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샌드백(1)
미나가 건넨 아무렇게나 찢어진 작은 종이.
그 안에 귀여운 손글씨로 쓰여 있는 글자를 보자 작게 미소 지어졌다.
ㅡ괜찮아?ㅜㅜ
나는 고개를 들어 아직도 열심히 수업 중인 선생을 흘끗 보곤, 오른쪽으로 슬며시 손을 뻗어 미나의 펜을 가져왔다.
확 잡아채지 않고 미나의 손까지 잡아가면서 살살.
그러자 미나는 커진 눈으로 날 바라보다 어색하게 머리를 꼬았다.
아무렇지 않게 펜을 놀려 미나가 건넸던 쪽지에 답장을 적었다.
ㅡㅇㅇㄱㅊㅋㅋ
성의 없는 초성만 적은 쪽지와 펜을 미나에게 돌려주자 미나도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내가 괜찮아 보였던 걸까.
그제야 미나도 앞을 바라보며 수업에 집중했다.
끓어올랐던 화가 겨우 가라앉으며 차분해지는 감정으로 머리를 식혔다.
첫날 부터 이딴 개지랄을 받을 줄이야.
내가 여기선 보호받아야 할 '남자' 니까 직접적인 터치는 없을 줄 알았는데.
'같은 남자라 그런가. 손 속에 거침이 없네.'
안 봐도 알 것 같은 붉어진 눈가를 매만지며 수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화장실로 가서 거울을 봐야 할 것 같았다.
저 맨 앞에서 수업 중인 새끼도 꼴 보기 싫어 죽을 것 같고.
'그러고 보니..혜민이었나. 정혜민?'
처음엔 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던 시선이 마음에 안 들었었는데 의외로 사람이 괜찮아 보인다.
먼저 나서서 날 도와주기도 하고.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으니 뭔가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겠지만 그 정도야 뭐.
'좀 친해져도 괜찮겠는데.'
무심하게 혜민이 앉아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혜민도 수업 같은 건 듣지도 않고 있었는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혜민이 웃으면서 손을 이리저리 흔들자, 나는 살짝 웃어준 뒤 고개를 돌렸다.
"그럼 다음에 보자. 그리고 뒤에 너. 류세화."
어느새 수업을 끝냈는지 선생이 노트북을 내려놓으며 나를 불렀다.
"예."
"다음에는 인사 똑바로 해라. 첫날이라 봐주지만 다음은 없어."
'씨발새끼가. 인사는 받을 사람이 받는 거지. 내 부모님 언급했을 때부터 넌 선생취급 안 하기로 했다.'
부글부글 끓는 속마음과는 별개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러시아어로.
"나도 이번엔 봐주지만 다음엔 죽여버릴 수도 있어. 개 좆같은 땅딸보 새끼야."
반 전체가 당황한 듯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미나는 아예 사색이 되어 날 바라봤다.
"뭐? 너 뭐라 한 거야. 네 나라말로 나 욕했어?"
"아 죄송합니다. 아직 한국어가 서툴러서 저도 모르게. 다음엔 주의하겠습니다."
선생은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홱 돌리곤 교실을 나갔다.
곧이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마자 미나는 낮으면서 다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왜 그래?"
"부모님 건드리는 게 좆같아서. 내가 다른 건 다 참겠는데 그런 건 못 참거든."
미나는 아차 한 듯 동공이 흔들리더니 작게 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래도..너무 그러지 마. 너만 힘들어져."
힘이 빠진 듯한 미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반을 나가려고 하자, 수문장처럼 문을 지키고 앉아있던 혜민과 수영도 일어나 호들갑을 떨었다.
"세화야, 괜찮냐? 아 저 미친 새끼. 지보다 어리고 예쁜 남자애 왔다고 히스테리 부리는 거야. 너무 마음 쓰지마."
"양호실 갈래? 내가 데려다줄까?"
살짝 고개를 저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신경 꺼도 돼. 그리고 혜민."
"어."
"고맙다."
나는 살짝 웃으며 나지막하게 말하고는 곧바로 화장실로 가기 위해 교실을 나왔다.
