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4화 〉샌드백(4) (24/94)



〈 24화 〉샌드백(4)

#1

이종격투기로 하는 스파링 중, 상대방의 밑에 깔리면 몸부림을 쳐가며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 게 맞다.

그러지 않으면 자기 위를 올라탄 상대방이 신나게 펀치를 날리면, 가드로 방어해도 언젠간 자신의 얼굴은 피떡이 되니까.

근데 몹시나 위험하게도 내 밑에 깔린 상태인 시아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바로 하얗고 뽀얀 팔을 올려 가드인지, 얼굴을 가리는 용도인지 모를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나도 차마 주먹을 내리꽂지 못하고 얼빠진 얼굴을  채 가만히 있는 중.

'아니 뭔..자기가 그래플링으로 넘어갔으면서 뭐 하는 거지. 그대로 쳐맞고 싶다는 소린가?'

공식적인 경기가 아닌 일반 스파링, 싸움에도 불문율이 있다.

서로가 반드시 상대방을 꺾겠다는 의지를 담아 결전을 펼쳐도 더 이상 한 사람이 싸움을 지속할 생각이 없거나, 몸이 더는 따라주지 않아 쓰러질 때.

그때 나머지 사람은 공격을 멈춰야 한다.

왜?

안 그러면 싸우기 싫다는 사람 붙잡고 일방적으로 때리는 양아치가 되기 때문에.

내가 지금 딱 그 기분이다.

'더   거면 땅 치고 패배를 시인하든가. 왜 가만히만 있냐.'

시아가 저러고 있으니 더 때리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경기를 포기한 것도 아닌  같은데..라고 생각하던 중.

시아가 언제 정신 차리고 반격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뇌리에 번뜩 들자 시아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내 허벅지에 힘을 주어 꽉 조여댔다.

혹시라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내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아드레날린이 사그라들었는지, 마비됐었던 감각이 서서히 돌아왔다.

덕분에 지금까지 느끼지 못했던 생생한 감촉이 아래서 전해져온다.

스포츠 브라만 입은 탓에 맨살이 활짝 드러난 시아의 허리와 맞닿아 있는 내 다리 때문에, 말랑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결과 뜨거운 체온이 생생히 느껴진다.

덤으로 시아의 얼굴에 핀 불꽃도 사그러들지 않고 있자 뭐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갑자기 존나 이상한..기분이네.'

왠지 모르게 링의 거칠던 분위기가 이상한 쪽으로 달아오르던 때.

우리가 마치 남녀 둘이서 사랑이라도 나누듯 야릇한 자세를 취하고선 가만히 있자, 조용히 구경만 하던 관중들이 링 밖의 철조망을 흔들며 난리를 쳐댔다.

"씨발! 끝내요, 오빠! 와 진짜  약았다. 시아언니 저거 일부러 가만히 있네."

"얼굴을 박살 내버려! 얌전한 고양이인 척하더니!"

사람들이 흡사 원숭이마냥 절규에 차 끽끽 대는 괴성을 듣자 그제야 정신을 차릴  있었다.

'여기까지 왔으면 많이 봐준 거지. 사실 내가 이긴 거 아닌가? 가드 내렸을 때 공격만 했으면 끝난 건데.'

그런 생각이 미치자 더는 경기를 진행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재미없어졌다고 해야 할까.

이내 내가 원하는 바램을 담은 말을 조심스레 시아에게 건넸다.

"더 안할거죠?"

그렇게 보내진 나의 실낱같은 희망은 시아의 원래대로 돌아온 표정에 흩어져 버렸지만.

"아니 계속해야지. 가드 올려!"

시아는 부끄러움을 몰아내려는  말을 외침과 동시에 자기 배에 힘을 주며 내 아래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 강력한 의지가 담긴 반발에 자세가 풀려버릴 뻔했지만, 시아의 허리를 꼬옥 휘감고 있는 내 허벅지에 한계까지 힘을 주어가며 간신히 버텨냈다.

'위험할 뻔했네 썅. 좋지. 계속해보자는 거면 이걸로 끝내줄게.'

시아가 용수철처럼 허리를 튕기다 실패하고는 쌕쌕거리며 숨을 고르던 사이.

번개처럼 시아의 몸을 옆으로 돌리곤 오른팔을 다리로 휘감았다.

