성격을 발휘했다고 느꼈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누나. 내 말 똑바로 들어요."
"어?"
"착한 것도 좋아. 그게 누나 장점이고. 근데 이거만큼은 누나가 가졌으면 좋겠어.
자존감. 전 당당한 사람이 좋아요."
단호한 세화의 말에 하율은 속내를 들킨 듯 표정에 그늘이 지어졌다.
저대로 두면 혼자 무너질 것 같아 세화는 장난스럽게 하율의 어깨를 주먹으로 툭 쳤다.
"암튼 예쁘다는 거 사실이니까 축 처져 있지 마요. 여자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져선."
다행히 효과가 있었는지 하율은 웃음을 내뱉으며 표정이 밝아졌다.
"고마워. 근데 이거 뭐 사온 거야? 되게 달다. 아메리카노 같은 거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이런 거 먹는 줄 몰랐어."
"운동할 때는 관리 때문에 못 먹었거든요. 근데 접고 나니까 이런 게 좋네요."
그렇게 말하면서 세화는 커피를 쪽쪽 빨았다.
하율은 차가워 보이는 얼굴로 아이같이 빨대를 빠는 세화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운동했었다고?'
"무슨 운동 했어 세화야?"
"격투기요."
"어..?"
'남자가 격투기? 어..그래 재미로 할 수도 있지.'
"그래? 취미라거나 그런 거지? 얼마나 했어?"
세화는 하율의 의구심을 충족해주기 위해 처음 시작할 때를 짚어보았다.
'얼마나 됐더라..고등학교 올라가고부터 했으니까. 대충..'
"5년이요."
"어..그래."
하율은 어쩐지 센 느낌이 나더라,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화..보통 남자 같지가 않네. 다른 데 살다 와서 그런가.'
하지만 세화는 수긍하는 표정을 오해하고 하율이 자기 말을 못 믿는 것 같자 증명해 주려 했다.
저기 마침 여자들이 줄에 매달린 공 같은 게 내려와 있는 펀치 기계에 돌아가면서 발차기를 하고 있었다.
'저걸로 보여주면 되겠네.'
"누나 못 믿는 눈치라 한번 보여드릴게요. 저기 가요."
"아냐! 진짜 믿고 있어, 무리하지 마."
하율이 만류했지만 세화는 성큼성큼 걸어가 펀치 기계를 쓰고 있는 여자들이 끝나기만 기다렸다.
막상 세화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들은 더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똥폼을 잡았다.
'아니 시발..존나 안 끝나네. 저렇게 치면..에휴.'
여자 하나가 잘못 찼는지 발목을 절뚝거리고 있었다. 남자 앞이라 애써 덤덤하게 참는 것 같긴 했지만.
결국 세화는 참다못해 양해를 구하고 기계에 동전을 넣었다.
드디어 위잉 거리는 소리를 내며 표적이 내려오는 걸 보다가 다리를 풀었다.
"세화야..진짜 괜찮아? 나 진짜 믿고 있는데.."
"저도 알고 있었어요. 그냥 오랜만에 몸 좀 풀까 하고."
남자가 펀치 기계를 쓸 것 같은 낯선 광경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멈춰 서서 이쪽을 바라봤다.
'관중은 환영. 봐주는 맛이 있어야지. 이제 다리는 풀렸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자세를 잡은 뒤.
상체를 왼쪽으로 돌리면서 오른발도 땅에 단단히 지탱하고.
시야가 확 바뀌는 걸 느끼며 왼발을 번개처럼 뻗어 표적을 돌려찬다.
많이 애용했던 뒤후려차기다.
빠아아앙-!
덜컹, 덜컹-!
표적이 터져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점수판을 봤지만 최고점수보다는 좀 아래였다.
잘 들어갔는데 역시 힘차이는 어쩔 수 없나.
발차기 때문에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며 하율에게 말했다.
"아, 아쉽네요. 역시 예전만큼은 아니네."
"예전엔 얼마나 더 잘했는데?"
하율은 엄청나게 놀란 듯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순간 '아 나 남자였지' 를 깨닫고 주변을 둘러봤는데 못 믿겠다는 눈빛들이었다.
'하긴 나 같아도..'
"예전이라면..흠. 저 공 같은 거 있죠?"
세화는 아직도 덜렁거리고 있는 표적을 보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응."
"터졌어요."
하율은 세화가 살짝..무서워 짐을 느꼈다.
'진짜인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엄청나긴 해..'
"러시아에서 배운거야?"
"...네. 그..렇죠."
그렇게 우리는 대화를 나누며 학교 지정 의류점으로 향했다.
나는 대충 있는 사실 없는 사실 지어가며 대답하다가 겨우 가게 문을 열었다.
