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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화 〉학교(4) (20/94)



〈 20화 〉학교(4)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햇볕 아래.

미나는 햇빛을 머금은 은색의 머리를 꼬며 감탄인지 모를 말을 꺼냈다.

"그 정도로 싸움을 잘해요? 우와. 남자가 그렇게 자신 있게 말하는  처음 봤어요!"
"뭐, 그렇죠? 지금도 웬만하면 다 이길 텐데."

세화는 호박색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확신에 차 대답했다. 진실로 그리 믿었다.
하율과 있을 때 펀치기계에 발차기를 날려본 결과 이 정도 몸이면 꽤 쓸만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기술이야 천천히 적응시키면 되고. 운동신경도 나쁘지 않아. 힘은..좀 부족한  흠이긴 한데 문제는 없지. 다시 선수할 거 아니면.'

미나가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물었다.

"진짜? 아ㅡ.근데 오빠가 거짓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미나의 말을 들은 세화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못 믿겠으면 말고요. 근데 언제까지 오빠라 부를 거에요? 이제 서로 동갑인 거 알 텐데?"
"앗. 그러게. 그럼 말 놓을게, 세화야."

미나는 깜빡했다는 듯 배시시 혀를 내밀었다.
 놓으란다고 바로 놓는 것도 미나답다고 생각하며 세화도 피식 웃었다.

"진작에 이렇게 했어야지. 싸움 잘하는  왜?"
"음..그게."
"빨리 말해. 사람 궁금하게 해놓고 도망가면 사형이야."

세화는 눈을 내리깔며 장난스럽게 협박을 빙자한 재촉을 해댔다.
그래도 미나는 말하길 주저하다가 세화의 표정이 슬슬 날카로워지자 입을 열었다.

"이게 사실..아는 언니한테 부탁받은 거거든. 약간 힘쓰는 사람이 필요한가 봐."
"그러면 여자를 쓰면 되지 왜 나를?"

미나는 자기가 먼저 말해놓고도 막상 털어놓기 미안했다.
사실 클럽 가드 일이라고 하기가. 그것도 번화가 중심지의 클럽에서 진상 부리는 남자 손님을 상대해야 한다고.

'시아 언니가 닦달해서 물어보긴 했지만..아무리 봐도 고등학생이 할만한 건 아니야.'

다시 생각해보면 통성명 한 건 오늘이 처음에다가.
아무리 세화가 그런 거 잘할 거 같은 느낌이라도.
아직 어린 남자애한테 그런 일을 소개해 주는  아니었다.

하지만.

'좀 사는 집 애면 일 같은 거 안 한다고 단칼에 거절할 텐데...그렇게 형편이 좋은 건 아닌가.'

미나 자신도 그런 부분을 잘 알았기 때문에 고민하다 결국 결정을 내렸다.

"미안해. 괜히 말했나 봐. 솔직히 네가 남자애만 아니었어도 말은 꺼내볼 텐데."
"나는 상관없다니까?"
"안돼.  부모님도 걱정하실 거야."

세화는 답답해 죽을 것 같았지만, 미나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어조로 타일렀다.

'이정도 말했으면 떨어져 나가겠지. 시아언니한테는 그런 일 할 남자애는 없다고 적당히..'

"부모님 없어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해."
"...아..그래?"
"그렇게  들이는 거 보니까 말하기 힘든 건가 봐?"

세화는 낯빛 하나  바뀌며 높낮이 없는 어조로 반론했다.

미나는 침묵에 잠겼다.

뭘까. 저런 말을 꺼내면서도 왜 저렇게 태연하지.
처음으로 세화가 낯설었다.
저 여유로워 보이는 외면 안에 뭔가 숨기는 거 같아서.
이 이상으로 파고들면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직감이었다.

미나는 뭔가 묘한 감정에 휩싸이는  느끼며 안절부절하게 말했다.

"미안해.."
"뭐라는거야. 도대체 왜 이렇게 미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지.."

세화는 무표정이었던 입가에 웃음을 띠고는 게슴츠레 눈을 뜨며 미나를 바라봤다.

