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무제(1) (27/94)



〈 27화 〉무제(1)

#1

세화와 헤어지고  후.

시아는 근처에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하로 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시아가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분명 아까까지는 가벼웠던 걸음이 다리에 추라도 매단 듯 무거워진다.
기둥마저 초록색으로 칠해진 주차장에서, 홀로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외제차로 걸어갔다.

시아와 같이 젊은 나이가 타기엔 부담이 많아 보이는 고급 세단.

하지만 아무 감흥도 없이 키를 꺼낸 시아가 버튼을 누르자, 차의 눈이 일순간 빛나며 주인을 반겼다.

덜컹.

푹신한 운전석 시트에 앉자, 시아의 얼굴이 조금씩 구겨져 갔다.
 안락함도 처음엔 마냥 좋아했으나, 이젠 과분하게 마저 느껴진다.

마치 족쇄가 되어 시아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핸들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시아가 내키지 않은 듯한 손짓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시아는 한숨을 내쉬며 전원 버튼만 껐다, 켰다 하며 결국 번호를 누른 뒤 귀에 갖다 댔다.

ㅡ시아?

"예, 사장님. 보고드릴 게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통화 괜찮으신지요?"

시아의 딱딱한 어조가 이제는 돌처럼 느껴질 정도지만, 상대는 개의치 않은  웃기만 했다.

ㅡ푸하하! 이시아. 친구끼리  그래. 편하게 해, 편하게.

친구라.

 단어를 듣는 순간 욕지기가 밀려왔다.

목에 짐승처럼 목줄을 매달 땐 언제고, 이제 와 사냥개한테 그런 과분한 단어를 붙여준다.

"저는 이게 편합니다. 그나저나 저번에 말씀드렸던.."

ㅡ시아야. 내가 너한테 클럽을 왜 맡겼겠어? 직원 채용 정도는 알아서 해결해야지.

순식간에 장난기를 거둔 목소리가, 그제야 제 자리를 찾는다고 느꼈다.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번에 새로 직원을 뽑기로 해서 연락드린 겁니다.
근데 나이가 미성년자라 괜찮을련지 해서 먼저 여쭤봅니다."

ㅡ아 그래? 상관없어, 보호자 허락만 받았으면.  또 뭔가 했지..아.
그럼 남자겠네? 그렇게 못 구해서 안달이더니 용케 잘 구했어.

"예."

ㅡ뭐. 그건 알아서 하고. 아, 어머니가 너 요즘 어떻게 지내냐 하시더라.

어느새 차갑던 목소리에서 다시 밝아진, 성유진의 입에서 나온 음색이 너무나도 거슬린다.

"그냥..손 털고 잘살고 있다고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ㅡ어, 그랬지. 내 밑에서 일하는데 당연히 알지.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들어가 봐도 될까요."

얼굴을 맞대지 않았음에도 심력이 소모되는 느낌이다.
시아는 이 이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아 전화를 끊으려 했지만.

액정 너머에서 날아온 '통보'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ㅡ그래, 아! 언제 한 번 신입 보러 놀러 갈게. 그래도 되지? 이시아.

"..얼마든지요. 사장님 클럽이지 않습니까."

'네년이 지랄만  한다면야 환영이지.'

세화에겐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 큰 클럽에 남자 가드가 부족한 이유.
가드총괄인 시아가 발 벗고 나서 미성년자까지 써야 할 이유.

세화를 처음 만났을 땐 적당히 쓸만하다고 생각했다.
문신도 그쪽 애들이랑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 났기에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혹시 이상한 출신이 아닌지 의심도 했었고.
차라리 볼꼴 못 볼꼴 다 본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대화를 하다 보니 알게 돼버렸다.
세화는 자신과 닮아있었다.
부모님이 없다고 털어놓으면서도, 아무렇지 않은 듯 웃는 것까지도 말이다.

그래서 동질감이라도 든 걸까.

그렇다고 넌 하지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세화의 눈빛이 일자리를 구했다는 기대감으로 차있었으니, 애써 마지막까지 호탕한 사람을 연기했다.