그에 시아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벗어나려 했으나 나는 이미 다리를 시아의 어깨와 목에 걸친 채, 잡고 있는 팔을 단단히 조여대고 있었다.

순식간에 이뤄진 내 일련의 행동엔 어떠한 망설임도, 실수도 없었다.

아무리 몸이 바뀌었어도 수없이 갈고 닦았던 기술이었으니 자연스레 행해지는 것.

'속칭 '암바' 라고 하지. 제대로 걸렸는데 어떻게 빠져나가려고?'

그렇게 꼼짝도 못 하고 드러누워만 있는 시아에게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줬다.

"이제 어떻게 하시게요? 여기서  하면 팔 부러질 텐데?"
"...."

아무 대답이 없네.

시아의 팔을 옆으로 살짝 돌려 이러다 너 좆됄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심어주자 기운 없는 목소리가 아래서 흘러나왔다.

"..졌다. 팔은 남겨줘라. 아직 할 일이 많아."

그렇게 말한 시아가 남아있는 손으로 조용히 바닥을 탁탁 치자 스리슬쩍 암바를 풀고 일어나서 미소를 지었다.

이겼다.

공식 경기도 아니고, 고작 스파링일 뿐이지만 오랜만에 맛보는 거대한 성취감이 내 안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잘하더군."

언제 일어났는지 앉아서 숨을 고르는 시아가 나직이 말을 걸어왔다.

'아. 일으켜주는  깜빡했네.'

승리에 너무 취해있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글러브를 벗고 시아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그에 시아도 맞잡으며 복잡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일반인 수준이 아닌데. 남자 프로라도 준비하는 건가?"

'남자' 프로라는 말이 참 웃기네.

"그냥 취미죠."

대수롭지 않게 시아에게 답했다.

"흠. 남자치고 힘도 나쁘지 않고, 기술은 거의 프로라 해도 무방한데. 한 번 진짜 도전해 볼 생각은.."

"뱀 대가리는 안 해요."

내가 말까지 잘라내가며 내놓은 즉답에 시아는 잠시 벙쪄있다가 호쾌하게 미소 지었다.

"역시.  정도로는 만족 못 한다는 건가. 어디 가서도 이런 남자는 못 찾겠군."

시아랑 말을 하면 할수록 죽어버릴 거 같다.

웃음을 참느라...

저 말투만 들으면 옛날 전쟁터에서 사람 모가지 수확하고 다니던 장비를 자연히 연상케 하지만.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니 너와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지만 여기선 미성년자니..아쉽게 됐다."

괴이하게도 시아의 목소리는 시냇물이 떠내려가는 듯 맑고 투명해서.

"저도요. 일단 내려갈까요?"

푸들거리던 입술을 진정시킨  시아에게 말했다.

'경기도 끝났는데 일단 나가야지. 여기서 천년만년 살 건가.'

시아가 내 말에 동의하듯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까지 보고 철조망에 달린 문을 열었다.

"너무 잘하셔서 놀랐습니다. 혹시 저랑도 스파링 어떠신가요."
"앞으로 여기 계속 다니시는지.."
"형 몸매 관리 어떻게 하셨어요?"

링에서 내려오기 무섭게 날아오는 질문들에 가볍게 답한 뒤 땀에 달라붙은 스트랩을 풀던 중에, 문득 뒤를 돌아보자 시아는 아직도 링에서 내려오지 않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하던 일에 다시 집중했다.


#2

시아는 망부석처럼 선 채 처음부터 싸움을 복기해보고 있었다.

세화를 얕보았던가.

그런 생각이 들자 시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곱게 자라온 듯한 면모가 있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세화가 샌드백 치는 걸 본 순간 감탄할 정도였으니.

인형 같은 외모와 반대로 뛰어났던 실력.
그리고 마치 여자같은 폭력성이 엿보였다.

그에 맞물려 세화 몸에 그려져 있는 문신들을 본다면,  이놈 아주 거칠게 살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 거다.

남자라고 함부로 다가갔다간 큰코다칠지도 모르지.

시아는 얕봐서 졌다는 생각은 기각한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피지컬적인 면에서도 세화를 압도했었는데.

여자치고 큰 시아의 신장.

그리고 힘은 키에서 나오는 것.

물론 남자와 여자의 기준은 다르다.

근밀도부터가 차이 나기에, 남자 사이에서 힘이 세봤자 여자보단 아래다.

