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화 〉커피(2) (26/94)



〈 26화 〉커피(2)

#1

먼지 한 톨 앉아있지 않은 철제 계단.
차가운 손잡이를 짚어가며 오르는 걸음에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달달한  좋아한다 하지 않았어?"

"가끔  것도 좋더라."

시아가 개선장군이라도 된  앞서 올라가는 사이.

미나와 나는 그 뒤를 졸졸 따라가며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

"왜. 너무 써서  먹겠어?"

나랑 같은 거로 먹는다길래 아메리카노로 주문해 갖다 줬더니, 미나의 표정이 벌레라도 씹은 듯하다.

'그러게 왜 만용을 부려선.'

나는 달콤한 걸 좋아한다 말했지, 쓴   먹는다고 말 안 했는데.

예상치 않은 마지막 일격에 당한 미나의 표정이 마치 따져 묻는 모양새다.

이렇게까지 하고 싶었냐고.

그에 속으론 통쾌한 웃음을 지으며 물고 있는 빨대만 쪽쪽 빨았다.

일부러 엄청 쓰게 주문한 커피지만, 눈썹 하나 찡그리지 않고 쪼로록 마셨다.

그러니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미나의 얼굴이 봐줄 만 하더라.

자기도 아메리카노를 한 번  빨더니 온갖 얼굴을 찌푸려대는 미나를 귀엽게 바라보며 계단을 올랐다.

우리가 느긋하게 여유 부리며 걸음을 멈춘 사이 벌써 시아는 저 위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더 빠른 걸음으로 2층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앉아있는 수십 개의 테이블이 보였다.
올라오자마자 선객들의 시선이 쏠렸으나 신경 쓰지 않고 테이블 중 비어있는 자리를 찾아 시아와 미나를 안내했다.

그러자 미나는  옆에 앉으려다 멈칫하고는 원망하는 눈으로 날 힐끔 보곤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건너편에 자리 잡은 시아에게 가려는 거겠지, 했는데 거기서도 차마 앉지 못하고 고민하는 듯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아무 데나 빨리 앉아."

왜 저러는지 알 것 같아 웃음기를 꾹 누른 채 말했다.

미나는 나와 시아의 얼굴을 심각하게 번갈아 보다 결국 내키지 않은 듯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래도 내가 시아씨보단  무섭나 보네. 귀여운 구석이 많아.'

모두 제자리를 찾아가자, 시아가 무뚝뚝하면서 걱정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어봤다.

"아까 보니까 널 엄청나게 쳐다보던데. 불편하진 않나?"

'여기 올라왔을 때 말하는 거겠지. 시아씨도 은근히 사려깊은 면이 있네.'

"귀찮긴 한데 신경 안 써요."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하자 시아는 자기 앞에 놓인 커피인지, 설탕인지 모를 음료만 매만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지. 가드한텐 그런  필요하거든. 강한 멘탈.
하루에도 몇백 명은 넘어가는 사람을 마주하다 보면 불미스러운 일도 많아. 특히 남자인 너는 좀 힘들 수도 있겠다..했는데."

 맹해 보였던 시아가 어느새 진지하게 바뀌어버렸다.
일 얘기를 꺼내자마자 바뀌는 모습이 프로페셔널 하다 할까.  의외다.

말을 잠시 멈췄던 시아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보니 괜찮겠군. 결심엔 변함이 없는 거지? 지금이라도 아니다 싶으면 말해라. 솔직히 내가 고집부린 것도 있으니."

"전혀요. 어차피 일도 구해야 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싶은데."

시아는 고개를 끄덕이다 아차 했다는 듯 표정을 굳히며 황급히 말했다.

"혹시 부모님께 허락은 받을 수 있나? 정식으로 계약서는  거지만 보호자 동의는 필요해."

"그건 문제없어요. 제가 다 사인하면 되니까."

"안 된다. 이런 일을 먼저 제안한 건 나지만, 허락은 받아야 해."

시아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엄한 표정을 지었다.

막무가내로 스카웃을 했어도 이제  양심이라는 게 속을 찔러대는지, 시아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끼고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은 입술을  채 나를 바라보는 시아.

