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8화 〉무제(2) (28/94)



〈 28화 〉무제(2)

#1

시아와 헤어지고 며칠 후.

끔찍한 소리로 울려대는 알람을 끄고 몸을 뒤척이며 이불을 걷어냈다.

이른 아침에 일어날 때가 제일 고역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천근만근같이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 노력했다.

어찌어찌 졸린 눈을 떠보니, 벽의 색이 늘 보던 익숙한 노란색이 아니라 회색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지개를 피며 창밖을 봤다.

"하암..비가 올라나."

오늘 맞이한 아침 날씨는 썩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니다.
오히려 불쾌한 수준.

벌써부터 느껴지는 듯한 습기에 눈살을 찌푸리긴 했으나 어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날씨 좆같다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을 순 없었으니까.

"학교가야지..씨발."

도대체 왜.

졸업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고딩들이랑 부대끼며 수업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참담함에 한숨을 쉬면서도, 내 몸은 저절로 화장실로 움직여 샤워호스를 들었다.

그로부터 20분쯤 지나고.

머리카락에 살짝 남아있는 물기를 털며 목에 붙인 테이프를 다시  번 꾹 누른 뒤에 터벅터벅 계단을 내려왔다.

나는 근처 골목의 담벼락으로 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에 불을 붙였다.

연기를 내뿜으며 내 손에 들린 물건으로 시선을 내렸다.
슬슬 바닥이 드러나 휑해 보이는 담뱃갑.

"아니 씹..언제 이렇게 폈지?"

내 혓바닥에서 경악섞인 말이 튀어나온 이유.

하루만 안 피워도 신경이 날카로워지는, 그 정도로 심각한 니코틴 중독자가 바로 나다.
그러니 갑 안의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듯한 담배 개수를 보면 욕이 절로 나올 수밖에.

"하아.."

그에 물고 있던 담배를 필터까지 빨아가며 목으로 들어오는 연기와 올라오는 한숨을 같이 내보냈다.

그러고 난 뒤, 애처로운 눈으로  핀 담배를 바라보다 손가락으로 툭툭 쳐 내용물까지 빼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학교로 향했다.


#2

내 일상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학교는 좆같고, 거기에 새로 온 전학생의 소문이 퍼진 것 정도?

'아닌가? 그 정도면 많이 변한 건가.'

"남자애들은 선생님  잘 들어. 맨날 헤프게 놀러 다니고, 문신하고, 공부도  하면 나중에  건 그쪽 일밖에 없다. 무슨 일인지 알지?
장가가서 내조할래도 몸이 깨끗해야 해. 외모도 나이 들면 언젠가 시들어요. 요즘은 남자도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민호인지 뭔지 하는 유사 선생 새끼가 수업하다 말고 사족을 붙였다.
말만 보면 이 반 남자애 전체한테 하는  같지만, 시선은  뒤에 고정한 채 노려본다.
그리고  시선이 향한 곳은 내가 있는 쪽. 누가 봐도 나를 저격하고 한 말.

'도대체가 씨발..나랑 전생에 원수라도 지었나. 맨날  지랄이네. 저런 말 해도 안 짤리는 게 존나 의문이다.'

첫날의 악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덕분에 아이들도 익숙한 듯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그에 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 첫날처럼 감정선이 날카로워지지 않게 노력했다.

내가 대수롭지 않은 듯 눈을 나른히 뜨자, 민호는 이걸 안 걸리냐는 듯 혀를 쯧 차고는 종이 울리자 교실을 나갔다.

"..괜찮아? 민호 쌤이 원래 성격이 안 좋긴 한데..요즘 너한테만 유독 그러네."

옆에 앉은 미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왠지 귀여워서 별거 아니라고 대답해준 뒤 손을 뻗었다.
찰랑거리는 은발을 손으로 헝클어주니 마음이 편해진다.

"아! 뭐, 뭐해!"
"멘탈 관리."
"아니 여자 머리가 뭐가 좋다고..야, 나도 만질 거야 그럼."
"어. 만져."

불만에 가득 찬 눈을  미나가 그렇게 말해오자 대수롭지 않게 내 머리를 미나 쪽으로 숙였다.

아마 당했다는 복수심에 홧김에 뱉은 말인 것 같긴 하지만 들어주기로 했다. 최근에 많이 놀려먹었으니.

하지만 숟가락을 들어 떠먹여줘도, 미나는 손가락을 허공에 멈춘 채 우물쭈물 거렸다.

"만져도 된다니까?"
"아, 아니 그래도 어떻게..됐어. 그냥  만질래."

미나는 역전된 세계의 여자답게, 차마 남자에게 손을 대지 못하겠는지 들어 올렸던 손을 거두려 하자.

나는 그 얇은 손목을 잡아채 내 머리카락을 만지게 해줬다.

