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우리의 방식(3)
두근거리는 심장의 떨림이 손으로까지 옮겨간 듯했다.
미나는 끄응거리는 신음을 내며 펜을 내려놓고는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있어도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미나를 괴롭혔다.
물론 나쁜 쪽은 아니었다.
"자기한테 오면 못 빠져나간다고..?"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 경고를 날리듯 말한 세화가 떠올라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생긴 남자애가, 그런 대사를. 완전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얀데레 같지 않은가. 물론 그 얼굴이면 얼마든지 환영이긴 하지만.
미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남자 얼굴 같은 거, 신경도 안 썼는데 세화는 그 기준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안 그래도 그의 장난에 흔들렸던 마음을 붙잡으며 버티던 미나에게, 세화가 보여줬던 성격들은 그녀의 방벽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문신이 있으면 어때. 섹시하기만 하지.
성격이 거칠어? 그것도 나쁘지 않아.
'사실 사람 팬 게 대수도 아니고. 걔들이 먼저 시비 걸었잖아. 아..하필 강아지가 왜 거기 있어선.'
미나는 그 아름답고도 따뜻했던 광경을 떠올리며 흐뭇해 하다가 주방에서 들려오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슬슬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퍼지며 미나가 입맛을 다실 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나야! 와서 밥 먹어."
미나는 베개를 집어 던지며 곧바로 튀어나가 식탁에 앉았다. 기세와 달리 숟가락을 들지 않고 머뭇거리던 미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엄마..나 격투기 배워도 돼?"
맞은편에 앉은 엄마는 멈칫하며 미나에게 되물었다.
"격투기? 공부는?"
"공부도..같이 하면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미나에게 엄마는 엄한 눈을 하며 캐묻기 시작했다.
"딸. 갑자기 왜 그래?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남자 만난다더니."
"이미..만난 거 같아. 아니! 아직 사귀는 건 아니고. 걔한테 격투기 배우려고..지켜주고 싶어."
연이어 날아올 노호성에 눈을 질끈 감은 미나는, 생각보다 조용하자 슬그머니 눈을 떠 엄마를 바라봤다.
온갖 착잡한 감정이 엄마의 표정에 드러난다. 미나가 누구를 닮았는지 딱 봐도 알 것 같은 푸른 눈동자에 기특함이 담긴다.
"딸. 엄마가 항상 미안했다. 엄마가 네 아빠랑 그렇게 헤어진 탓에 네가 남자 안 만나는 것도 알았고."
"엄마..내가 말했잖아, 그건 상관없다고."
미나의 울적한 말에 엄마는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미안하다. 아무튼 네가 행복하면 엄마는 다 좋아. 걔랑 같이 운동하면서 연애질을 하든, 뭐든 다 좋다. 피임약이나 좀 사다 줄까?"
"아니! 아, 그런 목적 아니야!"
"흠..그래? 아니 남자애가 아무리 운동을 잘해도 그렇지..걔한테 배운다는 건 솔직히 사심때문 아니냐? 좀 서로 깔아뭉개기도 하고. 응?"
"아니라고!"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치는 미나를 보며 껄껄 웃은 엄마는 한 번 놀려봤다고 말하며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미나는 원망 서린 눈으로 잠깐 엄마를 흘겨보다 참 짓궂다는 듯이 살짝 웃고는 젓가락에 손을 가져갔다.
***
도시의 매연에도 살아남아 희미하게 빛나는 별이 퍼져있는 밤하늘을 올려다봤다.
이러고 있으니 날 귀찮게 하는 모든 일이 먼지로 변해 사라지는 기분이다.
역시 머리 복잡할 땐 이런 게 특효약이지.
다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 뒤 차근차근 정리해보기 시작했다.
혜민이 거의 다 내게 진행되려 했던 학부모들의 고소를 막았고.
남은 건 오직 주동자의 엄마인 검사 나리. 그 년만 문제다.
연기인지 갑갑함인지 모를 것이 가슴을 메웠다.
자꾸만, 자꾸만 뭔지 모를 충동이 인다. 분명 쉽게 쉽게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 내가 떠올리지 못 하고 있는 거 같다.
순간 나도 모르게 검지에 힘이 들어가며 귀한 담배가 찌그러질 뻔했다. 그에 놀란 나는 급히 손가락을 떼곤 입에 물며 눈을 찌푸렸다.
이렇게 피면 가오잡는 거 같아서. 하지만 선호하는 방식은 아니었음에도, 마음과 달리 입은 저절로 움직여 뻐끔거렸다.
그렇게 조금 있다가 생각했다.
이게 뭔 병신 같은 짓인지.