그 사실이 죄책감이란 쇠사슬로 변해 조금씩 시아를 옥죄어온다.
전화를 끊은 시아는 핸드폰을 옆자리에 던지며, 다시 눈을 감고 몸을 파묻었다.

'노력' 으로 얻은 결과물인, 외제차의 푹신한 의자에.

"최대한 막아보려고 노력할게. 네가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알 수 없는 말을  '발키리 가드총괄' 이시아는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미리 또 구해놔야 하나."

#2

 할  양복은 필요 없다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씨발..옷 좆도 없네 진짜. 봐도 봐도 어이가 없다."

어지러이 파헤쳐진 옷장을 보며 심술이 난 나머지 절로 욕지기가 튀어나온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나도, 샤샤 이 새끼도 옷 사는 덴 참 관심이 없었던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옷걸이에 걸린  고작 저딴  밖에 있을 리가 없으니.

"..뭐야 이건. 와, 미쳤네. 의류수거함으로 가야   왜 여깄어?"

뾰족한 것에 걸려 긁히기라도  듯 길게 찢어져 있는 검은 슬랙스.

하율과 데이트하러 갈 땐 못 찾았던 건데,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여기 여자들은 이런  입어주면 오히려 좋다고 하겠지만, 이미 옷의 기능을 잃어버려 가치가 없었다.

그렇게 고르고, 골라내다 보니 남은  겨우 몇 벌의 옷.

"어두운 계열이라 했으니 청바지는 패스. 그럼 츄리닝 바지만 남네..씨발."

좆같다.
아무리 편하게 입고 오라 했어도 츄리닝같은 거 입고가면 시아라도 화내지 않을까.
일단 불안함을  눌러 담고 상의 쪽도 골라보기로 했다.

그러나 바지와 마찬가지로 결과는 처참하다.
시아가 제시했던 조건  하나, 어두운색.

후드, 검은 티, 나시.

 세 가지가 시아의 조건에 부합한다.

그것들을 바닥에 차곡차곡 내려놓은 뒤, 하나하나씩 입어봤다.

"후드는..좀 아닌 것 같고. 문신이 안 보이잖아."

다음,

"검은 티..이건 너무 무난한데. 좀 애매하다."

마지막.

"..그래 네가 그나마 낫긴 하다. 하..이거 입으면 또 지랄 날 것 같은데."

시아가 조언해줬었다. 문신이 보이게 하는 게 나을 거라고.
솔직히 그게  소용인지 싶었으나 그냥 까라면 까는 수밖에.

츄리닝 바지와, 새까만 색의 나시티.

어쩌다 보니 처음 일어난 날의 차림새로 돌아가 버렸지만, 그나마 이게 제일 나은 결과다.
솔직히 원래 세계였다면 이렇게 입고도 충분히 안심하며 일하러 갈 의향이 있었다.

나시만 입으면 여자들 눈이 돌아가는 미친 세계라서 그렇지.

옷 고르기가 이렇게 힘든 적이 있었던가.
세상 제일 어려운 난관에 봉착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애꿎은 앞머리만 계속해서 쓸어넘겼다.

"이러고 있어도 방법은 안 나오지. 일단..물어보기나 할까."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ㅡ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맥아리 없이 나풀거린다.

'목소리가 이상하시네. 아까는 되게 당찼는데.'

"류세화입니다, 시아씨. 아. 이제 사장님이라 부를까요?"

ㅡ아니. 그냥..팀장님이라 불러라. 근데 왜 전화했지?

헤어진 지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그 사이에 기분이라도 상한 걸까.

태도는 어딘가 날이 서 있었지만, 시아가 곧이어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ㅡ혹시 마음 바뀌어서 안 한다고 말하려던 거면 괜찮..

"그건 아닙니다. 그냥 팀장님이 옷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잖아요?"

ㅡ..그랬지.

뭔가 안심하면서도 아쉬운 듯한 시아의 목소리에 어리둥절했지만 곧바로 말했다.

"그래서 찾아봤더니 나시에 츄리닝 바지밖에 없네요. 둘  검은색이긴 합니다."