'저러는  몸에 밴 건지, 의도하는 건지..고등학생 맞아?'

예상치 못한 공격을 받아 말문이 막힌 미나에게 세화는 피곤한 듯한 눈매를 예쁘게 휘며 미나를 위로했다.

"진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나중에 생각 있으면 말해주고. 졸리니까 좀 잘게. 선생님 오면 깨워줘."

미나는 뭔가가 마음을 간질거리는 걸 참으며 장난기를 뺀 목소리로 낮게 대답했다.

"응..."

**

'아 따뜻하다.'

따뜻한 햇빛과 교실의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조화되어 극도의 안정감이 느껴진다.
눈을 감았다.
잔다고 미나에게 말하긴 했지만 진짜 그럴 생각은 없다. 첫날부터 찍힐 일 있나.

'그런데 수업 종이 쳤는데도 선생이 안 오네. 조금만 누워있을까.'

등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포근하다. 그렇게 스며드는 수마에 빠져들려는 도중에 반이 시끄러워졌다.
.
.
.
종이 치고도 선생님이 오랜 시간 들어오지 않자 아이들은 각자 떠들기 시작했다.
새로 나타난 전학생을 주제로.

엎드려있던 세화는 거기에 귀를 기울였다.

"얼굴 봤어? 미쳤더라."
"응. 근데 성형한 거 같지 않아?"

'성형 안 했어 병신아.'

"쟤 예쁘긴 한데. 좀 그런..느낌 나지 않냐?"
"뭐 노는 애? 나긴 나지. 눈에 이상한 스티커 같은 것도 붙여놨던데."
"..꼬셔볼까?"
"넌 안돼. 개 빻아서. 상식적으로 쟤가 너한테 대주겠냐?"

세화가 푹 자는 것처럼 보였기에 아이들은 안심하고 작게 떠들었다.
워낙 작게 말하는 탓에 당사자들 빼곤 들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그래. 실컷 떠들어라. 면전에다 대고 지랄만 안 하면 봐줄게.'

...그렇게 시간이 좀 더 흘렀을까.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선생님은 언제 들어오는 걸까.
관대한 마음을 먹은 게 무색하게도 갈수록 나를 향한 욕망인지, 질투인지 모를 말은 점점 심해졌다.

계속 엎드려서 저 소리를 듣고 있자니 속에서 신물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슬슬 일어난 척을 할까 하고 기지개를 피며 몸을 곧추 세웠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웅성거리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다 급하게 고개를 돌리는 애들도 보였다.

나를 향해 쏘아지던 관심을 잘라내는  성공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책상에 다시 퍼졌다.
내가  좋게 일어났는지, 처음 보는 남자가 뭘 품에 안고 교실 안에 들어왔다.

"미안하다. 노트북에 문제가 생겨서 고치느라 늦었네. 반장, 인사."

고집스러운 인상의 중년에 가까워 보이는 남성. 아무래도 이번 과목 선생님인 거 같다.

'아 이렇게 늦게 들어올 거면 조금이라도 자볼걸. 괜히 기다리다가.'

괜히 소중한 수면 시간을 뺏긴 거 같아서 입만 삐죽거리다가 갑자기 애들이 앞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선생님이 인사하라 했었구나. 딴 생각 하다가 못 들었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인사를 안 하네? 반장.  뭐야."

내가 인사를 안한  봤는지 선생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나를 쏘아봤다.
그러자 맨 앞의 여학생이 즉시 대답했다.  안경 낀 애가 반장인가 보다.

"아, 오늘 온 전학생입니다. 러시아에서 왔다고.."

"거기 전학생. 딱 보니 혼혈 같은데 한국어 못해? 아니면 부모님 중에 한국 분 없어?"

선생은 단칼에 반장의 말을 잘라버리고 나를 노려봤다.
나는 인사 안 했다고 지랄하는 선생은 오랜만이라 생각하면서 차분히 질문에 답했다.

"할 줄 압니다."
"근데 왜 인사 안 했어?"
"인사라는 단어를 잘 못 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내 말에 미나는 어이없다는 듯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어쩌라고. 일단 외국인 방패는 써먹어야지.'

