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커피(1)
#1
"..권총이요?"
"언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말 그대로다."
시아가 뜬금없이 내게 던진 질문에 어이가 없어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나도 똑같은 심정이었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아를 쳐다봤다.
"언니 설마 또..?"
미나는 뭔가를 의심하듯 눈을 좁히다가 스리슬쩍 손가락을 머리에 대고 돌리려 했다.
물론 그 시도는 시아가 눈을 부릅뜨자 화들짝 무위로 돌아가 버렸지만.
"그런 거 아니다. 흠..다들 이해를 못 한 것 같으니 다시 말해주지. 세화, 네 고향에서 폭력조직 같은 데에 들어갔던 적이 있나?"
시아가 다시 한 번 찝찝하게 내 문신들을 쳐다보자, 미나도 이상함을 느낀 듯 시아에게 물어봤다.
"언니 혹시? 뭐 아는 거 있어요?"
"물론. 우리 클럽에는 외국인도 많이 오니까."
시아가 엉뚱한 면이 있어도 그쪽에서 일하니 뭔가를 안다고 생각한 것인지.
미나도 나를 수상쩍은 눈빛으로 보기 시작하자, 그에 나도 속으론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샤샤의 과거를 모른다. 그렇기에 마피아 같은 건 한 적 없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시아가 저렇게 물어본 건 진짜 뭔가를 아는 게 아닐까.
상식적으로 처음 만난 남자애한테 권총 써본 적 있냐고 물어보는 이유가 뭐겠는가.
내 겉모습이 아무리 마약이나 밀수할 것 같이 생겼어도..좀 이상하지.
그럼 시아가 정말 뭔가를 알고 있다는 가정하에.
청천벽력같이 찾아온 이렇게 알고 싶지 않았던, 찝찝한 구석이 많던 과거였기에 심장이 쿵쿵 뛰어댔다.
하지만 여기서 호들갑을 떨며 시아를 붙잡고 물어보고 싶진 않았다.
추하게 보이는 건 싫다.
살짝 떨리던 동공을 바로잡고, 표정엔 애써 평온함을 가장하며 시아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으음. 별로 놀라지 않네. 역시 내 추리가 맞았던 건가?"
바보스러워 보이고 싶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답한 게, 오히려 오해라는 독으로 돌아온 거 같다.
이내 미나도 태연한 내가 이상한 건지 눈에 담긴 의구심이 더욱더 커져갔다.
"아니 정말이라고..? 세화 너는 왜 가만히 있는 건데. 너 진짜..설마."
"일단 시아씨 말씀 좀 더 듣고 싶네요."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듯한 미나에게 손바닥을 펼쳐 제지한 뒤, 이 사태를 만드신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결국 시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려주지. 내가 왜 세화 너를 의심했는지."
남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 근데 이거 문제가 생기겠는데. 마피아 출신을 들여도 되나?"
내 과거를 확신한 듯한 저 말에 점점 더 감정이 고조되어간다.
"으음. 이거 곤란.."
질질 끄는 말에 이마에 두둑하고 힘줄이 돋는 걸 느꼈다.
그건 미나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은니..그므하고 쁠리 믈해요."
"그 표정 푸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미나가 많이 컸구나?"
시아는 이를 갈며 대답을 재촉해대는 미나를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제압한 뒤 그제야 날 보며 말을 이어갔다.
"일단 너의 종합적인 면모를 보고 판단했다. 일단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싸움스타일이 매우 거칠어. 실력도 그에 맞게 아주 출중하지.
그리고 손가락에 난 상처. 너는 몸을 함부로 다루는 성격이다."
대답 대신 팔짱을 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에서 살았고, 몸을 아끼지 않으며 싸움도 잘하는 남자아이. 네 나라 하면 마피아잖아?"
'...?'
"그것뿐 인가요?"
"아니. 너한테선 거칠게 살아온 냄새가 나. 눈빛, 표정. 종합적으로 몸의 문신들까지. 보통 남자가 그렇게 많이 하던가?"
뭔가 많이 생략된 것 같아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내 문신 보고 뭐 알아낸 거 아니었나?'
