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3화 〉샌드백(3) (23/94)



〈 23화 〉샌드백(3)

#1

"너, 내꺼해라."
'.....?'

나는 어이가 없어서 시아의 손에 잡힌 턱을 빼내지도 못한  가만히 있었다.

그도 그럴게, 뭔 씨발 난생처음 보는 여자가 갑자기 내게 돌직구로 고백을 때려 박았으니까.

심지어 여기 세계로 오고 나서 여자가 한 번도 내 얼굴을 잡으며 '넌 내꺼다!' 이런 적도 없으니 사고가 정지될  밖에.

어떻게 할까.
여기서 무슨 반응을 보여야 좋을까.

향후 취할 행동을 고민하는 이유는 시아가 날 보며 반짝거릴 정도로 빛내고 있는 눈 때문이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들 하지. 자기 안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주니까.'

감히 나를  봊집으로 보냐면서 내 턱을 잡은 손을 잡아 꺾어버리기엔 시아의 눈이 너무 맑았다.
나를 보고 성욕에 불타는 눈이 아니라, 돌에 감춰진 보석의 원석을 발견한 듯이 기뻐하는 느낌.
시아가 내뱉은 말과 눈에 비친 감정이 기괴할 정도로 상반되니, 혼란스러워만 하던 도중.

내 쪽을 보며 눈을 한계치까지 크게 뜨곤 입만 벌리고 있던 미나가 시아를 말렸다.

"언니! 남자한테는 그러면 안 된다니까요!!!"

"나는 그런 거 없다. 둘 다 똑같은 사람.."

"아니 그럴꺼면 말을! 좀 오해의 소지가 없게 하던가! 너무 함축했잖아요 진짜!"

미나는 언제 시아 앞에서 벌벌 떨었냐는  작은 손으로 시아의 어깨를 팍팍 쳐댔다.
덕분에 부드럽게 내 턱을 잡고 있던 시아의 손이 나에게서 떨어졌다.
나는 나른하게 눈을 내리깔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내 턱을 매만졌다.

"세, 세화야. 천천히 설명해줄 테니까 오해하지 말고 들어. 시아 언니가 좀..이거거든?"

미나는 쩔쩔매며 내게 말하고는 손가락을 들어 자기 머리에 대고 빙빙 돌렸다.
그러자 시아가 미나를 보며 눈을 불태웠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고 계속해보라고 미나에게 손짓 했다.

"하..그러니까. 시아 언니가 운동만 하고 살아와서..성격이 거칠어. 저번에도 남자한테 이랬다가 신고당하려는  내가.."

"그만."

시아가 제지하자 삼천포로 빠지려던 미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아무튼 세화야. 그냥 언니가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이런 식으로 물어봐. 아..! 맘에 든다는 게 그쪽이 아니라  적으로!"

"도대체 무슨 일인데. 저번에 나한테 말했던 게 이거야?"

자꾸 말을 빙빙 돌리는 게 갑갑해서 채근하듯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하니 미나가 말했다.

"...참. 말 안 해줬었지. 근데 언니 진짜 고등학생이 해도 되는 일 맞아요?"

"하."

"야. 미나. 빠져있어 내가 말할라니까."

끝까지 본론을 말하지 않고 뻐팅기는 미나 때문에 시아와 나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터졌다.

시아는 답답했는지 어,어 거리는 미나를 순식간에 뒤로 제쳐버리곤  앞에 섰다.

덕분에 얼굴이 가까워진 거리에서 시아를 마주 본 나는 헛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았다.
하율과 미나와 비견 될 정도로 작은 얼굴과 오밀조밀 모여있는 이목구비 때문에 고양이처럼 보이는 냉미녀 상.

'이런 여자가 굉장히 터프하게 군단 말이지..참 아직도 낯설다 이 세상은.'

내가 미묘한 눈을 띄며 말없이 있자 시아도 나를 샅샅이 훑어보곤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야. 내가 찾던 인재야."

"언니 세화  그만 보고 빨리 알려줘요..진짜 그러다 잡혀간다니까."

"아, 미안하다. 큼. 다시 정식으로 소개하지. 강남에서 제일 '큰' 클럽 발키리의 가드총괄 이시아다."

시아는 최대한 담담한 척 말하면서도 얼굴에 깃든 자부심은 숨길 수 없었다.
그에 피식 웃으며 계속 말을 잇게 했다.

"많이 궁금할 거다. 왜 강남에서 제일 '큰' 클럽 발키리  가드총괄이 나를? 심지어 나는 남자인데도? 이거 맞지 않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강남에서 제일 '큰' 클럽의.."

