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후폭풍(2)
학교가 뒤집혔다.
저 말이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을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에엥-! 에엥-!
"거기 조심히 들어!"
"빨리 옮겨! 아, 예! 여기 응급환자인데요.."
본래라면 조용해야 했을 학교는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로 가득 찼다.
어느새 도착한 구급대원들이 남학생들을 들것에 싣고 있었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퉁퉁 붓고, 뼈가 다 으깨진 얼굴들의. 팔이 기괴하게 꺾인 학생도 가관이었다.
구급대원들이 열심히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을 때 또 다른 분야의 차들이 사이렌 소리를 내며 도착했다.
이런 미친 상황에 구급차가 오면 자연스레 경찰차도 따라오는 법. 차에서 내린 경찰들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신고 전화를 받을 때부터 남학생이 사람을 때리면 얼마나 때렸겠는가, 하고 살짝 무시했었는데.
"나 참..경찰하면서 이런 건 처음 본다. 채 순경. 믿겨지냐? 이걸 남학생 혼자서 했단다."
혀를 끌끌 차며 눈을 찌푸린 중년여성이 말하자, 신참티가 풀풀 나는 채 순경이라 불린 여자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저도..처음 봅니다. 이런 건."
그녀들은 창고 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둘을 제외한 나머지 경찰들도 믿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창고 안은 그야말로 조폭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바닥에 고여있는 피. 온갖 무기들과 덩그러니 남아있는 칼. 화룡점정은 들것에 실려 가는 학생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 폭의 그림처럼 눈앞에 그려진다.
"그러니까 진정하고 천천히 말해봐요. 류세화라는 남학생이랑 싸움이 일어난 다음..하아. 자, 심호흡-"
"흐윽, 잘 모른다고요. 그냥 집에 보내주세요."
경찰들은 다행히 사지가 멀쩡한 남학생들을 달래가며 이것저것 물어봤다. 하지만 패닉에 잠긴 아이들은 훌쩍댈 뿐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녀들은 한숨만 내쉬었다. 여섯 명중 네 명이 실려 가고 남은 건 저 둘. 지금 진술을 못 받으면 나중에 귀찮아질 게 뻔했다. 알아낸 건 고작 류세화라는 이름 하나.
그런 속마음도 모른 채 남학생들은 침묵을 지켰고 혜민과 수영이 각자 한 명씩을 맡아 위로하듯 어깨를 잡고 있었다.
"무조건 잘 모르겠다고 해..나중에 어른들이 다 해결할 거니까."
"먼저 무기 쓴 거 너네다..일단 입 열지 마. 니들이 건드렸던 애가 누군지..알지?"
그녀들은 위로하는 척 남자들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구급차와 경찰을 부르기 전에 이미 말을 맞춘 상황.
세화의 뒷배경도 말해줬고, 먼저 쇠파이프 같은 걸 쓴 것도 자신들이라는 걸 일깨워줬다.
그녀들은 분명 이렇게 시킨 적이 없건만, 자기들이 급발진 한 거라고도. 세화의 정체를 안 그들은 처음에 부들부들 떨다가도 연이은 설득에 맘을 돌렸다.
사실 마음을 돌렸다기보단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이다.
"정말 모르겠어요? 하나라도 좋으니까.."
"네.."
경찰이 간절하게 묻는 말에도 남학생들은 침묵 일변도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들은 미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이 남자애들도 싸움에 낀 건 확실한데 대답을 안 하니 돌아버릴 지경.
그나마 남자라 부드럽게 물어보는 거지, 여자였으면 진작에 위협이라도 해서 토해내게 만들었을 텐데.
경찰은 목표를 바꿔 혜민과 수영에게 질문했다.
"신고자분들은 뭐 좀 아시나요?"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그냥 와보니까 이렇게.."
둘은 자기도 정말 놀랐다는 듯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그러니 저 경찰 언니의 속이 타들어 가는 게 훤히 보였다.