"아이고 어서 와요들."
안으로 들어오자 손님은 없고 구석에 앉아있던 주인아저씨가 벌떡 일어섰다.
"안녕하세요. 연정고 교복 맞추러 왔습니다."
"아아, 그럼 예쁜 아가씨랑 둘 다?"
"아뇨 제 것만 해주시면 돼요."
내 말을 들은 아저씨는 앙큼하다는 듯이 하율을 잠깐 흘기곤 내 치수를 재면서 연신 감탄해댔다.
"몸이 너무 예뻐서 뭘 걸쳐도 잘 살겠네. 어깨 넓은 것 좀 봐."
"감사합니다."
내 치수를 확인한 아저씨는 창고에서 교복을 꺼내오더니 내게 입혔다.
"이래도 예쁘긴 한데..학생, 수선비는 안 받을 테니까 잠깐만 기다려요. 내가 몸에 맞춰서 예쁘게 해줄게."
"예? 안 그러셔도.."
"아니에요, 요즘은 교복도 너무 펑퍼짐~하게 다니면 모범생으로 봐서 괴롭힌다고 하더라. 물론 학생은..그런 건 안 당할 것 같지만. 아 오해는 하지 말아요!"
아저씨는 내 왼팔을 보더니 이어나가던 말을 부정했다.
'아무튼 공짜로 수선하면 나야 좋지.'
"그럼 부탁드립니다."
"알겠어요, 그럼 저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면 금방 해올게."
오지랖을 부리시긴 했지만 그래도 착한 사람 같았다.
하율과 나는 나란히 놓여있는 의자에 앉으려다 가게에 빼곡히 걸려있는 옷들을 보곤 잠깐 구경하기로 했다.
사실 전적으로 하율의 뜻이었지만 나쁜 생각은 아니었기에 나도 대충 훑어봤지만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세화야, 이건 어때?"
"저랑 안 어울릴 것 같지 않아요?"
"이거는?"
"그것도..좀."
내가 옷들을 자꾸 퇴짜놓자 하율이 울상을 지으며 점퍼 같은 걸 하나 가져왔다.
"이게 마지막이야."
"누나 저한테 많이 입히고 싶은가 보네요."
"이..건 진짜 마지막. 진짜 보자마자 딱 네꺼 같더라."
하율이 건넨 점퍼를 만져보니 겉의 천은 비단같이 부드러웠고 양쪽 가슴팍엔 실로 금색의 용이 수놓아져 있었다.
"스카잔이네요?"
"어, 알고 있네? 이런 건 남자들이 잘 모르는데."
"저도 알고는 있어요. 근데 좀 두꺼워서 더울 것 같은데."
"그, 럼 밤에만 입으면. 그때는 시원하니까.."
스카잔을 들고 애처롭게 날 바라보는 시선이 안쓰러워 한 번 입어보기로 했다.
걸쳐보니 상당히 큰 사이즈였다.
잠깐 방심하면 어깨가 내려가거나 아예 허리까지 내려왔다.
그래도..
"괜찮네요."
"그렇지? 이건 누나가 사줄게."
"..제가 살게요. 아니 그렇게 돈 쓰면 언제 모으려고 그래요."
너무 받기만 하는 내가 부끄러워져 저절로 책망하는 말이 나가버렸다.
나는 갑자기 또 추욱 쳐진 하율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미안해서 그래요. 골라준 거 고마워요. 잘 입을게."
그러자 하율의 축 처졌던 눈매가 확 치켜올려 갔다.
"아이고 많이 기다렸지요!"
하율과 실랑이를 하던 중 수선을 끝냈는지 아저씨가 내 교복을 들고 나왔다.
"아닙니다. 이것도 계산할게요."
나는 내가 입고 있던 스카잔을 벗어 계산대 위에 올려놨다.
그러자 기어코 자기 지갑을 찾는 하율을 말리며 계산을 마치고 가게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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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날이 저물어 해가 잠을 자러 갈 때쯤 우리는 편의점 근처에서 헤어졌다.
"누나 들어가요."
"세화 너도 잘 들어가. 오늘 진짜 재밌었어. 그리고 새로 산 옷..잘 어울리더라."
"누나가 골라준 '옷' 이요?"
하율이 자기가 고른 옷을 생색내는 걸 보자 귀여워서 '옷' 이라는 말에 강조를 했다.
그러자 하율은 말을 얼버무리며 얼굴이 빨개지더니 급하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하율을 보내고 손에 든 쇼핑백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근처에 있는 마트로 문신을 가릴 토시와 테이프를 사러 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사 온 뒤 집에 와서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이제 준비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