"제 문신에 대한 상징이라든지 그런 거 보고 물어본 거 아니었나요?"
"..아니? 그냥 종합적으로 그런 느낌이 있어서 물어본 거다."
하아.
괜히 쫄았다.
심각하게 말하길래 나에게서 뭔가를 발견했나, 하고 마음의 준비까지 했는데.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감이 몰려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눈을 감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역시 아무 말도 못하는군. 어땠나 내 추리?"
우쭐해 하는 시아를 그대로 지나친 미나는 싸늘하게 표정을 굳힌 채로 내게 다가와 기운 빠진듯한 위로를 건넸다.
"내가 미안.."
"..아니 괜찮아. 그리고 시아씨."
나는 목구멍에서 치밀어오르던 '정신나갔냐 씨발' 이라는 말을 가까스로 삼켜낸 뒤 겨우 입을 열었다.
"마피아를 고용해도 되나, 걱정하셨죠?"
"그래."
"걱정하실 필요 없겠네요. 그 얘긴 그만하고 일에 대해서 얘기 좀 해주실래요?"
아직도 찜찜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시아에게 서늘하게 식은 눈으로 마주해주자 반응이 왔다.
"..내가 착각했던 것 같네. 오해해서 미안하다."
#2
웃지 못할 해프닝이 지나가고.
우리 셋은 학원에서 나와 근처 커피숍에서 모였다.
"세화 너 뭐 마실 거야?"
아직도 메뉴판을 응시하며 고민 중인 시아와 달리, 벌써 마실 걸 고른듯한 마나가 내게 물어왔다.
"달달한 거 아무거나."
"엥? 너 단 거 좋아해?"
미나가 사뭇 의외라는 듯 물어오자 하율이 떠올랐다.
참 우연인지 뭔지 모르겠네.
하율도 내가 달달한 거 좋아할 줄은 몰랐다고 했는데.
'내 이미지가 그 정도인가? 양아치같이 생겼어도 쓴 거는 싫어할 수도 있지..'
내가 살짝 억울함을 느끼며 눈매를 찌푸리자 미나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아메리카노 같은 거만 먹게 생겨선. 보기보다 애기 입맛인데?"
저거 봐라?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무서워서 아무 말 못 했으면서 금새 또 기가 살아난 모양이다.
이상하게도 미나가 저러면 꼭 갚아주고 싶단 말이지. 그것도 2배로.
"얼음 왕자 같던 세화 씨가 대답이 없으시군요. 혹시 부끄러우신가?"
미나는 내가 아무 말이 없자 기세가 등등해졌는지 실실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저걸 보고 있자니 내 안을 파고드는 낯선 감정이 느껴졌다.
창피함인가? 아님 저 여우인 척 하는 토끼한테 진 것 같아 화나서?
'..둘 다 아닌 것 같은데.'
그리 거칠지 않으면서도 깃털같이 부드러운 감정이었다.
그렇게 나른한 눈을 띄며 팔짱만 끼고 있으니, 미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이리저리 떠들어댔다.
그런 미나를 말려줄 시아는 여전히 메뉴판이 있는 천장만 잡아먹을 듯이 올려보고 있고.
이대로 있으면 미나의 아프진 않으면서도 귀여운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저 작은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을까..하고 생각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학원에 있을 때 땀 좀 말리려고 옷 좀 잡고 털어댔더니, 미나가 기겁해서 다가와 말린 것.
아무래도 세계가 세계다 보니 바꿔서 생각하면..
'여자가 가슴이 보일락 말락 할 정도로 격하게 옷을 펄럭댄 셈이네.'
그 방법을 또 쓸까 생각하다 곧바로 접었다.
'너무 역겨워. 알고 하면은 존나 게이 같잖아. 자기 옷 들추면서 유혹? 우웩, 씨발.'
그냥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기로 했다.
"괜찮아 세화야. 다 이해해. 아니 단 거 먹는 게 부끄러워?"
말은 저렇게 하면서도 얼굴에 띤 웃음은 숨기지 않는 미나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미나야."
"왜..읍!"
텁.
