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적응(2)
이상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흔들리는 조명.
윙윙거리며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처음 보는 낯선 장소에 당황해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보려 했으나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내 머리를 뭔가로 고정해 놓은 듯, 목에 힘을 주어도 움직일 수 없었다.
더불어 내 팔과 다리도 끈 같은 거로 묶여있었다.
마치 수술대 위에 올라갔을 때 움직이지 말라고 몸을 고정해놓는 것 같이.
'이건 뭐야 씨발.'
어떤 미친 새끼가 멀쩡한 사람을 납치했나.
온몸이 꽁꽁 묶여있는 상황에 소리를 쳐 사람이라도 불러보려 했으나 목구멍에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온갖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꼼지락대고 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역시 의젓하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잘못해서 눈 다칠 수도 있으니까 묶어놓은 거 알지?"
가는 목소리와 청량한 음색이 들려왔다. 난 손쉽게 옆 사람의 성별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에 미친년이냐고, 왜 멀쩡한 사람을 묶어놓고 지랄이냐고 욕을 퍼붓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점점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뜨겁게 흥분했던 몸이 차갑게 식으며 머리가 냉철해진다.
곧이어 옆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더불어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도 점차 커져갔다.
뭔가 시작되려는 듯 여자의 인기척이 가까워짐을 느꼈다.
긴 팔을 입은 여자의 가느다란 팔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의 하얀 손에 들린 뾰족한 끝의 괴상한 기계가 진동하며 내 얼굴로 다가왔다.
난 당연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그러니 듣기 좋은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퍼졌다.
"끝나면 우린 진짜 가족이 되는거야."
그녀의 말에서 어떠한 이상함도 느끼지 못한 채, 눈을 감고 가만히 있었다.
기계가 진동하는 소리가 생생히 들린다. 기계가 내 눈가로 왔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럼..이 쪽 세상에 온 걸 환영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익숙한 이름을 꺼냈다.
"나탈리아 샤샤."
그 순간 장소가 소용돌이처럼 빙글빙글 섞이다 부서져내리며, 곧 다른 장소가 눈에 들어왔다.
맨 앞의 희끗한 칠판, 저기 무리 지어 서서 수군대고 있는 학생들.
명백한 교실의 모습에, 방금 그건 꿈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직도 시야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는 데다,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은 등이 느껴졌다.
온갖 감정들이 혼란하게 뒤섞인 탓에 나는 그중의 일부를 토해내듯 말했다.
근데 참 우연하게도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목소리가 내 선수를 쳤다.
"야, 일어나봐. 사람이 불렀으면 대답을 해야지."
"개..씨발. 뭐야."
얼떨결에 대화를 하는 것처럼 대답 아닌 대답을 해버렸다.
그러자 날이 선 목소리들이 내게 날아왔다.
"뭐, 씨발? 야, 너 지금 뭐라했어?"
"민우야, 얘 싸가지 존나 없다."
나는 이건 또 뭔 상황이야 하며 제대로 눈을 떠봤다.
그러니 아까 봤던 남학생 여섯 명이 내 책상을 둘러싼 채 서 있는 게 보였다.
'..뭐야 이 븅신들은. 왜 여기서 지랄이지?'
가뜩이나 좆같은 꿈 때문에 기분도 싱숭생숭 한 마당에, 우락부락한 남자 새끼들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절로 짜증이 났다.
거친 손길로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제일 가까이 있는 놈한테 말했다.
"..뭔데. 왜 자는 사람 깨우고 지랄이야."
말과 동시에 하품을하자, 대장으로 보이는 새끼가 화가 난 듯 말했다.
"친구야. 말이 좀 험하네. 나 심민우야."
민우인지 뭔지 하는 새끼의 말에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표정을 짓고 있으니, 옆의 남자들이 민우를 추켜세워줬다.
"풉! 얘 쫄았다."
"야, 알았으면 민우한테 사과해. 얘 아는 누나들한테 처맞기 싫으면."
그리 말하고 으스대는 저들의 표정을 보자 속에서 역겨움이 올라왔다.
민우란 새끼가 뭐 여기 유명한 일진이라도 되는 것 같은데, 하는 게 고작 여자 치마폭 뒤에 숨어서 호가호위하는 거라니.
그게 너무 가소롭고 웃긴 탓에,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병신. 좀 치는 새낀가 했는데, 하는 짓거리가 고작 여자 뒤에 숨어서 아양 떨기야?"
그리 말하고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않자, 민우가 정색하며 물어왔다.
"친구야. 적당히 하려 했는데 내가 지금 그게 안 될 거 같아. 마지막으로 기회 줄 게. 사과해."
"우르르 쳐 몰려와서 사람 자는 거 깨워놓고, 뭔 사과를 바래. 단체로 쳐 돌았나.."
민우가 협박하는 듯한 말을 하니, 나도 그의 속을 긁어댔다.
아무리 여기 남자라 해도 겉모습은 건장한 사내새끼들.
그 말인즉슨 존나 패도 별로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지 않는단 소리다.
먼저 시비도 걸었으니 명분도 있고, 꼬추새끼들이 땍땍거리는 것도 보기 싫었다.
