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9화 〉무제(3) (29/94)



〈 29화 〉무제(3)

#1

 커튼이 내려와 덮고 있는 창문.
불이 꺼진 방 안은 수납장 위에 올려져 있는 램프의 빛으로 은은히 일렁였다.

 몽환적이기도 한 느낌 속에서 이불 가운데가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어제 야간 알바를 뛰고 베개를 꼭 끌어안으며 꿈나라에 들어가 있는 하율이었다.
색색거리는 소리와 함께 곤히 자던 하율은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흐느적거리며 일어났다.

"뭐야..쉬는 날인데 진짜."

살짝 신경질을 내며 핸드폰을 확인한 하율은 당연한  본다는 듯이 말했다.

"뭐야..세화네..하암."

세화에게 전화   오랜만이다.
늘 먼저 연락해야지 하며 마음만 먹었었는데 일에 치인 나머지 신경 쓰지 못했네.

잠이 가시지 않아 비몽사몽  눈으로 계속 액정에 뜬 이름만 바라보던 하율은 순간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세화!?"

큰일이다.
진동이 울린 지 한참이 됐는데 아직도 끊기지 않은 게 용하다.
하율은 허겁지겁 전화를 받았다.

ㅡ누나 어디에요?

"어? 누, 누나 지금 집이지."

핸드폰 너머로 세차게 내리는 듯한 빗소리와 세화의 안도 섞인 한숨이 들린다.

'밖에  많이 오나 보네.'

"세화야 왜? 혹시 뭔일 있어?"

ㅡ일은 있는데..누나 혹시 개털 알레르기 있어요?

개털 알레르기?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걸까.

"아니? 그런 건 없어."

ㅡ콜록! 씹. 아 누나한테 욕한 거 아니에요.

"세화야 어디 아파? 기침이.."

ㅡ괜찮아요. 누나, 미안한데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세화 말에 실린 간절함이 여기까지 전해져온다.
그에 설마설마하며 하율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단 들어볼게."

ㅡ유기견을 주웠는데 얘가 비를 많이 맞았어요.
제집으로 데려가려 했는데 제가 알러지가 있어서..

끝까지 안 들어봐도 알 것 같다.
아마 자신의 집에 강아지를 데려와도 되냐는 말 같은데.

'나 하나도 감당 못 하는데..아무리 세화 부탁이라도.'

하율은 고심하다 결국은 거절하려 했다.
강아지는 불쌍하지만 잘 돌볼  있을 자신이 없다.

"세화야..미안한.."

ㅡ그리고 새끼강아지예요.

세화가 하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득하듯 '새끼강아지' 를 덧붙이자, 하율은 멈칫하며 눈을 찌푸렸다.
저렇게까지 하니 마음의 갈등이 커져갔다.

ㅡ누나 일하느라 바쁜 거 알아요. 그래도 이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어서..유기견 센터에 맡기면 안락사 당할 거고. 못 봤으면 모를까..콜록.

"하아..그럼.."

하율은 알았다고 하려 했으나 세화는 그게 거절이라고 느낀 것인지 도중에 급히 말을 이었다.

ㅡ얘 사료랑, 간식. 비용까지  제가 댈게요. 그리고 누나 일할 때 가끔 가서 제가 돌볼..

"미리 필요한 거 있어?"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린 하율은 얼굴이 빨개졌다.
중간에 데려와도 좋다고 말하려 했는데.
세화가 자기 집에 온다고 하니 그제야 허락한 모양새.

이럼 마치 자신이 변태 같지 않은가.

하율은 조마조마하며 세화의 답을 기다렸다가 이내 가슴을 쓸어내렸다.

ㅡ수건 정도면 괜찮을  같아요. 고마워요 누나.

정작 아무렇지 않은 세화의 말에 하율은 뭔가 찔리는 느낌을 받으며 말했다.

"아냐...이 정도로 뭘. 집 주소 보내줄게."