자신들이라도 그럴 거다. 왜 싸움이 일어났는지, 도대체 어떻게 남학생 혼자 이런 참극을 벌였는지 알 수가 없으니.
진술을 거부한 게 최고의 선택일 진 모르지만 괜히 나불대다 그의 심기를 건드는 것보단 나았다.
그에 경찰은 결국 인내심이 바닥이 났는지 화가 난 눈을 하며 남학생들을 바라봤다.
"학생들도 싸움에 낀 거 압니다. 서로 힘 빼지 말고 처음부터 다 털어놓-"
"아이고! 이게 무슨 일이야!"
저 멀리서 비명 같은 외침이 들려오자 자리의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혜민과 수영은 소란을 피우며 다가오는 사람들의 정체를 확인했다.
구름같이 몰려오는 선생 중 담임이 보였다. 심지어 민호도. 저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진 둘은 이를 거칠게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
어쩐지 불안한 예감이 들더라니. 미나가 나를 이끈 곳은 하율과 왔었던 병원이었다.
심지어 남자간호사가 부르는 것까지 똑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류세화씨! 들어가시면 됩니다."
그 익숙한 호명에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가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또 오셨네요."
내 손가락을 치료해줬던 의사 앞에 앉자마자 추궁이 날아들었다.
그럴 만도 하지. 손가락을 꿰맨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또 응급실에 기어들어 왔으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옆에 계신 분도 달라지셨네요. 저번엔 다른 아가씨였는데."
...굳이 저런 말까지 할 필요는 없을 거 같은데. 혹시 여자 데리고 응급실 들리는 게 취향인 이상한 놈으로 보는 걸까.
우리가 교복을 입고 있으니 학생이라는 걸 알텐데, 미나를 살짝 의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거 같고.
옆의 여자가 바뀔 때마다 크게 다쳐오니 그런 생각이라도 든 건가 싶었다.
멍청한 놈이 계속 애인 갈아치우면서 만나는 여자한테 맞고 산다고.
'..그런 취급은 사양인데.'
그렇게 생각하던 와중 옆에서 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려보니 미나가 인형 같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귀엽긴 했지만 살짝 놀라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런 뒤 쟤가 왜 저러나 싶어 조용히 물었다.
"왜 그래?"
"...아니야. 근데 누구랑 왔었어?"
"하율 누나."
말을 들은 미나는 고운 미간을 살짝 찡그리다 표정을 풀었다.
가끔 드는 생각이지만 안 그런 거 같으면서도 제일 감정변화가 심해 보이는 게 미나 같다.
본래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거 같은데, 그날 이후로 뭔가 바뀐 느낌이다.
비가 거세게 내렸던 날.
"이번에는 어떻게 다치신 거죠? 이런 상처를 가지고, 설마 또 유리에 베였다거나.."
의사가 내 손바닥에 마취주사를 놓으며 책망하듯 말하자, 나는 가라앉은 눈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어쩌다 보니 칼에 좀 베여서요. 혼자서 뭐 좀 하다가 그랬습니다."
내 손바닥을 살펴보던 의사는 무감정하게 뱉어진 내 말에 고개를 저으며 얼굴을 내게 가까이 붙이곤 속삭였다.
"정말 본인 혼자서 한 거에요?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벌써 2번째니까 의심이 안 들래야.."
그 호의 섞인 추궁에 눈을 감고 살짝 고개를 도리도리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의사는 오지랖을 부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지라는 듯 내 손바닥을 보며 목소리를 키웠다.
"..후, 알았습니다. 신경은 저번과 다를 바 없이 문제없어요. 이따가 파상풍 주사 놔줄 테니까 꼭 맞고요."
의사는 그리 말한 후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으며 내 손바닥을 꿰맸다. 그로부터 바늘이 내 살을 얼마나 왔다 갔다 했는지 횟수를 세기도 힘들 때 쯤 모든 처치가 끝났다.
그리고 우리가 인사를 마친 뒤 응급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의사는 저번처럼 내 옆 사람을 따로 부른다거나 그러진 않았다.
