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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화 〉샌드백(2) (22/94)



〈 22화 〉샌드백(2)

세화는 뒤에서 미나가 부르는 소리에도 아랑곳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

묘하게 흥분을 띈 눈으로 아무렇지 않게 머리를 쓸어넘기는 손길엔 미약한 떨림이 깃들어 있었다.

 떨림에 담긴 감정을 미나는 알지 못한 채, 세화를 붙잡았다.

"대체 어디 가는 거야?"

미나의 물음에 세화는 어딘가 즐거운 듯한 눈으로 저 건물 간판에 시선을 줬다가, 다시 미나를 바라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거? 격투기 학원이잖아. 설마 저기 들어가기라도 하려는..어..스트레인?"

미나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며  격투기학원의 이름을 뱉고는 동공이 두려움으로 흔들렸다.
안 된다. 저곳은 마주치기 싫은 괴물이 산다.

'오늘 시아 언니  쉬는 날인가…? 제발..안돼에.'

미나가 오들오들 떨고 있을 때 세화는 무성의한 발걸음으로 고고히 걸음을 옮겨 건물 입구까지 도착했다.
그에 미나도 급히 뒤를 따라가며 세화를 설득하려 노력했다.
사실 세화를 놔두고 집에 가도 되지만 그건 너무 추했다.
여자가 남자 앞에서 겁먹어서 도망치는 건데. 남자는 그걸 모를지라도.

"오빠, 아니. 세, 세화야. 너 오늘 많이 쌓여서 그래? 샌드백이라도 치려고? 그건 아니야, 너 다쳐..차라리 우리 집 베게라도 줄게.."

얼마나 당황했는지 호칭도 뒤죽박죽으로 말하는 미나.

아까의 여유는 어디다 내팽개치고 갑자기 토끼 같아진 미나에게 세화는 귀찮다는 듯 말했다.

"거기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인데. 내가 아까 싸움 잘한다고.."
"그런 싸움이랑 이건 달라! 아! 맞아.  손에 상처라도 나면? 그러면?"

세화는 아무  않고 토시를 벗고는 손가락에 감겨있던 붕대를 풀어 미나의 앞에 들어 보였다.

"이미 났으니까 됐지?"

찢어진 피부를 봉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직까지 실 자국이 어지럽게 남아있는 손가락.
미나는 어버버 거리며 세화의 손가락만 바라봤다.

"너..이거 어쩌다가. 아니 고작해야 조금 베이거나 그런 줄..알았는데."
"그러면 붕대까지 감았겠어? 따라오려면 오고, 아니면 먼저 가도 진짜 괜찮으니까 편할 대로 해."

그렇게 말한 세화는 붕대를 버리고 토시를 다시 차면서, 곧바로 건물 입구로 들어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에 미나도 눈을 질끈 감고 성큼성큼 걸어 세화 옆으로 갔다.

"그럼 손가락은 괜찮아? 이거 꿰맨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아, 이거? 많이 아물었긴 했는데. 해봐야   같다."

마지막 설득까지 실패한 미나는 입을 삐죽였다.
무슨 남자애가 저렇담.
무조건 흉터가 남을 것 같은 크게  상처인데.
솔직한 말로 남자가 싸움을 잘하면 얼마나 잘하겠나.
그리고 샌드백이나 치다가 여린 손목만 안 다치면 다행이지.

'하아..모르겠다. 일단 나는 최선을 다했어. 저러다 다쳐도 내 책임은 없지..는 너무 그러네.'

미나가 고뇌에 빠져 끙끙거리든 말든 세화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쏙 들어가자 미나도 따라 탔다.
건물의 크기답게 층수도 많았다.

세화는 수많은 버튼 중에서 7층을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며 웅웅거리는 소리에 몸을 맡기며 생각했다.

'여기 시설은 어떠려나. 샌드백만 넉넉하게 있으면 좋겠네.'

그 땅딸보 선생의 얼굴을 생각하니 피가 끓어오른다. 동시에 오랜만에 맛볼  같은 타격감에 대한 기대도.

ㅡ띵. 7층입니다.

"가자."
"..응."

세화는 두꺼운 철문이 열리자 앞으로 가서 미나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나오자마자 앞에 보이는 격투기학원의 문을 열어 익숙한 풍경을 느꼈다.

들어서자마자 살짝 풍겨오는 땀내음.

팡! 팡!

남자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샌드백 터트리는 소리.

온통 검은색으로 칠해진 천장의 약간씩 달려있는 전등 때문에 학원의 분위기가 한층 더 진중해 보였다.