세화도 남자치고 힘이 강하긴 했지만 신체적 차이에선 벗어날 수 없었는지, 시아한테 허리를 잡히자 버티지 못하고 넘어갔었다.

'힘에서도 내가 훨씬 우위인데.'

시아는 갈수록 미궁에 빠져들어가는 기분을 느끼며 생각에 생각을 더하다 갑자기 눈을 번뜩였다.

그러고는 탄탄한 일자가 새겨진 자신의 배를 매만져 봤다.

'...이거군.'

시아가 했던 스파링 중에선 남자와 했던 경기도 있었지만, 그래플링까지 넘어간 적은 없었다. 대부분 타격에서 끝나버렸기에.

그렇게 처음 느껴본 남자의 허벅지에 당황해서 주도권을 내어준 게 실수인 듯했다.

시아는 이제 알았다는  후련하게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링에서 나갔다.

평소의 우직한 표정으로 돌아온 시아의 얼굴은 저도 모르게 살짝 붉어져 있었지만 아무도 그걸 알아차리진 못했다.

심지어 시아 자신조차도.

#3

시아가 드디어 링에서 내려오는  보며 땀에 젖은 티를 펄럭거리고 있었다.

좀 이따 위에 교복을 입어야 하기도 하고 자꾸 몸에 달라붙으니 찝찝해서.

그러고 있으니 미나가 옆에서 경악하면서 갑작스레 내 팔을 잡아챘다.

"너 미쳤어?"
"아니. 그보다 괜찮아?"
"뭐가..."
"내 팔 잡고 있는 거. 많이 축축할 텐데."

내가 게슴츠레 눈을 뜨며 말하니 미나는 황급히 손을 떼며 내게 사과했다.

문득 보니 뭔가를 걱정하는 눈빛인지라, 설마 함부로 팔 잡았다고 저러는 건가 해서 넌지시 말했다.

"뭘 또 쫄아있어."
"내가 손대서 화난 거 아니야? 네가 마지막에 그렇게 말했잖아."
"진짜 괜찮냐고 물어본 거였는데."
"...아니, 진짜? 내가 네 팔 잡아도 신경  쓰여?"

확답을 받으려는 미나에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뭘 그딴 걸로. 정 신경 쓰이면 네 언니나 데려와 줄래? 일 얘기  하게. 힘이 빠져서 움직일 수가 없네."

그렇게 말하고는 의자에 앉아 추욱 늘어졌다.

내 모습에 뭔가 켕기는  있었는지 미나는 날 이상한 동물 보듯이 하다가, 내가 체념하듯 눈을 감자 즉시 시아를 데려왔다.

"..데려왔어. 그리고 그렇게 눈 좀 감지 마. 무서워. 아니 무섭다기보단..몰라."

'이거 효과 좋네. 자기도 양아치면서 뭐가 그리 무섭대.'

미나가 원망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길래 그에 가늘게 눈을 뜨고 마주 봐주니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또 저러네. 진짜 무섭나?'

뭐, 앞으로도 미나가 또 멍하니 있으면 가끔 써먹어야겠다, 생각하고는 무표정으로 앞에  있던 시아에게 말했다.

"이제 진짜 일 얘기를 하네요."

"그래. 이제 앙금은  풀렸나?"

"무슨 앙금이요?"

정말로 모르겠어서 물어보자 시아는 황당한 눈을 했다. 그 옆에 미나도.

"너 처음에 시아언니가 했던 짓 때문에 화난 거 아니었어?"

"아니. 별로 화나진 않았는데."

"..그럼 스파링은 갑자기 왜 하자고 했었나."

"딱히 이유가 있나요."

미나가 나를 이상하게 보던 시선이 전염되듯 시아에게도 옮겨갔다.

"추운 땅에서 살면 남자도 그리되는 건가?"

"그냥 살아온 방식이 좀 특이해서, 라고 봐주시면 좋겠네요."

시아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생각에 잠겨있다가 눈으로  목을 훑어보며 물었다.

"목에 테이프는 왜 붙인 거지?"

그 물음에 조용히 목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시원하게 떼버렸다.

이에 시아는 훤히 드러난  목을 보고, 고개를 움직여가며 내 몸을 더 둘러보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흠. 혹시 러시아에 살 때 권총 같은 거 써본 적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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