일종의 시위였다. 부모님의 허락이 있기 전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고 하는 시위.

시아가 그러고 있자 미나가 내려앉은 목소리로 나 대신 입을 연다.

"..이미 세화 부모님은 돌아가셨대요 언니."

"...그래? 내가   알아 들었군. 미안하다."

시아가 정말 의외라는  나를 바라본다.

남자애 홀로 거친 세상에서 살아온 게 불쌍해 보이면서도 대견하게 느껴지는 걸까.

이미 어둡기만 했던 감정은 다 털어놓은  오랜데.

이럴 때마다 동정 어린 시선을 받는  부끄러워, 나는 괜찮다는 것처럼 싱긋 미소만 지었다.

그러자 시아가 팔짱을 풀더니 묘하게 감정이 뒤섞인 표정을 지으며 말해온다.

"다시 보게 됐어.  힘들었을 텐데 씩씩하군. 그럼  문제는 일단락됐고..계약서는 클럽에 준비해놓을 테니 일단 설명부터 하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시아의 설명 전.
문득 오늘 보냈던 하루를 되짚어봤다.

쌓인 스트레스 풀려고 샌드백  쳤더니, 갑자기 스카웃이 들어오고.

그 이후엔 생전 처음 만난 사람과 카페에서 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심지어 스파링까지  여자랑.

인연인가, 우연인가.

나쁜 느낌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지만.

'인생이  풀린다 해야 하나..뭐라 해야 하나.'

살짝 단정하기 힘든 기분에 정신을 놓고 있다가 시아의 말에 눈이 번뜩였다.

"월급은 삼백. 세화 네가 학생이니..금요일, 그리고 주말만 나오면 된다."

'미쳤네. 3일만 뛰어도 돈을 삼백이나 준다고? 클럽에 돈이 그렇게 많은가?'

아니면 내가 남자라서 특수하게 취급해주는 걸까.

도대체 진상 피우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길래 저러나 하는 생각에 눈매가 좁혀진다.

'원래 세계에서도 여자 가드는 보지 못했는데. 세상이 바뀌어서 좀 달라진 게 있나.'

여러 가지 추측 섞인 상황을 떠올리고 있으니, 내 표정이 안 좋은 쪽으로 변했나 보다.

 얼굴을 보고 시아가 급히 말을 덧붙인  보면.

"거창하게 제안한 것치곤 생각보다 월급이 좀 적지? 혹시 원한다면 다른 날도 나올 순 있다. 잠은 포기해야 하겠지만."
"충분해요. 근무시간은요?"
"저녁 8시부터 아침 8시까지."
"좋네요."

주저하는 기색 없이 답을 덥석 내놓는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시아가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시원시원해서 좋아. 그럼 복장은..음."

'복장이라. 그러고 보니 가드는 보통 그거 입고 일하지 않나?'

"양복 같은  입어야 하나요?"

내 말에 시아는 음료를 쪽 빨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우리는 그런 부분에선 좀 널널해. 양복을 입고 싶으면 입고, 싫으면 편한 옷을 입어도 좋고.
하지만 그러려면  어두운색 계열을 입어야지. 아무래도 위압감 같은 게 필요하니까."

혹시나 양복을 입으라 하면 곤란했는데 다행이었다.

기억을 뒤져봐도  옷장엔 그런 고급스런 옷은 없었으니.

"그리고 세화 너는 문신이 드러나는 쪽으로 입으면 좋을 것 같다.
노출을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남자라고 얕보는 그런 건 조금 없어지겠지. 물론 싫으면 편한 대로 입어도 된다."

'흠. 과연 그럴까. 오히려 가만히 놔두질 않던데.'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예전 사건들을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보스가 될 시아가 조언해주는 건데 굳이 토 달고 싶진 않아서.

예상대로 내가 선택한 행동이 꽤 맘에 들었는지 시아도 호탕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건네왔다.

"날짜랑 시간은 톡으로 보내주지. 앞으로 잘해보자. 류세화."


#2

대체 언제 끝나나 싶던 대화가 마무리된 뒤.