내가 사과를 했어도 선생은 내게서 여전히 시비거리를 찾는  하다가 눈을 사납게 뜨며 말했다.

"너 이름이 뭐야?"
"류세화입니다."
"류세화. 일단 당장 눈에 그거 떼. 보기 안 좋다."
"..뗄 수 없는 겁니다."

'이걸 어떻게 떼냐. 문신이라고 말하기도 그렇고. 피부라도 잘라내면 가능하겠지.'

"장난해? 너 지금 반항하는 거야?"

곤란한 상황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내가 이도저도 못하고 있자 선생이 씩씩거리며 내가 앉아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하..갑자기 왜 지랄인데. 그리고 샤샤 이 새낀 하필 눈에다 해놔서 씨발.'

그렇게 가까이서 본 선생의 158 정도 되는 작은 키. 내가 앉아있는데도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너, 당장 일어나. 이게 얼굴 좀 반반하다고 선생을 무시해?"

그 말에 내가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남과 동시에 선생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종국엔 선생이 나를 한참 올려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선생, 정민호는 세화란 애를 보며 생각했다.

자신의 볼품없는 몸과 달리 여자들이 환장해댈 외모.

가만히만 있어도 여자들이 다가가 떠받들어 줄 것이다.

자신은 남자인데도 여자한테 사정사정해야 겨우 만날 수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노총각 히스테리를 학생에게 부리고 있었지만 본인도 몰랐다.


민호와 세화는 어쩔 줄 모르는 미나를 사이에 두고 눈빛을 교환했다.
얼음장 같은 분위기가 교실에 흘렀다.

애들은 조용히 이쪽을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뒷문 쪽에 앉아있는 문신녀 듀오 또한 재밌다는 듯 눈을 빛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떼."
"떼지 못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너 지금 나한테 반항해?"

"아닙니다."

'뭐 씨발 허리라도 숙이랴?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별 같잖지도 않은 거로 시비 거는 게 좆같았다.
세화의 표정이 싸늘해짐과 동시에 선생의 얼굴이 화난 것처럼 붉어졌다.

그러던 중 민호가 갑자기 손을 뻗어 세화의 오른쪽 눈가를 문질렀다.
피할 가치도 없는 동작이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이거 지우는  그렇게 어렵냐?..뭐야 이거. 왜 안 지워져."

학생들은 세화의 하얀 눈가가 거친 손길에 쓸려 붉어지는 걸 보며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민호는 한참을 손으로 문질러대다 포기하고는 기가 차서 말했다.

"너 이거 문신이야?"
"..맞습니다."
"참. 어이가 없네. 진짜 학교가 미쳐 돌아간다. 남자애가 이러고 다니는 걸 보면."
"죄송합니다. 러시아에 있을 때  건데.."
"야, 됐어.  부모님 모셔와. 어머니가 별말 안 했어? 아들이 이렇게 싸 보이게 돌아다녀도 별말 안 하디? 응? "

짙은 악의가 담긴 말을 듣자 안에서 뭔가가 두둑하고 끊어졌다. 눈이 벌겋게 충혈되는  느끼며 주먹이 떨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에 저기 앉아서 재밌게 바라보던 혜민이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왔다.

"쌤. 자기 나라 있을  했다잖아요. 같은 남자면서 어린 남자애한테 너무하네. 딱 보니까 가리기도 힘들겠구만. 자, 자 이제 수업 시작합시다 쌤."

혜민이 웃으며 말리자 민호는 혜민을 보다가 세화를 노려보곤 몸을 돌리며 교탁에 섰다.

"그럼 다들 책 펴."

선생이 수업을 시작한 한참 뒤에도 짙은 감정이 가시지 않고  머리를 맴돌았다.

아까 상황을 곱씹으니 다시 열이 뻗친다.

'문신 듀오도 가만히 놔두면서 왜 나한테만 지랄인지 모르겠네.'

내가 억울함을 느끼며 입술만 깨물고 있을 때 미나가 옆에서 슬며시 쪽지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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