덕분에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고 우리는 병원을 벗어나 집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널 잘 모르겠어. 정말로."
벽돌이 빼곡히 들어찬 바닥을 걸으며 거친 발걸음 소리를 내던 미나가 마음이 상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나는 저 말의 뜻을 곰곰이 생각했다.
아까 보여줬던 모습이 그렇게나 충격이었나? 하긴 미나 앞에서 내 비뚤어진 성격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무슨 말이야?"
"왜 아무렇지도 않아? 사람을 그렇게 만들어놓고, 그렇게 다쳐놓고도. 너 지금 표정이 어떤지 알아? 그냥 해야 할 일 했다는 표정이야.
사람이라면 당연히 죄책감이라거나! 아프다거나! 그런 얼굴을 해야하는데 너는-"
"먼저 덤빈 건 걔네야. 그에 맞게 대응을 해줬을 뿐이고."
그럼 맞고만 있을까. 그리고 이 정도는 허구한 날 경기 중에 맞은 거에 비하면 양반인 편이다.
미나가 여기 여자답지 않게 감성적인 건지 내가 이상한 건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기본 상식인데. 내 신념이 부정당하는 느낌에 눈을 게슴츠레 뜨자 미나가 또 그 얼굴로 변했다.
연인에게 배신당한 듯한 그 표정으로 말이다. 그거 말고는 딱히 표현할 방법이 없네.
"남자가 어떻게 그래? 아니면, 진짜 마피아 행세라도 하는 거야? 그때 보여줬던 모습들은 다 거짓이였어?"
그때 보여줬던 모습이라..내가 강아지를 데려갔을 때 얘기인 걸까.
그래. 그렇게 착한 줄 알았던 사람이, 사실 사람 뼈나 부숴대는 인간이니 정말 배신감이라도 느꼈나.
'근데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미나야. 우리 많이 친해진 거 같다."
"..너 그렇게 말할 거야? 진짜 걱정돼서 말해주는 거잖아."
내 가시 담긴 말에 우리 둘 사이의 좁혀졌던 간격이 벌어진다. 나는 무표정으로 일관하며 계속 걷다가 골목이 보이자 그 틈새로 미나를 잡고 이끌었다.
"가, 갑자기 왜그래! 이거 놔!"
미나의 팔을 잡은 손을 풀고 벽에다 그대로 밀쳤다.
"읏!"
미나가 하늘색 눈동자로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물어보자 싸늘한 표정을 띄우곤, 검지를 들어 미나의 어깨를 쿡쿡 찔러대며 말했다.
"잡종."
"...뭐? 너..뭐라 그랬어."
미나도 나와 같은 러시아 혼혈인 탓인지 민감히 반응했다.
그 사납게 바라보는 시선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여전히 미나의 어깨를 찌르며 말을 이었다.
"잡종. 애비가 창남."
그 순간 미나가 눈을 부릅뜨며 내게 달려들었다. 그 탓에 서로의 위치가 뒤바뀌어 이번엔 내가 벽에 등을 댄 모양새가 됐다.
역시 얘도 여자라 힘이 쎄긴 하구나 하고 생각할때, 미나는 내 가슴팍에 자신의 팔을 대고 날 짓누르며 울먹이듯이 말했다.
"너..어떻게 알았어. 진짜 알고 한 거면..진짜, 진짜 가만히 안 있어. 내가 그렇게 하게 만들지마.."
미나는 어느새 붉게 충혈된 눈꼬리에 물방울을 매달며 입술을 짓씹었다.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본의 아니게 그녀의 상처를 건드린 거 같다.
나는 순간 안에서 불쑥 튀어나온 연민인지 뭔지 모를 감정에, 손가락으로 미나의 눈물을 훔쳤다.
그러자 미나는 몸을 흠칫 떨었지만 자세를 풀진 않았다. 나는 살짝 은은한 웃음을 보이며 읊조렸다.
"들으니까 어때?"
"그게 무슨.."
"내가 걔네한테 들었던 말인데. 기분이 어때?"
"...."