"잠깐만요. 불필요한 수식어는 빼고 클럽 이름만 말해주실래요?"

귀여운 것도 한두 번이지. 저 설명을 계속 듣다 보니까 미칠 것 같아서 급히 말했다.
그에 시아는 멈칫하고는 뭔가 마음 상한 듯이 무뚝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러지. 아무튼 '우리' 발키리에서 남자인 너를 가드로 원하는 이유. 우리 클럽은 남자도 많이 와. 사실 당연한 거지. 남자가 없으면 여자도 안 오니까."

짧게만 들었는데도 무슨 말인지 감이 왔다.

"아무튼  때문에..피곤한 일이 많아. 가드가 거의 여자다 보니 남자한텐 손대기가 아주 골치 아프거든. 지금 팀원 중에도 벌써 몇 명은 고소 당할뻔했어."

"그래서 제가 필요하시다?"

"그렇지. 말이 좀 통하는군. 너의 외모와 무력. 내가 찾던 인재에 아주 부합해."

..무슨 삼국지에서 장수 등용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에서야 시아의 행동을 이해했지만 처음엔 정신 나간 여자인  알았다.

여자가 남자의 몸에 함부로 손대는 건 성추행이 성립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서리 쳤다.

'시발..미친  같다. 이제 자연적으로 저런 생각이 드네.'

나는 머리를 넘기며 잡생각을 털어낸 뒤에 말했다.

"이해는 가네요."

"그렇지? 그럼 내 제안은…?"

흠.

괜찮긴 하다.

'어차피 일도 구해야 하긴 했고. 타이밍 좋긴 하네.'

그렇게 시아의 간곡한 요청에 제갈공명의 심정이 되어 출사를 선언하려는 순간.
뇌리에 번뜩이는 생각이 스쳐 갔다.

"그럼 이거 한 가지만 들어주실래요?"

"뭐지? 돈이라면 걱정 마라. 학교도 다닐 수 있게 출근 날짜도.."

"아뇨."

그건 아니고.

"스파링 한 번만 하죠."


#2


검은 스펀지 테두리에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는  안.

시아는 글러브를 끼며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바로 류세화라는 남자애를.

저런 청초한 한줄기 흑장미 꽃 같은 외모로 눈을 내리깐 채 묵묵히 입에 스트랩을 물어가며 손에 감는 모습이 야성미가 넘쳤다.

'흠..스파링이라니. 그것도 고등학생밖에 안  남자애랑.'

역시 아까전에 함부로 얼굴에 손대서 화가 난 걸까.

세화의 스파링 요청을 듣고 나서 몇 번이나 사과했지만 세화는 웃으며 시아를 재촉해댈 뿐, 요청은 거두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당히 봐주자, 남자니까? 내가 잘못했으니까  좀 풀게 맞아주자?

그런  시아의 신념에 통용되지 않는다.

남자든 여자든  수 있는데 까진 해야 한다.

'심지어 링 위에서는 말이지. 미안하게 됐구나. 네가 아무리 뛰어나도..'

나를 이길 순 없을 텐데.

시아를 밑바닥에서부터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올 수 있게  원동력.

피지컬에서 나오는 싸움 실력이다.

한창 격투기에 매진할 때 프로제의까지 받았었는데 이런 자신을  남자애가  위에서 따라올 수 있을까.

그렇게 눈에 연민을 담아 세화를 애처롭게 바라보며 핸디캡 제안을 꺼냈다.

"나는 왼팔은 쓰지 않겠다. 물론 주먹 한정이다."

물론 봐주려는 건 아니고, 세화의 왼손에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어서다.
손가락에 실밥이 아직도 있던데  상태로 주먹을 날리면 상처가 덧날 거다.

시아의 제안에 세화도 살짝 웃으며 답했다.

"저도."
"..."

당연히 안 쓸 줄 알고 말한 건데 '저도' 라니.

설마  다친 손으로 싸우려 했나.

하지만 저렇게 말해도 궁지에 몰리면 저도 모르게 왼손을 쓰게  거다.
나쁘다는  아니었다. 그게 사람의 본능이니.
그때는 적당히 경기를 멈춰야겠다 생각하며 차갑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링을 둘러싸고 구름같이 모여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뭐야, 시아씨가 남자랑 스파링해?"
"언니! 적당히 하고 주짓수로 넘어가! 진짜 기회야! 개 부럽다 진짜."

시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홧홧해졌다.

'뭐라는 거냐. 신성한 링 위에서 무슨...'