그러자 미나는 처음엔 화들짝 놀라면서 손을 빼내려다가 내 머리카락 느낌이 좋은 듯 홀린듯이 가만히 있었다.

"어때?"
"..부드럽네. 향기도 좋고..이게...아, 아니! 이제 놔, 충분하니까!"

미나는 내 머리에  빠져있는 듯하다가 정신을 차리고는, 급히 손을 빼내며 삐진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런 미나는 내가 말을 걸어도 아무반응이 없었다.
장난이 심했나.

괜히 멋쩍어서 바람 좀 쐬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저 멀리 있던 혜민이 다가와 심각하게 말을 걸었다.

"세, 세화! 너 진짜 미나랑 안 사귀는 거 맞지?"
"어."
"그..그럼 나도 네 머리 만져봐도 돼?"
"아니."

저걸 허락해주면 내 머리카락이 공공재로 변해버릴 거 같아서 칼로 자르듯 말했다.

'미나는 귀엽잖아. 너는..어후. 몸에 도깨비가 그득하네.'

미나가 착하고, 많이 친하니까 만지게 해준 거지. 또 숙맥이라 놀리는 맛도 있다.

근데 혜민은..한 번 허락해주면 끝도 없이 들이댈 것 같은 느낌이었다. 게다가 얘는 진짜 양아치 맞아서 껄끄럽고.

그런 계산을 마치고 가만히 있으니 혜민은 억울함을 꾹꾹 눌러 담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나는 되고, 왜 나는 안돼?"

'미쳤나..그건 내 맘이지.'

혜민의 황당한 말에 절로 눈이 차갑게 식던 중에, 어느새 미나도 미묘한 눈으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미나가 보고있으니 장난기가 살짝 도져 높낮이 없는 어조로 무심하게 말했다.

"얘니까."

주절주절 이유 대지도 않고, 적당히 선 넘지 않은 문장을 담백히 뱉었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담백했는지, 파장이 굉장했다.

미나는 어버버거리며 고개도 못 들고 있었고 혜민은 분한 듯 이를 살짝 갈며 말했다.

"아..그으래? 미안하다. 미나랑 많이 친한가 보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혜민은 애써 표정을 풀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세화야. 그럼 이따가 끝빵 같이 할래?"

학교 끝나고 담배 피자는 소리다. 요즘은 왜  말 안 하나 했네.

나는 예전에 혜민의 제안에 반쯤 수락했던 걸 자책하면서도 겉으론 창피함을 숨겼다.
그날 민호가 지랄했던 것 때문에 감정이 격해져 나도 모르게 알았다고 한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미칠  같네.

'고딩들이랑 교복 입고 담배..씨발 왜 그랬지 내가.'

어린애들이랑 담배 피우면서 침이나 찍찍 뱉는  떠올렸다.

'나는 22살이다. 몸뚱이가 18살이라도.'

그 광경을 상상하니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을 참으며 말했다.

"요즘 일이 있어서 바쁘네."

"학생이 뭔 일..아니다. 그래, 나중에 괜찮으면 같이 하자."

혜민은 너무 질척인다고 생각한 건지 구겨졌던 표정을 수습하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뭔가 해명을 요구하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는 미나를 흘끗 보곤
교실 창문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나를 구경하는 인파를 뚫으며 교실을 나왔다.


#3

학교로 돌아오는 길.

미나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담아 나란히 걷고 있는 세화에게 물었다.

"너..아까  그랬어?"
"뭘?"
"아까 나니까 그랬다고..뭐 말했잖아."
"그게 왜?"

전혀 문제  게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는 세화에게 미나는 순간 울컥했다.

우리 아빠와 같이 세화도 그와 비슷한 부류인걸까.
아니면 미나가 강남에 산다고 뭔가 오해한 걸까.

그냥 세화가 장난친거란 걸 알고있어도 내재된 트라우마가 미나를 괴롭혔다.

아빠의 모습이 세화에게 투영되어 보이는  같아 미나는 복받친 감정을 토해냈다.

물론 화를 내며 말하진 않았다. 장난엔 장난으로 대응해 주는 게 맞으니까.
미나는 가시담은 말을 농담인  웃으며 건넸다.

"미리 말해두는 데, 우리 집 돈 없어. 차라리 혜민이 훨씬 많을걸?"
"뭔 소리야?"
"아까 일 얘기하는 거잖아. 여자를 얼마나 많이 만나봤으면 그렇게 능청스러워? 가끔 감탄한다니까?"
"만나본 적 없는데."
"...?"

도대체 무슨 말 하는 거냐고 묻는 듯한 표정의 세화에게 미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미나가 아까 상황에 빗대어 말하고 있는 건데, 세화는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하니까.

'네가 먼저 장난쳤으면서..반응이  이리 진지한 거야.'

"그러니까..여자 만나본 적 없다고?"