그냥 재잘재잘 떠드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아버렸다.
여기선 남자가 이렇게 해도 용납이 되니 참 편하네.
#3
미나는 자기 입을 감싸고 있는 손을 거둬내지도 못하고 얼어있었다.
망각하고 있었다.
사람을 홀릴 듯이 미소를 지으며 제 앞에 서 있는 세화는 백 년 묵은 불여우라는 거.
자신이 웃으며 놀려댐에도 가만히 있으니, 그게 너무 재밌어서 멈추질 못했다.
그러니 세화가 태연한 표정을 지어도, 사실 그건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라고 생각했을 수밖에.
미나는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무슨 말을 들어도 가만히 있던 세화가 갑자기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다가올 때, 안에 울리던 경고음을 따랐어야 했는데.
그걸 무시한 결과가 이거다.
미나는 놀라서 크게 떠진 눈을 접지도 못하고 세화만 바라봤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뜻을 담아서.
그러나 세화는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건지, 지금껏 당한 복수를 해야겠다는 건지 싱글벙글 웃고만 있다.
사람 많은 공공장소에서 이러고 있으니 절로 피부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점점 더 입을 꾸욱 눌러오는 세화의 손.
덕분에 세화의 팔을 잡아 살살 힘을 줘 거둬내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
순간 세화의 팔을 확 잡아챌까도 했으나, 그건 좀 그랬다.
다칠 수도 있고. 남자 입장에서 자기가 스킨쉽을 해줬는데, 그렇게 한다면 자존심에 상처받을 수도 있으니까.
비록 그런 분홍빛 의도는 아니었지만.
'..물론 너는 그런 거에 신경 안 쓰겠지. 여자를 엄청 만나봤으니까.'
결국 미나가 내린 결정은 세화에게 자비를 바라는 것.
'미안하다 하고 치워달라 하자..'
"으므므므.."
"뭐라는 거야? 제대로 말해야지."
입술이 열리지 않아 이상한 소리만 흘러나온다. 그걸 알면서도 여전히 웃고만 있는 세화가 얄미웠다.
"므으흐다고.."
"응? 다시 한 번."
겨우내 입을 달싹여 문장에 가까운 소리를 냈으나 또 다른 문제가 나타났다.
입을 우물거릴 때마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에 전해져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계속해서 말할 때 마다 마치..손에 키스하는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진 미나는 이제 그만하라는 눈빛을 담아 세화를 노려봤다.
하지만 세화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치 '네가 먼저 시작해놓고 왜 그래?' 라는 듯한 몸짓.
세화가 오히려 즐거운 것처럼 눈매를 접자, 미나도 더는 참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어쩔 수 없이 무력을 써야겠다 생각하며 자신의 팔을 들어 올릴 때.
"너네 뭐하냐. 연애해?"
어느새 메뉴를 결정하고 이쪽을 본 구세주가 건넨 말에, 세화가 손을 거두고 시아를 바라봤다.
"그렇게 보였나요?"
"약간. 일단 주문부터 하지. 음료 나오면 2층에서 얘기 나누자고."
그렇게 둘은 사이좋게 주문하러 갔지만.
미나는 세화의 마수에서 풀려났음에도 그 자리에 얼음처럼 굳어있었다.
그러자 저 편에서 들려오는 세화의 말이 들렸다.
"미나. 왜 거기 가만히 있어. 시아씨가 사주신다는데."
누구 때문에 이렇게 있는 건데.
미나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나는..아메리카노. 엄청 쓰게."
왠지 모르게 아메리카노가 먹고 싶다. 사실 세화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자기는 너와 다르게 쓴 걸 좋아한다고.
어른답게.
세화는 미나의 말을 들으며 살짝 웃어버렸다.
"그래. 아메리카노로 주문해줄게. 엄청 쓰게."
그 웃음 섞인 말을 들으며 미나는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세화의 표정을 봤다.
..' 아직 넌 멀었어' 를 보여주는 듯 살짝 위로 올라간 입꼬리.
그에 미나는 결국 자존심을 내던지며 패배를 선언했다.
"...취소. 그냥 너랑 똑같은 거 먹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