원래 세계였으면 얼굴 뼈 정도는 부숴버렸을 텐데.
물론 전엔 격투기 선수라 제명이 무서워 그렇게까진 못했으나, 난 여기서 선수도 뭣도 아닌 일반인이라 제약이 없다.
민우의 눈을 식은 눈으로 바라보며 이 새끼들의 처우를 고민했다.
이 새끼도 나랑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다 뭔가 발견한 듯 헛웃음을 뱉었다.
"이거 봐라? 눈가에 문신이 있네? 어디서 가오야."
민우는 그리 말하며 자기 반팔을 걷어 어깻죽지의 살짝 크게 새긴 문신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말할 게. 이제라도 사과하면.."
나는 그가 자랑스레 드러낸 어깨의 문신을 역겹다는 듯 바라보다 민우의 말을 끊었다.
"네 좆만하게 잘 그렸네. 근데 왜 보여준 거야? 눈 썩으라고?"
씨발, 남자 새끼의 살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내가 눈을 찌푸리고 있으니, 민우가 한숨과 함께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부탁이라 살살 하고 갈라 했는데. 진짜 사람 꼴 받게 하네."
민우는 그리 말하며 내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나는 이미 책상에서 멀리 앉아있었기에 거기에 맞진 않았으나, 그 사실이 내 인내심을 유지해주진 않았다.
"야, 따라와. 뒤지기 싫으면."
킥킥거리는 패거리를 뒤에 두고 서 있는 민우는 내게 검지를 까딱였다.
난 그에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았다. 동시에 끓어오르는 화도.
정말 저쪽이나, 이쪽 세상이나 이런 새끼들은 꼭 있다.
쳐맞아봐야 정신을 차리는 짐승새끼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눈에 담았다.
끼리끼리 모여 이쪽을 보며 심각하게 속닥거리는 학생들과 교실 너머에서 날 구경하고 있는 아이들.
누군가 한 명쯤은 말리러 올 법도 한데, 생각보다 내 앞에 있는 새끼들이 유명한 악질들인지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내게 다가오려다가도, 패거리의 눈빛에 움츠러들곤 꽁지를 뺐다.
심지어 그중 한 명은 여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난 대수롭지 않게 패거리의 면면을 훑어보다 웃으며 말을 꺼냈다.
"아무도 없는 데로 가자. 너네는 잘 알지, 그런 장소?"
"왜, 여기선 쪽팔리니까 거기서 우리한테 빌려고? 걱정마. 그런 곳으로 가는 건 맞는데 니가 바라는 일은 안 일어나."
매섭게 쏘아붙인 민우는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러자 패거리가 경찰들이 범죄자를 이송하듯 날 둘러쌌다.
나는 속으로 휘파람을 불며 이 새끼들이 안내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세화가..시아언니랑 같이 일한다고?"
"응!"
혜민의 떨리는 목소리에 미나는 자기 뜻이 제대로 먹혀들어갔다고 생각했는지 해맑게 대답했다.
그와 반대로 혜민과 수영은 가슴이 철렁거리는 걸 느꼈지만.
수영은 화장실 세면대 위에 힘없이 걸터앉아있다가 뭔가 생각난 듯 급히 말했다.
"야 미나. 저번에 시아언니가 뭔 일할 남자 찾는다며. 그게 세화야?"
"맞아."
미나의 말에 그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다는 건 시아와 세화는 동등한 입장이 아니라는 의미.
심지어 고등학생인 미나한테 부탁해서 사람을 찾을 정도면 큰일은 아니었다.
그녀들은 최악의 경우를 상상한 탓에 굳어있었던 몸을 풀었다.
그녀들의 집안 정도면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나 골목을 쏘다니는 그녀들의 부모 같은 경우엔, 심혈을 기울이며 자식에게 주의를 시킨다.
골칫덩어리들이 혹시나 건드려선 안 될 사람을 건드리면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들어온 정보엔 암흑가에 대한 것도 껴있었는데, 특히 이시아가 문제였다.
뒷세계를 다스리는 그 여자의 외동딸, 그 가업을 이어받고 있는 성유진의 수족.
둘은 친구로 지낼 정도로 사이가 돈독하다고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뭣도 없는 일반인이 성유진의 신임을 받으려면 그만한 일을 했을 터.
그리고 그녀가 해낸 일의 사례를 알고 나선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뉴스에서 가끔 들려오는 스케일 큰 범죄의 향연 중, 이시아가 한 일도 분명 껴있을 테다.
고작 이제 23살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들 같은 양아치와는 차원이 다르다.
지금은 그녀가 뭘 하는진 모르겠으나 어찌 됐건 거물은 확실하다.
그리고 그런 그녀와 동업한다면 세화도 필시 암흑가의 자제 같은 게 맞다고 할 수 있겠지만.
미나는 세화가 '고용' 됐다고 했다.
저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년이 지가 무슨 말 했는지도 모르고 실실 웃고 있는 꼴이란.
이시아가 흔히 보이는 동네 양아치 언니인 줄 아는 게 병신 같아서 웃음이 나올 지경.