응원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을  귀로 흘리며 자세를 잡고 종이 울리길 기다리며 세화에게 말했다.

"만약 타격기가 아니라 다른 종목으로 흘러가도 괜찮나?"

아무리 시아라도 이건 물어보기로 했다.
주짓수 같은 그래플링 쪽으로 넘어가면 서로의 신체접촉이 과도해지니 남자가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까.

"당연하죠. 타격기만 하면 이종격투기가 아니라 킥복싱이지."

세화는 시아의 말에 어이없다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그 웃음을 보며 여자들의 얼굴이 붉어지든 말든 시아는 아주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내가 인정한 사람답군.'

#3


그리웠다.

링 위에 서 있을 때만 맛볼 수 있는 감정의 편린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뛰는 심장.

공포로 생긴 감정이 아닌 몸을 감싸는 긴장감.

그 외 모든 것.

어깨를 돌려보니 아주 잘 움직인다.
그때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어깨를 뻗어 허공에 잽을 날려보지만,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다.
주먹을 날릴 때마다 팔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을 참아가며 몸을 쥐어짜 내던 시절은 이제 없다.

한 가지 아쉬운 게 있다면.

'웃통 까고 반바지만 입고 싸우는 게 진짜 남자들의 싸움인데. 하지만 여기서 벗어버리면..어떻게 되려나.'

비록 상대가 여자라지만, 아쉬웠다.

샤샤가 되고 나서 처음 스파링인데.

그래도..

'됐다. 이것도 감지덕지지.  더 바라겠어.'

땅을 툭툭 차며 불필요한 감정을 떨쳐내고 싸움의 시작을 알리는 종이 울리기만 간절히 기다리던 그때.

"류세화..파이팅."

링을 둘러싼 관중들이 왁자지껄 내는 소음 중, 유독 튀는 맑은 음색으로 날 응원하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그쪽으로 시선을 줘봤다.
익숙한 얼굴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고개를 숙이는 게 보였다.

그에 살짝 웃음을 띠다 한순간에 거둬버리곤 양팔로 가드를 잡았다.

띵ㅡ

종이 울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시아와 내가 앞으로 나와 서로의 글러브를 맞부딪혔다.

"네 예쁜 얼굴에 최대한 흠집 안 나게 해보지."

도발인가 했는데 진지하게 말하는 시아의 표정이 웃겨서 맞받아쳐 줬다.

"저도 그 아름다운 얼굴 다치지 않게 조심해 볼게요."

내가 그리 말하자 시아는 앙다물고 있던 입을 부들거리더니 뒤로 물러섰다.

선공은 시아였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와  얼굴에  주먹을 뻗는 듯하다가 멈칫하곤 오른팔로 주먹을 날려왔다.
그에 나도 왼팔을 안 쓰기로 했던 약속을 상기하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그 뒤에 빠르고 강한 힘을 담아 일직선으로 오는 시아의 주먹을, 뒤로 스텝을 밟으며 피해냈다.

불발된 시아의 주먹에서는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났다.

훙. 훙.

시아와 나의 키 차이 때문에 허리를 숙여 피하는 게 힘들었지만, 어찌어찌 잘 방어해가며 간간이 반격까지 해냈다.

내 긴 다리와 팔에서 나오는 리치를 이용해 날리는 공격이 계속해서 시아의 가드를 두들기자, 시아는 뭔가 결심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하다. 최대한 이렇게까진 안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말한 시아는 내가 주먹을 날렸을 때 살짝 허리를 숙여 피한  양팔로  허리를 감아 들어왔다.

나는 넘어가지 않으려 미간을 찌푸려가면서까지 버텼지만 역시 힘의 차이는 극복할  없었다.

쿵.

결국엔 내가 바닥에 누워있고 시아가 내 배에 앉아있는 상태가 되자 주변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저거 노렸네, 노렸어!"
"세상에! 시아언니도 역시 여자였어!"

그걸 들은  살짝 얼굴이 붉어지는 시아.

저 소리에 시아가 잠깐 정신이 팔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아가 올라타 있는 내 허리를 위로 쳐올리며 순식간에 옆으로 옮겨버렸다.

그 덕분에 자세가 반전되고, 시아가 누워서 다리로 날 휘감고 있는 자세가 되자, 곧바로 그녀의 배 위로 올라타 버렸다.

"경기 중엔  눈 팔면 안 되죠."

우위를 점해 기분이 좋아져 웃음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시아는 결국 화난 표정을 짓...




?



'얼굴이 왜 빨개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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