#2

 옷 안에서 배에 착 달라붙은 채 부르르 떠는 진동이 느껴졌다.
젖어있는 털 뭉치의 느낌이 간지럽다.

안고 있는 강아지 때문에 뛰지도 못하고 최대한 빠르게 하율의 집으로 가고 있다.
내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미나랑.

"너는 왜 따라오는 건데?"

"장난해? 너 여자 집에 혼자 간다며. 그러니까..따라가지."

미나는 그렇게 말하곤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도 눈을 빛냈다.

미치겠다.
아까 미나가 그렇게 집요토록 물어봐서 아는 누나라고 말해줬더니, 펄쩍 뛰면서 같이 가자고 계속 졸라댄다.

"친한 누나라고."

"글쎄 그렇지가 않다니까. 너 교회 누나, 교회 누나 하는 게 왜 그런지 알아? 여자는 다 늑대라서 그래."

"뭔..내가 당할 사람으로 보여?"

"그건 아닌데..씨. 그러니까 왜 뜬금없이 그러고 그래?"

미나는 짜증스러운 손길로 젖은 은발을 넘기며 내가 안고 있는 강아지에 시선을 주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왜 그랬는지.'

거세게 쏟아지는 비를 맞아가며 떨고 있는 강아지를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었다.

사람이라면 그걸 보고 어떻게 참나.

'애초에 내가 개를 좋아했던 탓도 있긴 한데.'

사람은 각자 시커먼 욕망을 품고 있지만 동물, 그러니까 강아지는 그렇지 않다.
오직 초롱초롱한 눈으로 주인만 바라보는 어여쁜 생명체.

전생에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나한테 등을 돌렸었어도.

동네를 하릴없이 거닐  마주친 강아지들은 그런 나를 보고도 반가워 꼬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폐인 같았던 겉모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키울 수는 없었지만. 그런 상태에서 무책임하게 데려왔었다가는..'

죄를 지었겠지.

그렇게 회상에 젖어있자니, 미나가 답답하다는  말했다.

"일단 알겠으니까 나도 같이 갈 거야."

"안된다니까? 애초에 누나한테  있다고 말도  했어."

"너 강아지 안으면서 주소  수 있어? 내가  줄게."

미나는 손에 들린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고는 자신의 필요성을 과시했다.

당연히 볼 수는 있다. 좀 불편할 뿐이지.

하지만 도대체 얼마나 같이 가고 싶으면 미나가 저러나 싶어 체념하며 한숨을 쉬었다.

하율 누나한테는 잘 설명해야지 어쩌겠나.

"마음대로 해..콜록!"

개털 알러지가 생각보다 심한  같다. 기침이 안 멈추는  보면.
미나는 그런 날 연민이 담긴 듯한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개 나한테 넘길래? 너 상태 너무  좋아 보여."

여자애 앞에서 뭔  쪽인가.
겨우 개털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 취급을 받고 있으니.

그랬던 탓일까, 나도 모르게 퉁명스레 말이 나왔다.

"됐어. 그러면 얘 또  맞잖아. 주소나  봐줘."
"...."

미나는 내 말을 분명히 들었음에도 가만히 있다가, 너무 줄여서 몸매가 두드러질 정도였던 새하얀 교복 상의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갔다.
중앙에 매달려있던 검은 넥타이도.

"미나?"

미나는 내가 묻는 말에도 대답 없이 옷을 벗어갔다.

그에 당황해서 미나에게 시선을 뗀 순간 내 어깨 위로 뭔가가 걸쳐졌다.

슬쩍 어깨쪽을 보니 미나의 교복이었다.

"..좀 걸치고 있어 봐."

"아니 왜.."

의문을 토해내려는 순간 역전세계의 상식이 다시 한  떠올랐다.
여기선 여자가 남자한테 겉옷을 걸쳐주는  당연시되는 행동.
마치 짧은 치마를 입고 앉아있는 여자에게, 남자가 그 위를 옷으로 덮어주는 것처럼.