도대체 저런 년이 어떻게 그녀와 친분을 쌓은 건지 모르겠다.
아니었으면 진작에 무리에서 떨궈놨을 텐데.
혜민은 짜증에 차 미나에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그 언니가 잠깐 뭐 건전한 일 맡기려나 보지.
그리고 큰일 할 사람 찾으면 너한테까지 물어봤겠어?"
미나는 이게 아닌 데라고 말하는 것 같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내가 둘을 연결시켜준 게 아니라 시아언니가 세화한테 직접 말 한건데..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다그치려던 혜민은 미나의 탄성에 입을 다물었다.
"세화 싸움도 진짜 잘해. 시아언니 이길 정도로."
"거짓말 좀 적당히 해라. 이시아를..아니. 그 언니를 어떻게 싸움으로 이기냐."
미나의 말에 담긴 뜻은 아마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이 세화이니 함부로 건들지 말라는 뜻 일터.
어이가 없다. 이시아가 사람을 어떻게 박살 내는지 알면 저딴 말도 안 나올 텐데.
혜민이 코웃음을 치자 미나는 못 믿을 줄 알았다는 듯 자연스럽게 핸드폰을 꺼내, 동영상을 틀고는 자랑하듯이 그녀들에게 내보였다.
둘은 미나의 핸드폰에 얼굴을 가까이 붙였다.
동영상에는 링에서 대치 중인 세화와 시아가 보였다. 아마 스파링 같은 걸 하는 듯 하다.
글러브를 낀 세화는 시아가 무섭게 달려드는 걸 여유롭게 피해내며 그녀에게 살벌한 공격을 해댔다.
그 거센 공격에 이시아도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가드만 올리고 있었다.
혜민과 수영은 눈을 마주치며 입을 뻐끔거렸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보고 있는 거냐고.
둘은 얼떨떨해하며 다시금 동영상을 봤다.
어느새 링 위의 접전이 치열해지고 서로의 자세가 뒤엉킨 탓에 안 보였던 세화의 반대쪽 몸이 드러났다.
그의 왼팔과 목을 덮고 있는 문신들.
항상 토시와 테이프로 가리던 그 안에 저런 것들이 있었다.
작을 거라고 애써 치부했던 문신들은 너무나도 컸다.
크기와 별개로 일반인들이 할 만한 느낌이 아니었다.
그걸 본 혜민과 수영이 동공을 미친 듯이 흔들자, 미나는 빙그레 웃었다.
"한 번도 못 봤지? 세화 문신. 시아언니가 세화한테 마피아 아니냐고 물어보더라. 진짜 너무 웃겼어."
둘은 미나의 웃음기 어린 말에 아무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혜민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동영상을 돌려보다 의문에 의문을 띄웠다.
'왜? 이시아가 뭘 보고 마피아냐고 물어본 거지? 개씨발..대체 뭔.'
"그래서..세화가 뭐랬는데.."
혜민의 말에 미나가 대답했다.
"부정은 안 하고..그냥 왜 그렇게 생각했냐고 물어보더라. 세화도 어이없었나 봐. 푸핫!"
순간 둘의 머리가 치열하게 돌아갔다.
이시아를 누를 정도로 싸움을 잘하고, 러시아에서 왔으며, 이상한 문신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그녀와 일 얘기를 나눈 사람이라는 게 결정타였다.
어떻게 남고딩이, 이시아랑.
과민반응 일 수도 있지만 이시아의 이름값이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 종합적인 단서들이 한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방향의 끝은 그녀들이 사는 세계와는 다르게 너무나도 어두운 색깔일 터였다.
"야 미나야..시아언니가 세화한테 무슨 일 맡긴 지 알아?"
"몰라. 둘이 나만 빼고 얘기하던데. 그냥 나는 우연히 거기 낀 거라서 잘.."
창백해진 안색으로 말하는 혜민에게, 미나는 정말 모른다는 듯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사실 미나는 클럽 가드라고 순순히 말하면 그녀들이 세화를 만만하게 볼 수도 있기에 거짓말 한 거였지만, 그녀들의 뇌리엔 온갖 망상 섞인 추측이 스쳐 지나갔다.
고작 알바같은 걸 맡기려고 이시아가 접근했다고? 그럴리가 없다. 필시 뭔가 있을 터였다.
"..미나야. 세화 지금 뭐하고 있어?"
"내가 그렇게 말해줘도..미련 못 버린거야?"
"아니, 아니야. 그런 거 절대 아니니까 빨리 말해줘."
혜민이 그렇게 미나를 재촉하던 와중, 밖이 소란스러워져 그녀들은 화장실을 나와 원인을 확인했다.
"민우네가 전학생 데려갔다며?"
"아니 남자들은 도대체 왜 그런 대냐. 예쁜 애를 가만히 놔두질 않네."
소란의 원인은 여자애들이 떠드는 소리 때문이었다.
원래라면 저들에게 윽박질렀을 혜민은, 수영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떨리는 손으로 툭툭 쳤다.
"야, 야..이수영. 빨리 민우인지 뭔지 하는 놈한테 연락해. 그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