커피숍 앞에서 둘이 번호를 교환하는 것까지 마치고 시아는 떠나갔다.

그제야 미나는 단단히 잠가놨던 있던 입술을 열어 세화에게 심문하듯 말했다.

"너 진짜 이상해."

오늘 하루가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정신 차려보니 그토록 무서웠던 시아언니가 세화를 가드로 채용하고.

정작 세화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만족스레 미소 짓고 있으니.

"그런가?"

세화는 이쪽에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미나는 자긴 전혀 모르겠다는 세화의 말투에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앞으로의 일에 전혀 걱정이  된다는 듯한 저 태평한 태도.

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담배, 술, 문신, 이제는 클럽에서 일한다니.

얌전함이랑은 전혀 거리가 멀다.

외모가 아름답든, 몸매가 좋든 연애하게 되면 인생 망칠 수도 있는 남자의 표본.

여자야   자보려고 다가갔다가 거기에 빠져버리면 돈이든 쓸개든 다 갖다 바치겠지.

'아니지. 어차피 사귀는 사이도 아닌 데 이런 걸 신경 쓸 이유가 없지.'

자꾸만 이상한 쪽으로 변해가는 생각을 애써 떨쳐 내려 했으나, 그럼에도 아까 있었던 일들이 스멀스멀 떠올라 얼굴이 뜨거워진다.

"왜 또 얼굴이 빨개져. 야한 생각이라도 했냐?"

또 허물없이 장난쳐오는 세화의 말에 미나는 이리저리 팔을 내저었다.

"뭐, 뭔 소리야! 그보다 우리 오늘 거의 처음 만났거든?"

'이름 안게 오늘인데..언제 이렇게 친해진 건지.'

격하게 반응하는 미나에게 세화는 그게 어쨌냐는 듯이 고개를 으쓱거렸다.

"그게 뭐. 너도 먼저 나한테 장난치더만."

"그건 맞긴 한데..아 모르겠다. 무슨 남자애가 이래."

미나는 세화에게  진듯한 기분이 들자 허탈하게 걸음을 뗐다.
그러니 집까지 가는 길을 모르던 세화가 자연스럽게 미나의 옆으로 따라붙는다.

그렇게 나란히 걷다가 날이 어두워져 간판이 반짝거리는 거리를 지나고 있자니, 사람들이 세화를 흘끔 쳐다보고 간다.

미나는 그 이유를 알았지만 애써 자신을 속여갔다.

인정하면 그를 칭찬해 주는 셈이니,  지는 기분이 들  같아서.

'하. 그렇게 예쁜가? 내가 보기엔 아닌데.'

비록 그렇게 생각하긴 했지만, 저 광경을  미나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멀리서 핸드폰을 들고 다가오려던 여자들이, 세화 옆에 있는 미나를 보고 아쉽다는 듯 되돌아가는 것.

세화가 무섭지도 않은가 보다. 문신이  가득에, 성격도 차가워 보이는데.

그게 제 몸이 탈 걸 알면서도 빛에 달려드는 불나방 같다고, 미나는 생각했다.


#3

편의점 근처의 으슥한 골목.

도착하니 숨이  트인다.

같이 걸어오는 동안 얼마나 차가운 눈을 하며 사방을 경계해대는지, 내가 알던 미나가 맞는지 의심될 정도.
도대체 왜 저러나 한참이나 고민했다.

'성격이랑 생긴 게 너무 딴 판이라 그런가. 이럴 땐 낯설다.'

"야."

"왜, 왜.  문제 있어?"

미나는 내 말에 어딘가 경계하듯 말을 더듬었다.

'..원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같은데. 오늘 너무 놀려댔나?'

언젠간 한 번 져줘야지 생각하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다. 내일 봐."

진심을 담아 작별인사를 건넸으나, 미나는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러더니 개미가 친구 먹자고  정도의 목소리를 웅얼웅얼 대고는 성큼성큼 걸으며 사라져버렸다.

그에 나도 살짝 얼떨떨했지만 금방 정신을 차리곤, 잠들어있는 거리에 내 발소리를 퍼트린다.


집 가면 괜찮은 옷이나 찾아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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