쉬는 시간이라 다 놀러 나왔는지 복도엔 학생들이 북적거렸다.
언제 들어도 낯 간지러운 수군거림을 받으며 묵묵히 걸음만 옮겼다.
"야, 쟤 뭐야? 옆 반 전학생 왔나 봐."
"와..미쳤다."
입을 헤벌리며 바라보는 시선을 뒤로 한 채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봤다.
역시나.
레터링이 새겨진 눈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 씨발..좆같네.'
대충 수도꼭지를 틀어 나오는 물로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반으로 돌아가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전보다 침울해진 표정을 지으며 서 있는 담임선생님이었다.
***
조금 전.
승민은 교무실에서 쩔쩔매며 화를 내는 남자를 달래고 있었다.
전에 자신의 교실로 수업을 들어갔던 민호쌤 이었다.
"민호쌤..좀 진정하고.."
"진정하게 생겼어요!? 무슨 그런 양아치가..하. 승민쌤. 남자애가 문신에, 심지어 교복도 줄였더만. 그런 게 학교 명예 실추에요."
"네네..일단 들어가세요. 또 수업 들어가 하셔야 하잖아요."
그 난리를 치고 얼마후.
승민은 반으로 돌아가려던 세화를 교무실에 데려왔다.
"세화야 이거 선생님 파우더인데, 한번 눈가에 발라봐."
"음..네."
세화는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파우더를 받아 눈가에 발랐다.
너무 이상하다. 새하얀 겉면에 노란색이 칠해져 있으니 광대 같아 보인다.
"그..반창고도 한 번."
..소용없었다. 세화가 눈을 감으니 애써 붙여놨던 반창고가 찌그러져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돼버렸다.
승민은 세화의 레터링을 가리는 걸 포기하고 다른 선생님에게 양해를 구하기로 했다.
"알았다..다른 데만 잘 가리고, 반으로 돌아가 있어."
승민은 그렇게 말한 뒤 양손을 들어 얼굴을 싸맸다.
세화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교무실에서 나갔다.
**
"야 미나! 너 세화랑 안 사귀는 거 맞지? 남자친구 아니지?"
엄청나게 들뜬 혜민이 흥분하며 방방 뛰자 미나는 풀이 죽은 채로 말했다.
"웅..잠깐 만난 게 다 이긴..해."
"좋아. 야, 이수영. 봤냐? 아까 세화가 나한테 고맙다고 웃는 거 봤냐고!"
"에휴. 이 병신은 벌써 모텔까지 갔네."
수영이 한심하게 그녀를 쳐다보자 혜민은 자신의 중지를 자랑했다.
"어, 꺼져. 나는 백마 꼬실 거야. 지는 타이밍 놓쳐서 부들거리죠?"
"씨발..아 나도 도와주려 했는데."
미나는 둘에게 꿈 깨라고 비웃어주고 싶었지만 그러진 않았다.
세화가 겉으로는 자기들 이랑 동류 같아 보일지 몰라도, 몸을 함부로 굴리고 다니는 남자는 아니다. 아마도.
'서로 이름 안지 하루도 안 됐지만..'
"미나야. 너 세화 전화번호 아냐?"
"응? 아니?"
갑작스러운 혜민의 말에 미나가 당황하자, 혜민은 입꼬리가 찢어져라 웃었다.
"나이스. 경쟁자도 아니었네. 수영, 이따가 세화 데리고 담배 하나 피자. 번호도 물어볼 겸."
"웬일로 네 대가리가 돌아가냐..가 아니지 빡대가리 년아. 걔가 담배 피는지 안 피는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남자애한테 다짜고짜 그러면 너 존나 안 좋게 볼걸. 차근차근 물어봐야지."
"개소리 노. 걔가 그런 거 신경 쓸 거 같냐?"
혜민과 수영이 서로의 가슴에 있는 도깨비를 뽐내며 다투던 그때.
드륵.
문이 열리며 세화가 들어왔다.
세화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의아함을 띄웠다.
미나랑 혜민, 수영이 삼각대형을 이루고 옹기종기 서 있어서.
'왜 이렇게 모여있어?'