연기가 자꾸만 눈으로 들어가 따끔거리자 물고 있던 담배를 짜증스레 투-하고 뱉고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왕 기분도 꿀꿀해진 거, 하율이 보낸 강아지 사진이나 보려고.
그렇게 액정을 메운 새끼 강아지나 구경하다 문득 하율의 말이 생각났다.
'나중에 강아지 보러오라 했지.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지금 갈까? 내일 더러운 꼴 보기 전에. 나쁘지 않네.'
벌써부터 그 검사아줌마랑 네가 내 아들 때렸니 뭐니, 할 걸 생각하니 좆같아져서 생겨난 충동적인 감정에 바로 하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누나. 혹시 오늘 일 나가요?"
-세화구나. 오늘은 쉬어. 저번에 대타 한 번 서줬거든..
하율의 피곤함에 절은 목소리가 흐물거렸다. 그에 가도 될지 말지 살짝 고민하다 살짝 말을 꺼냈다.
"누나 많이 피곤해 보이네요. 사실 강아지 지금 보러 가도 되나 해서 전화했는데.."
-..어. 진짜?..그냥 해본 말인데 진짜로 오려고..?
"아. 죄송해요. 예의상 한 말이셨구나."
잘 몰랐다.
예의상으로 한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나를 자책하며 전화를 끊으려 하자, 하율의 절박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아니, 아니! 그런 말이 아니야. 와도 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음..그럼 혹시 맥주 같은 거 있어요? 속이 답답해서 그런데..실례였다면 죄송해요."
하율은 고민하는 듯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일단..알았어. 힘든 일이라도 있나 보네.
"그냥..좀 있네요. 그럼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나는 기대감에 찬 표정을 지으며 하율의 집으로 걸어갔다. 강아지 보는 것도 좋은데, 거기다 오랜만에 만끽할 맥주의 청량함까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진다.
사실 맥주 정도면 술도 아니지. 그러니 착한 하율이 맥주 정도야, 하며 허락한 게 아닐까.
왜 내가 맥주 하나 못 구해서 이딴 고민을 해야 하는지, 하고 안에서 불쑥 하고 치켜든 삐딱함에 올라갔던 입꼬리를 삐죽거렸다.
그러나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음을 입에 내걸었다.
마시기만 하면 됐지.
***
그렇게 도착한 하율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니 저번과 비슷한 차림새의 그녀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어, 어서 와."
"잘 지내셨죠?"
받은 인사를 되돌려주면서도 내 시선이 자연스레 하율의 다리로 향했다.
'돌겠네.'
또 그 돌핀 팬츠다. 베어 물고 싶게 생긴 포동한 허벅지에, 가느다란 종아리를 한번 꾹꾹 눌러보고 싶었다.
이제 나도 슬슬 이 세계에 적응이 돼가는 걸까.
여자가 다 남자같이 바뀌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예뻐도 성욕이 들끓진 않았는데, 지금은 아래에 살짝 피가 몰리는 정도는 된다.
..전생에 운동만 하느라 여자 경험이 없는 것도 한 몫 했다.
이 세계에서 남자는 여자와 자고 싶다 하면 프리패스지만, 뭔가 그러기엔 내 상식이 붙잡고 있었다.
당장 눈앞의 한 손으로 잡을 수 없을 듯한 큰 가슴을 움켜잡으면, 하율은 얼굴을 붉히면서도 좋아라 하겠지만 뭔가..뭔가 그랬다.
하율의 하체에서 시선을 뗀 뒤,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향기로운 냄새가 풍겼다. 딱 봐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는 느낌이 났다.
"누나, 뭐 뿌렸어요?"
"응? 설마 냄새 안 좋아? 미안. 아무래도 여자 혼자 사는 집이라..뭐라도 뿌릴 걸 그랬네."
'그럼 사람의 냄새라는 건데. 누나 피부에서 저런 체향이 난 단 말이지..'
그 생각을 하니 또 부글부글 끓으려 하는 감정을 억누르려 말을 돌렸다.
"강아지는요? 아, 이름은 지었어요?"
"응. 그냥 마루라 지었어."
그 심플하면서도 귀여운 이름에 웃음이 지어졌다. 내 웃음을 보니 자기도 기분이 좋아졌는지, 하율은 싱긋 웃었다.
"일단..방에 들어가 있어. 맥주 꺼내올게. 아, 맞다. 알레르기는 어떡해?"
"만지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에요. 다음엔 약이라도 먹고 오죠 뭐."
"그, 그래..다음에는 약 꼭 먹고와."
하율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나를 방으로 안내한 뒤 맥주를 가져온다며 다시 나갔다.