ㅡ그 정도면 괜찮긴 한데..노출이 심하긴 하군.
위에 걸친 만한 건 없나? 품 넓은 거. 언제라도 문신 내보일 수 있게.

저 마지막 말의 어감이  이상하다. 말만 보면 일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지만, 목소리는 무언가 경고하는 느낌이라.
하지만 뭐라 물어보기도 그랬기에, 시아가 말한 품이 넓은 옷이 뭔지나 생각해봤다.

그러다 떠오른 건 하율이 골라줬던 스카잔.

"스카잔은 어떤가요 팀장님?"

ㅡ좋네. 그걸로 하지.

시아의 허락에 가슴 한쪽을 쓸어내렸다.
진짜 양복이라도 사야 하나 했는데.

대충 감사하다고 말하고 끊으려 하자 시아가 말했다.

ㅡ세화. 미리 말해두지만 더러운 꼴  수도 있다. 가드라고 해서 문만 지키는 건 아니야.

시아의 말은 마치 이래도 그만 안 둘 거냐는 말로 들렸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살짝 깃든 절박함이 보여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상관없습니다. 돈만 제대로 주신다면야."

정말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학교 다니는 중에 파산할 거다.
이렇게 알아서 찾아온 일자리를 놓칠  없었기에 무덤덤히 말했더니, 시아의 반응이 돌아왔다.

ㅡ..말하는 게 가끔 오는 코쟁이들 하고 비슷하군. 일단 알았다.

가끔 오는 코쟁이는 또 무슨 소린지.
내가 혼혈이라고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시아가 그럴 성격은 아니라 생각해서 순순히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이제 용도를 마친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전에 사놨던 스카잔을 찾으려 방안을 둘러봤다.

침대 밑에 자리한 쇼핑백이 보인다.

'전에 사놓고 옷장에도 안 넣어 놨었네.'

스카잔을 꺼내서 혹시나 쌓여있을 먼지를 털었다.

그다음에 입고 나서 거울을 보니 꽤나 괜찮게 보인다.

나시 사이로 살짝살짝 비치는 문신들과 용이 새겨진 스카잔.
그게 내 이국적인 외모와 어우러져, 이러고 다니면 진짜 뭐 있는 새끼 같다는 말을 들을 것 같다.

심지어 내 '회사' 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아주 그냥 조폭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물론 삼류 말단조직원 느낌은 아니었지만.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폼 좀 잡다가 스카잔을 벗고 고이 개어놓았다.
집도 대충 정리한  불 끄고 자려 한 순간 멈칫했다.

"생각해보니 발키리가 어딘지도 모르네."

여기 자기 직장 위치도 모르고 있는 멍청한 놈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새끼가 바로 나다, 하고 자책하며 핸드폰으로 클럽 발키리를 검색했다.

...집에서 위치가 꽤 멀다.

'여기랑 거기랑 똑같은 강남인데 왜 이리 머냐..중심가라고  다른가 보지?'

불만스러운  입이 삐죽 나온다.
이러면 맨날 대중교통 타야 하니까.
왠지 모르게 서러워져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았지만, 이왕 본 김에 더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리뷰란에서.

(dasd12)ㅡ★★★★ 굳.

(hfd222)ㅡ★★★★ 괜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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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별거 없다.

화면을 내리고 내려도 저런  말곤 보이지 않는다.
괜히 시간 낭비 했다고 생각하며 리뷰란을 나가려는 순간, 시선을 잡아채는 게 있었다.

(Qwade)ㅡ★★★ 다 좋은데 오빠들이 자주 바뀌네요. 친했었는데ㅜ아쉽습니다.

'클럽 죽돌이 말하는 건가? 그럼 갈 때마다 당연히 바뀌지 그대로 있겠냐.'

얼마나 죽순이면 이런 리뷰를 남길까.

혀를 쯧쯧 차며 핸드폰을 끄곤 침대에 몸을 눕힌 뒤, 새하얀 벽지로 덮인 작은 하늘만 바라봤다.

학교만 아니었으면 풀 근무 뛰고 돈이나 벌었을 텐데.

갑자기 샤샤가 원망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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