***
"그러니까..나 담배 피우냐고?"
"아! 나쁘게 생각하진 마. 그냥 세화 너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 그래. 진짜 나쁜 의도로 말한 거 아니다?"
적잖이 황당했다.
안 그래도 하루 종일 치여서 심신이 미약한 상태인데, 여자애가 와서 담배를 같이 피자 하니.
'그러고 보니 여기는 남자가 그런 거 들으면 안 좋은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일단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하다.
나도 흡연자기도 하고.
근데 오늘은 좀 많이 지쳤다.
"피긴 하지. 근데 오늘은 아닌 것 같네. 좀 피곤해서."
"아. 그렇네. 그 미친 새끼 때문에 개씨..하하."
혜민의 걸쭉한 욕설이 튀어나오려다 쏙 들어간 순간.
수영은 말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세화야! 그럼 번호 좀 줄래?"
"어."
당연히 그 정도는 줄 수 있지 하며 즉답했다.
둘은 희희낙락 하며 핸드폰을 내밀었고, 미나는 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핸드폰을 주고받으며 번호교환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미나도 쭈뼛쭈뼛 다가와 내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야, 너 번호 왜 줬어?"
"안될 거 없잖아?"
"아니..그래도 여자애들인데. 그렇게 쉽게?"
'네가 뭘 걱정하는진 알겠는데, 나한텐 그런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단다.'
걱정스러운 말로 우려하는 미나를 제지하고 웃음기를 띄며 말했다.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나 지켜주던가."
"..놀리지마."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는 미나를 보며 또 웃었다. 이제야 전에 놀림당했던 복수를 하네.
이쪽 세계에서 남자가 지켜달라 하면 여자는 설렘을 느낀다는 걸 알고 의도한 행동인데 다행히 잘 먹힌 듯했다.
비록 의도대로 되진 않았어도 큰 성과였다.
그렇게 아까부터 나를 잠식해가던 성난 감정을 잠시라도 몰아내며 버티다가,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고역이었다.
'진짜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고등학교 수업이 이렇게 어려웠나?'
하긴 공부랑은 담쌓고 운동만 했는데 쉽고 어렵고를 알겠나.
내가 가방도 가져오지 않은 덕분에 맨몸으로 일어나 교실을 나가려 하던 도중.
"세화."
미나가 나를 부른다.
"왜?"
"집도 가까운데 같이 갈래?"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하다가 날 보며 눈을 희번덕대는 문신듀오를 보고 머리를 쓸어넘겼다.
뭔지 대충 알겠음에도 '미나가 나한테 왜?' 라는 의아함이 들었지만.
"좋지. 너 집까지 어떻게 가? 오늘은 좀 걸어가고 싶은데."
"올~나도 걸어가. 역시 통하는 게 있다니까?"
그새 또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미나를 보자, 내 안에서 낯선 감정이 살짝 치고 들어왔다.
이상함을 느끼며 미나와 함께 교실에서 나가려 하자 혜민이 말을 걸었다.
"둘이 같이 가?"
"엉. 세화랑 나랑 집 가까워서."
"..흐음. 그래 일단 잘가고..다음에 보자."
문신 듀오와 인사를 나누고 학교에서 나와 사거리를 지나며.
'도보로 가면 건물들이 많구나. 택시 타고 와서 잘 몰랐네.'
강남 중심가의 고층 건물들까진 아니어도 꽤 높은 건물들이 빽빽하게 세워져 있다.
"어때? 우리 동네랑은 다르게 사람 진짜 많지?"
"많네. 학원도 많고. 학교 주변이라 그런가?"
미나의 말에 대답하면서도 눈으로 부지런히 무언가를 찾았다.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나 보다. 나도 모르게 말이야.
"세화야, 뭐 찾는 데 있어?"
계속 두리번거리는 나를 보며 미나가 물어왔지만.
저것을 본 순간 내 안에 쌓여있던 울화와, 억제하고 있던 그리움이 터져 날 고양시켰다.
그게 내 입을 막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바로 저 건물 간판에 네온사인으로 빛나고 있는 글자 때문에.
<스트레인 이종격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