그 덕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나를 바라보는 노란색 털 뭉치와 눈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귀엽다라는 말에 딱 어울리는 생명체를 바라보며 살짝 웃고 있으니 하율이 문을 열며 맥주 두 캔과 함께 들어왔다.
"자, 여기."
"고마, 아. 차거."
하율이 배시시 웃으며 차가운 맥주를 내 볼에 가져다 댄 덕에 저런 소리가 나왔다.
"저번에 너도 그랬었지? 그 복수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하율을 쳐다보니 그때가 떠올랐다. 내가 하율의 뒷목에 차가운 커피를 갖다 댄 날.
그때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네. 하율도 장난기가 많이 늘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맥주를 깐 뒤 한 모금씩 홀짝였다.
하율도 그제서야 나를 따라 맥주캔을 입에 대고 목구멍을 꿀렁이며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얘기의 주제는 거의 강아지에 관한 얘기였다. 하율은 아직 나에 대해서 질문하는 걸 조심하는 듯 일절 그런 얘긴 꺼내지 않았다.
"예방접종도 하셨어요? 아 돈 보내드리는 걸 깜빡했네. 집에 가서 곧바로 보내드릴게요."
"아냐, 아냐! 괜찮아. 그냥 마루 키우다 보니까 나도 치유 되는 느낌이야."
"그래도..응?"
귀를 쫑긋대며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마루가 경계심이 풀렸는지, 양반다리를 하고 있는 내 다리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반바지로 갈아입은 지 오래였던 탓에 털의 감촉이 그대로 느껴지는 찰나, 눈을 동그랗게 뜬 하율이 내게서 마루를 떼어내려 몸을 일으켰다.
"마, 마루야! 안 돼! 세화 알레르기 있어!"
"어, 누나? 위험.."
술이 약한 탓인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오던 하율은 다리가 꼬이며 내게로 쓰러지려 했다.
그에 강아지가 다치지 않게 번개같이 들어 옆으로 옮기곤, 넘어지는 하율이 다치지 않게 두 팔로 잡으며 그대로 쓰러졌다.
그렇게 몸을 햄버거처럼 겹치게 된 덕분에, 내 가슴 위를 짓누르고 있는 뭉클하면서도 물렁물렁한 감촉이 전해져왔다.
얼굴을 옆으로 돌리니 보드라운 뺨이 내 볼에 비벼졌다. 그 전체적으로 야릇한 느낌에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렸다.
그에 벗어나고자 하율의 귀에 대고 낮게 웅얼거리듯 말했다.
"..누나, 일단 일어나요."
"아 무거웠지..정말, 정말 미안."
귀를 부르르 떨며 황급히 몸을 일으킨 하율은 내게 연신 사과했다. 아마 함부로 남자를 깔아뭉갰다는 거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지만,
'사실 괜찮았는데.'
아니 오히려..기분 좋기까지 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그러면 지금의 이상한 분위기를 넘어, 오히려 빨간색으로까지 보이는 분위기가 형성될 테니까.
솔직히 나도 남자니 환영이긴 했지만..아직까진 죄짓는 느낌이 든다.
이 바뀐 세계를 이용해서 여자를 너무 쉽게 건드는 것도 그렇고, 여기서 선을 넘었다간, 앞으로 리미트가 풀린 내가 뭘 하고 다닐지 짐작이 안 간다.
'그리고 저렇게 착한 여자한테..하기는 좀 그러네.'
되도 않는 마지막 양심이었다.
정작 하율이 허리까지 살짝 접으며 고개를 숙일 때마다 큰 가슴이 파도처럼 위아래로 흔들리는 광경에서, 눈도 못 떼는 새끼가 할 만한 생각은 아니었다.
"..누나 괜찮으니까. 그만해요."
하율이 계속 저러면 내 물건도 서버릴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제대로 세워 본 적은 없으나 화가 나지 않고도 그 크기를 유지하는 내 물건이면, 반바지의 고간 부분을 찢을 것처럼 튀어나올 게 분명하다.
그리고 아직 '친한' 누나인 하율에게 그 광경을 보여주긴 싫단 말이지.
그녀의 어깨를 잡아 하율을 제지한 뒤에 진정시키고는, 현관문 앞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고마워. 누나가 술이 좀 약했나 봐.."
"신경 쓰지 마요, 진짜 괜찮으니까. 그럼 다음에 올게요."
울상을 짓는 하율을 살짝 안쓰럽게 쳐다보곤 도어락을 열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서 자기 위해 침대에 누웠지만.
그날은 이상하게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하율이 가진 몸의 감촉과 그 쓸데없이 예쁜 얼굴이 자꾸 머리에 아른거려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