"어."

"아니, 그거 물으려던 게 아니라..일단 그렇다 치고 아까는  그랬어?"

"이유는 없어. 그냥 느낀 대로 말한 거지."

"야..장난하지마. 우리 집에 진짜 돈 없어. 우리 엄마 택시 기사.."

"어쩌라는 거야."

세화는 눈살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미나의 눈엔 그게 마치  마음을 왜 몰라주냐는 듯한 남자의 행동으로 보였다.

미나는 다시 한번 아까 상황을 생각했다. 자신이 뭔가 잘못 알았는지.

아무리 그래도, 남자가  여자 손까지 잡아가며 자기 머리를 만지게 해준다는 건 오해의 소지가 충분하지 않나.
연인이 아니라 해도 뭔가 썸 같은 분위기에서 할 수 있는 행동인데 세화와 자신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근데 장난이 아니었다고?'

설마.

미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힘차게 저어댔다.

그럴 리가 없다.

미나는 흔들렸던 시야를 바로잡으며 아빠의 모습이 일렁거렸던 세화를 다시 눈에 담았다.

그 순간 미나의 사파이어같이 파랬던 눈동자가 다른 색으로 채워졌다.

금색.

세화의 상징과도 같은 눈동자 색깔.
세상만사가 귀찮다는 듯한 눈매에도, 그 꼬리엔 웃음이 매달려 있는 것 같다.

미의 신이 빚어낸 듯한 얼굴이 뚱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미나의 심장에서 뭔가가 일었다.

동정이라 한 것 때문에 세화의 문란할  같았던 분위기가 박살 난 탓인가.

아니면 여자 수십 명은 갈아치웠을 저 퇴폐적인 외모와 상반된, 자신을 향한 것일지도 모를 순정?

생전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 때문에 미나가 가슴 한쪽을 움켜쥔 채 가만히 서 있을 때.

하늘이 요동치며 먹구름에서 소나기를 쏟아냈다.

쏴아아ㅡ

"이런 씹. 어쩐지 이럴 거 같더라."

세화의 거친 말에 천박함이 아니라 특유의 야성이 묻어 나온다.
미나는 처음 보는 세화의 모습에도 왠지 모르게 거부감을 느낄  없었다.
남자가 저런 말 쓰는 거 정말 싫어하는데도.

감상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야, 미나."
"...어?"
"집까지 얼마  남았으니까  뛰자."

세화는 혼자 청춘드라마 찍고 있는 미나에게 그렇게 말한 뒤,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미나도 얼떨떨해하며  뒤를 따르다, 앞서 가던 세화가 갑자기 멈추자 의아해하며 그에게 물었다.

"왜? 뭐 있어?"
"...어떤 쓰레기 새끼야."

미나는 세화가 이글거리며 바라보는 시선을 따라가 봤다.

작은 상자 안에 담긴 새끼 강아지.
그 연약한 생명체가 비에 홀딱 젖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세화는 말없이 천천히 다가가, 강아지를 들어  안에 넣고 감싸 안았다.
그 행동에 미나는 당황했다.

"어, 어떻게 하게?"
"..일단 데려가야지. 하..좆같은 새끼들."

화가 차오른 세화의 욕설에 미나는 왠지 모르게 몸을 움찔대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키우려고?"
"모르지. 그래도 이렇게 내버려두면 죽어."

사람 정도는 웃으면서 죽일 거 같은 세화가  안의 강아지 대신 비를 쫄딱 맞으며 떨고 있었다.

의외였다. 정말로.

그러다 세화가 갑자기 기침을 해대자 미나는 기겁했다.

"콜록, 씨발."

"왜, 왜?"

"개털 알러지 있나 보네. 콜록! 씹. 이러면 집에도  데려가잖아."

"야, 괜찮아?"

미나는 걱정스레 물으며 그의 얼굴을 보려고 자연스레 세화를 훑어봤다.
그 순간, 미나는 눈동자의 통제권을 잃었다.

평생 보지 못할 것만 같았던 얼굴.
연신 기침을 해대서인지 찔끔 나온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눈꼬리.
 덕에 붉어진 눈가가 여자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그리고 비에 맞아 달라붙는 옷 덕에 선명히 보이는 몸의 잘빠진 굴곡.
미나는  광경에 시선을 빼앗긴  돌려받지 못했다.

"야,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하자."
"...."
"미나."
"어! 말해."

미나가 대답하자 세화는  손으로 강아지를 끌어안으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더니 품에서 강아지를 꺼내 미나에게 내밀었다.

"얘 좀 잠깐만 맡아줘. 아 혹시 젖는 거 싫.."
"아냐! 해줄게."

미나는 옷이 젖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급히 강아지를 건네받았다.
덕분에 세화는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누나. 혹시 지금 어디에요?"


세화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에 미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