"나는 안 참았어. 그냥 그대로 돌려줬을 뿐이지. 그게 잘못된 거라 생각해?"
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포시 내 가슴에서 팔을 거두며 뒤로 물러섰다. 나는 차갑게 벼린 시선으로 미나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살아온 방식을 네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 근데 있잖아. 그렇게 착한 척하던 네가 방금은 어땠을 거 같아?"
내 원래 세계에서 남자의 '상식'을 전함과 동시에 미나의 착한 척 하던 가식을 깨부쉈다. 하지만 미나는 뭔가 오해한 건지 눈을 질끈 감으며 대답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세화 너...진짜 평범한 사람 아니었어?"
미나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었고, 오히려 좋은 말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여기 남자 같다면 게이 같다는 말이니까.
미나가 착하고 얌전한 그런 친구를 내게서 원한다면 여기서 갈라서야 했다.
"알았으면 이제 그 정도만 하는 게 좋아. 나는 앞으로도 계속 이럴 거고, 네가 불편하다고 해서 바꿀 생각은 없어.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마치 절교를 선언하는 듯한 내 말에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미나를 한 번 봐주곤 늘 그렇듯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는 미나를 놔둔 채 몸을 돌려 골목에서 나갔다.
***
미나는 우두커니 서서 뒤죽박죽인 머릿속을 정리했다.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연인도 아닌 세화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품게 된 것은.
세화가 주먹질하는 걸 볼 땐 실망에 휩싸였고 크게 다친 손을 볼 때는 원망과 걱정이 앞섰다.
그래서일까. 항상 겉으로 유지하던 가면조차 벗어던지고 감정에 집어삼켜 져 하지 말아야 일을 저질러 버렸다.
세화를 힘으로 짓누를 때 속으론 울고 싶었다. 하지만 화를 돋우는 말에 그걸 계속해버렸고, 그제야 모든 걸 들어버렸다.
자기가 살아온 방식이 이렇다고.
원한이 쌓이면 배로 갚는. 사람의 얼굴을 으깨고, 뼈를 부숴도 전혀 표정 변화가 없는 게 그제야 이해가 됐다. 더불어 아픔에 민감하지 않은 것도.
'정말..마피아가 맞았구나.'
어떻게 남자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냐는 의문은 들지 않았다. 세화가 벌였던 일을 똑똑히 봤으니까.
혜민과 수영, 그 둘이 그래서 그렇게 무서워했구나. 세화 뒤에 뭔가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서. 그녀들이라면 처음에 뭔가를 알고 있었겠지.
미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세화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알고 그렇게 무서운 마피아라면 그런 허름한 집에 살 리가 없으니까.
세화를 처음 만났을 때가 사진 필름처럼 머리에 떠올라 눈을 감았다. 혼자 쓸쓸히 앉아 술을 비워내던 세화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무슨 사연이 있었는 진 모르겠지만 좋은 일은 아니었을거다. 그래서 생활을 다 청산하고 한국에 온 걸까.
미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럼 안 되는 거잖아..기껏 새롭게 시작했는데..'
기댈 사람도 없이 혼자 거센 풍파를 견뎌대다간 언젠가 세화라도 무너져내릴 거다.
미나는 결심이라도 선 듯 몸을 똑바로 세운 뒤, 골목을 벗어나 저 멀리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눈에 담았다.
그 넓은 등이 오늘따라 쓸쓸해 보여 자신도 모르게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세화의 그림자 뒤에 섰을 때 미나는 세화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미안해. 내가 잘 몰랐어. 서로 살아온 방식이 다른데..내가 상처를 준 거 같아. 하지만 그렇게는 못 놔두겠어, 세화야."
그녀의 물기어린 목소리에 그의 고개가 미나 쪽으로 향하며 거칠게 정돈 된 흑발이 찰랑거렸다.
미나는 저 흑발에서 풍겨오는 샴푸 향기가 피부에 내려앉음을 느끼며 말을 이었다.
"..내가 너 지켜주고 싶어. 그러니까...격투기 가르쳐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