비맞고 있는 나. 그걸  미나가 무슨 생각으로 행동했을지 답이 나왔다.

내가 그런 취급을 받았다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미안해서 됐다고, 너 다시 입으라고 말하려 했다.

그걸 보기 전까지는.

속옷만 입은 채 아무렇지 않게 서 있는 미나.
살  브래지어만 입어 예쁜 물방울 모양의 가슴이 보였다.
굴곡이 지어 내려온 가슴골의 끝엔 물웅덩이가 살짝 고여있는 게 야릇하다.

'....씹.'

 고자도 아니었고, 멀쩡한 '남자' 였다.

그러나 아직 이 세계에 대한 괴리감이 큰지라, 여자가 여자로 느껴지지 않았었는데.
그렇게 쌓아왔던 내 안의 단단한 철벽이 쩌적하고 조금씩 갈라져 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미나같은 미녀가 갑자기 스트립쇼라도 하는 것처럼 내 앞에서 속옷만 입고 있으니까.
내 의지완 상관없이 저절로 눈은 다음 목표를 찾아 미나의 전신을 훑어댔다.

넓은 골반에 착 달라붙어 있는 치마.

 길이가 너무 짧아서 살을 거의 드러내고 있는 뽀얀 허벅지에 빗방울이 타고 흘러내리는 광경.

그걸 멍하니 보고만 있으니 내가 이상했던 것인지, 고개를 갸웃한 미나가  얼굴을 쳐다봤다.

순간 몸이 굳었다.

'이런 씹..나 뭐하냐.'

여기서 얼굴을 홱 돌리면 뭔가 찔리는  있는 사람 같아 보일까 봐, 속마음과는 달리 미나의 몸에서 무심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아마도 혼이 빠진 사람 같을진대, 그런  보고도 미나는 오히려 살짝 미안한 얼굴을 했다.

"미안. 보기 그래도  참아. 그 하율인지 뭔지 하는 언니네  가면 다시 입어줄게."

나는 가까스로 냉정히 유지한 표정을 미나에게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달리 속은 뭔가에 짓눌러져 뒤죽박죽이었다.

비가 와서 다행이었다.

내 멍청해 보일지도 모를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테니까.

#3


혜민이 들고 있던 우산에 빗줄기가 내려와 꽂힌다.

우두둑하는 소리를 들으며 혜민은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아...씨발."

혜민은 담배를 벌써 3대째 피우며 쓰린 속을 달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수영이 안타깝다는 듯 바라보았다.

"야 정혜민. 괜찮냐? 답지 않게 왜 지랄이야."

"..상사병."

"진짜 지랄한다..세화때문에 그러냐? 포기해 그냥. 이미 미나한테 마음 좀 있는 거 같더만."

"그게 되면 이러고 있겠냐?"

혜민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처음엔 얼굴도 반반하고, 눈가에 문신도 있으니 좀 쉬워 보여서 접근했다.

그 때문에 승민이 세화를 괴롭힌 날, 점수 좀 따고자 도와줬었는데.

거기까진 좋았다.

하지만 세화가 자기 이름을 부르며 고맙다고 미소 지었던 순간, 혜민은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욕지기를 참았다.

예쁘면서도 무섭기까지 한 얼굴로 웃어주는 세화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거기에 빠져버린 혜민은 그와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해버렸다.

둘이 오순도순 집에서 섹스  판 끝내고 같이 담배 피우면서 좋았냐고 물어보고.
이거 내 남자친구라고 핸드폰 배경화면에 사진까지 걸어놓으며 주변에 자랑하는 상상.

생각만 해도 좋아서 미칠 것 같았다.

그래서 천천히 다가가며 마음을 열려 했는데.

'미나는  만지게 해주는데?'

'미나니까.'

머리카락까지 만지게 해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던가.  둘은.