그리고 저기 땀흘리며 운동하고 있는 몇십 명의 남녀가 반바지에 스포츠 브라만 입고 열심히 운동하는 광경이 보기 좋..어.

'남'녀??

'뭐고 씨발..남자가 스포츠 브래지어를 차고있..'

오. 하느님. 진짜 역겨워서 죽을 거 같아요.

'아무리 이런 세계라도 남자가 씨발.'

제발 누가 내 눈을 뽑아줬으면 하는 심정을 억누르고 미나와 함께 접수처로 갔다.

운동하고 있는 사람들과 똑같이 입은 여자가 나를 보더니 눈을 반짝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오셨나요?"
"네. 배우는 건 말고 샌드백만 칠 수 있을까요?"
"별로 추천은 안 하지만 가능하긴 합니다. 그럼 옆에 여성분 등록 도와드리고 안내해드릴게요."
"아뇨. 얘가 아니라 제가 할 거예요."
"샌드백만 치시는 게 옆에 분이 아니라..본인이세요?"

눈에 띄게 황당해하던 여자는 나에게 양해를 구한 뒤 학원 구석에 있던 방으로 들어가 누군가를 데려왔다.

희끗희끗한 흰색이 보이는 머리의 중년여성.
주먹의 겉면엔 거친 굳은살이 박혀있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슴푸레 짐작을 가능케 했다.
여자는 대충 나를 훑어보고는 묵직한 저음의 목소리로 자기를 데려온 여자에게 물었다.

"...이 분이야?"
"네..관장님. 어떻게 할까요?"
"합격. 무조건 합격. 바로 등록시켜드려."

사람 죽일 듯한 무서운 인상의 관장은 여자의 손을 단단히 움켜쥐곤 귓속말로 속닥거렸다.

"예지야..저런 애가 우리 학원에 다닌다고 생각해봐..난리 나겠지? 혹시나 다치지 않게 잘 지켜보고.."

그렇게 관장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떠나가고, 예지라 불린 저 여자는 의지를 불태우더니 곧바로 나를 안내했다.

"여기가 락커입니다. 그리고 이거는 운동복이랑 스트랩인데.."
"..스포츠 브라는 안 받을게요."

운동복이라 불린 정체를 보고 기겁했다.

허벅지 중앙까지 오는 짧은 반바지는 괜찮다.

근데 씨벌.

'브라 차고 운동할 바에야 나가 뒈지고 말지.'

예지를 내보낸 뒤 반바지만 갈아입고 토시를 벗어 손에 스트랩을 둘둘 말았다.

그러고 나서 밖으로 나오니.

처음부터 따가웠던 시선이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뜨거워졌다.

 차림 때문인가, 문신 때문인가.

내가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글러브를 끼고 있을 때, 미나가 아직도 안절부절하며 뭔가를 찾는 듯한 눈을 굴리며 다가왔다.

"너 진짜 괜찮겠어?"
"글쎄. 오랜만에 해서 잘 모르겠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는 미나를 놔두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한편, 세화를 안내해준 예지는 멀리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처음 보는 존나 예쁜 남고딩이 와서 샌드백만 친단다.
차라리 여자가 그러면 이해라도 하지. 남친 앞에서 멋진 모습 보여주고 싶을테니까.

결국 관장의 허락 하에 일사천리로 그의 회원등록을 마치긴 했지만 걱정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찜찜한 눈으로 락커쪽만 바라보다 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 놀라버렸다.

'뭔 문신을 저렇게 많이 했대. 그래도 조땐다..다리 하얀 거봐. 도와주는 척하면서 살짝 꼬실까.'

예지가 자신의 임무도 잊은 채  몸매랑 얼굴만 감상하던 도중.





세화는 스트레칭을 마치고 샌드백 앞에서 자세를 잡았다.

'너무 오랜만이다. 그리웠어 친구야. 그럼 이제 시작.'

양팔로 가드 자세를 잡으며 왼손은 샌드백에 닿기 전에 거둬서 잽의 구색만 갖춘 뒤 오른팔로 훅을 날렸다.
순간적으로 몸 전체를 돌리며 실려진 힘으로 뻗어 나가는 주먹이 앞의 모래주머니를 두드려 살벌하게 터지는 소리를 냈다.

팡, 팡, 팡!

이 맛이다.

파워는 많이 줄었을지 몰라도 몸이 너무 잘 따라와 준다.

'기특하다 샤샤야. 네 몸이 운동신경은 좋아서 형이 오늘 스트레스 좀 푼다.'