'미나가 예쁘다 해도..돈은 내가 훨씬 많아서 잘해줄 수 있는데. 엄마  키라도 가져와서 보여줄까..'

혜민은 급기야 말도 안 되는 생각조차 하며 다시 푸념했다.

"씨발..미나가 뭐가 좋다고."

"그쯤 하면 됐다. 우리랑 거리까지 두는  같던데."

"...이수영. 근데 요즘 왜 세화한테 접근 안 하냐? 진짜 나한테 양보한 거야?"

"양보는 무슨, 니 것도 아니면서. 그냥..좀 꺼려져서 그랬다."

뭔 개소리야. 그 미모가 꺼려진다고?
혜민은 이 년 눈깔이 뭘로 구성된 건지 진심으로 궁금해했다.

"안과 가봤어?"

"그런 말이 아니고..이 빡대가리년아. 그냥 처음엔 흔히 노는 애구나 싶었지."

"근데."

"이상하지 않냐? 맨날 땅딸보 새끼가 지랄해도 아무렇지도 않아하잖아."

"그게 뭐. 우리 세화는 성격 도도한  매력인데."

혜민의 반응에 수영은 답답한  하ㅡ하고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너 저번에 세화가 이상한 말로 땅딸보한테 씨부리는 거 듣긴 했어?"

"들었긴 했지. 그거 그냥 한국어랑 헷갈린 거 아냐? 러시아어랑. 세화가 말했잖아."

"그걸 믿어? 그때 세화 표정 봤냐? 입은 웃고 있는데 눈은  웃고 있더라. 그냥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이상해."

수영은 연이어 말했다.

"생각해봐라. 걔 토시에 테이프 덕지덕지 붙인 거, 왜 그럴  같은데. 너도 알지?"

"아니 그냥 조그만한 거 했나보지..뭔 대수라고."

"만약 까봤는데 존나 크게 했으면? 혜민아. 그런 성격에, 문신에. 심지어 고향이 러시아야.
만약 뒤에 뭐 있으면 얘기가 달라져. 섣불리 따먹으려고 다가갔다가 칼 맞고 뒤질 수도 있다고.
그러면 감당돼? 우리 집안이 사업가 집안이지, 조폭이냐?"

"설마 세화가 마피아라고 말하는 건..수영아. 진짜 중2병 씨게 걸린 거다 너."

"누가 마피아래? 그냥 쎄하다 이거지."

"지랄 좀 그만해. 쪽팔리니까."

혜민은 수영의 말을 개소리로 치부했다.

사랑에 눈이  여자는 그만큼 뒤가 없었다.
애초에 말도 안 되는 소리기도 했고.

수영은 질렸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암튼 난 포기니까 너 계속해보고 싶으면 하던지."

"..그럼 이거 한 번만 들어봐. 내가 생각한 게 있는데.."


***

"..그니까 민우네 애들 불러서 살살 건들고..단체로 둘러싸였을  네가 백마 탄 기사처럼 세화를 구해낸다고?"

"..나도 쪽팔리긴 한데..다른 방법이 없잖아. 이대로면 미나한테 뺏긴다고. 나 진짜 세화랑 백년회로? 백년해로? 아무튼 그거 하고 싶다."

"걔가 그런다고..쌍팔년도냐 씨발. 야, 그럼 한 가지만 약속해라.  일 터져도 내 책임은 아니라는 거. 다 네가 감당해."

"제발..이수영. 이거 안 되면 진짜 그만할게.  번만 도와줘."

혜민은 두 손을 모아들곤 수영에게 싹싹 빌었다.

"다음에 진짜 한턱 쏠게."

수영은 그런 혜민에게 미친년이라고 짓거리며 내키지 않은 듯이 핸드폰을 꺼냈다.

"하이..씨발. 느낌 안좋은데..여보세요? 아, 민우야..난데. 혹시 통화 가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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