무아지경에 빠져 주먹뿐 아니라 미들킥까지 간간이 섞어가 날린 덕분에 내 몸이 땀에 젖어갔다.

그렇게 한참 샌드백을 괴롭히다 어느 순간 이곳이 조용해진 걸 느끼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왜 정적이 흐르는지 뒤를 본 순간 바로 알수 있었다.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남 구경만 하고 있네.'

여기 회원들의 뚫어지라 나를 쳐다보는 시선에 괜히 허리를 숙여 땀에 젖은 얼굴을 옷으로 닦았다.
탄탄한 복근이 드러나며 여자들의 입에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흡! 성수 미친.."
"하."

멀리서 작게 들려오던 이상한 잡소리는 뒤로 한  미나에게 다가가 웃으며 물었다.

"어땠어?"
"..세화 너. 싸움 잘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였어?"
"내 겉모습만 봐도 그래 보이지 않아?"
"아니 나는 진짜 길거리 남자애들이랑 싸우는..그런 수준인  알았는데. 너 뭐야 대체?"

얼마나 놀랐는지 미나의 푸른 눈동자가 거친 파도처럼 일렁였다.

'뭐긴 뭐야. 전직 프로지.'

걱정을 많이 했었다. 하율과 있을 때 대략적으로 내 수준을 가늠해보긴 했지만, 그때는 아주 잠깐이었고.
만약 내 수준이 아주 연약한 여자 정도만 간신히 이길  있는 정도 다, 하면.
그땐 내가 보호 받아야 할 여기 남자로 전락해버리는 게 너무나도 끔찍해서.

'근데  정도는 아니고..생각보다 정말 얘 몸이 좋아.'

내가 이 몸의 리뷰를 머릿속으로 남기며 은은히 웃고 있을  미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선생님은 진짜 때리면 안 돼. 네가 그런 애 아니라는  알겠는데.."

말 같지도 않을 소릴 하는 그 인형 같은 얼굴을 싸늘하게 노려보자 미나는 즉시 입을 다물었다.

저러니까 좀 낫다. 쓸데없는 소리만 안 하면 참 예쁜 얼굴인데.

고개를 저으며 슬슬 정리하고 나가기로 마음먹으며 글러브를 벗는 그때.

낯선 목소리가 미나를 불렀다.

"잘 지냈어 미나야? 그런데 일할 남자 없다 하지 않았니? 아까 보니  분이 아주 인상적이던데..연락을 안 했네?"

뒤에서 이름을 불린 미나는 벌벌 떨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제발. 제발. 시아 언니만 아니기를. 부처님 착하게 살 테니까  번만 봐주세요..'

고우면서도 거친 야성미가 담겨있는 음색.
애써 부정하지만 사실 미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잘 알고 있었다.

아주 잘.

천천히 얼굴을 돌리고 있는 미나를 세화가 흥미롭게 쳐다봤다.

'개웃기네. 누군진 모르겠는데 왜 저렇게 무서워해.'

그에 재미를 느낀 세화도 미나를 부른 여자를 자세히 눈에 담았다.

고양이상의 작고 예쁜 얼굴에 오른쪽 눈가 끝에 찍힌 눈물점. 흑발의  생머리.

키는 미나보다 살짝 컸으며 체형도 미나랑 비슷하지만 좀 더 볼륨감 있는 몸매에 주먹에 감은 스트랩이 인상적이었다.

'여기서 운동하는 여자인가 보네.'

미나가 고개를 반쯤 돌리고 멈춰있자 여자가 미나의 턱을 잡고 자신을 보게 했다.

'오. 존나 터프하네. 저래서 미나가 무서워하는 건가?'

"미나야. 언니가 부르잖아."

"네..네. 언니 안녕하세요..흑."

"옆에 남자분은 누구셔?"

"오늘 전학  친구에요.."

"그래?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아라고 합니다. 23살이고요."

이시아라는 여자가 자신의 이름과 나이를 소개하며 내게 손을 내밀자 나도 그에 맞춰 손을 내밀었다.

"류세화입니다. 18살이에요."

"반가워요. 혹시 말 놔도 될까요?"

"편하신 대로요."

내가 흔쾌히 수락하자 시아는 이것저것 물어왔다.

.

.

"러시아에서 한국 온  얼마 안 됐다는 거네."

"네."

살짝 표정을 눈썹을 꿈틀거린 시아는 러시아에 있을  연신 물어왔다.
당연히 내가 잘 알리가 없었기에 거짓말로 지어내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척 미소를 띄웠다.

그에 시아는 나와 상반되게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며 다가오더니  턱을 잡으며 말했다.


"너, 내꺼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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