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말이 죽은 거리(2)
"...."
미나는 눈에 띄게 머뭇거렸다. 애꿎은 커피만 들었다 놨다 하는 미나의 혼란스러운 시선이 내게 향했다.
저 반응을 보니 나도 아차 한 감이 있었다.
'또 저질러버렸네. 아니 진짜 궁금해하는 거 같아서 물어본 건데.'
정말 순수한 의도로 꺼낸 제안이었다. 내 문신을 만져보라는 건.
하지만 이제 와 부끄러워하며 아 미안, 이러면서 옷깃을 여매는 건 씹게이.
세계의 상식이 어찌 바뀌었든 나는 진짜 남자다.
앞의 여자 같은 미녀가 내 몸을 만지든 더듬든 얼굴을 붉히거나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단 얘기다.
물론 아무한테나 만지게 해줄 순 없겠지만.
"....끙."
"미나?"
저 조그맣고 하얀 얼굴의 입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난다. 긴 속눈썹이 위태롭게 떨린다.
말랑말랑 해 보이는 볼에 홍조가 띈다.
"괜찮아?"
얘가 왜 저러지. 평소 같았으면 호들갑 떨면서 당장 그만하라고 했을 텐데.
"..진짜 만져봐도 돼?"
그러지 않는 미나가 낯설어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으나, 미나는 내 눈빛을 잘못 해석했는지 허락을 구해왔다.
빨리 안 만져보고 뭐하냐는 재촉으로 알아들은 건가.
만져도 될지 말지 온갖 고뇌가 들어찬 듯한 표정이지만..
내가 먼저 말을 꺼낸 것도 있고, 거부감이 들지도 않은 탓에 고개를 끄덕였다.
"팔 만질 거야? 아니면 목?"
"...아니 너 미쳤..당연히 팔 아니야?"
푸른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에 맥빠진 웃음이 튀어나왔다.
"아니 고작 팔만 만질 거면 뭘 그리 고민한 거야."
"너..다른 여자한테도 이러는 거 아니지?"
"그런 적은 없는데..딱히 그래도 상관 없.."
"...."
미나의 한겨울같이 차가워진 시선에 딱히 이 정도야 상관없다고 말하려던 입이 쏙 들어갔다.
아 알겠어, 알겠다고. 그렇게 걱정하는 눈 좀 하지 마.
나는 결국 저 매서운 눈빛에 굴복해버리고 말아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 우린 친구니까 상관없잖아."
"아..친구. 친구지..다행이네. 그래에..다른 데선 그러지 마."
미나의 눈꼬리가 추욱 쳐졌다.
급기야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테이블에 박더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 모습이 좀 불쌍해 보이기도 했으나 답답함에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니 그래서 만질 거냐고 말 거냐고.
"자."
이대로 가면 끝도 없이 저러고 있을 거 같아 문신이 그려진 팔을 내밀었다.
하얀색의 피부 위로 검은색의 꽃들이 피어난 내 팔.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팔을 미나가 떨리는 시선으로 주시했다.
내 팔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휘둥그레진 시선으로 '진짜 해도 돼?'라고 물어보길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
만지든, 씹어먹든 맘대로 하라는 듯이 유리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쪽 팔은 내려놓은 채로 다른 손으론 커피를 쪼로록 빨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구경하고 있으니.
사락-.
팔에 가느다란 손가락이 내려앉는 느낌이 났다.
보드랍고도 조심스러운 손길에 반사적으로 움찔거렸지만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내가 별 반응이 없자 본격적인 마음이 들었는지, 점차 미나의 손가락으로 추정되는 것들에 자신감이 붙었다.
급기야 손가락에 힘을 주어 꾹꾹 눌러대는 느낌이 났다. 마치 마사지해주는 거 같기도 하고.
"어때?"
"어, 어! 미안..살이 부드럽네."
갑작스런 내 물음에 미나는 급히 손을 거뒀다.
"내 살 느낌 말고 문신 느낌이 어떠냐고 물어본 건데."
"아...그냥 살이랑 별 차이가 없구나..이 정도?"
얼굴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날 것 같이 붉어진 얼굴. 미나가 횡설수설하니 귀여워서 웃음이 다 나온다.
열기를 식히려는 듯 빨대로 연신 시원한 커피를 들이키는 미나에게 말했다.
"나중에 여우도 만져보고 싶음 말해. 만지게 해줄게."
"여우..? 아.."
고개를 살짝 옆으로 치켜들며 손가락으로 내 목을 톡톡 두드렸다.
미나는 그제야 내 말뜻을 알아챈 듯 한층 더 얼굴을 붉혔다.
싫다곤 말 안 하는 거 보니 생각은 있나 보네.
문득 창밖을 보니 퇴근하려는 직장인들이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다 마신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아..벌써?"
미나가 떠나기 싫은 듯 아쉽다는 표정을 해 보였지만 엉거주춤 일어난다.
그 사이 미나의 커피까지 집어 들고 쓰레기통 앞으로 갔다.
물론 다 마신 거. 먹는 걸 갖다 버리면 미친놈이지.
커피 두 개에 담긴 얼음까지 탈탈 털어 버렸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며 뒤를 돌아봤다.
"왜?"
"아..아니야. 고마워."
감동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의 귀가 쫑긋거리며 붉어진다.
설마 자기 쓰레기까지 버려준 거 때문에 그런가?
'여기 남자들은 손 하나 까딱 안 하나 보네.'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한 뒤 커피숍을 나왔다.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화야. 저번에 내가 말한 거 있잖아..너한테 운동 배우는 거."
나란히 걷고 있던 미나가 말을 걸어온다.
말을 흐리는 걸 보니 마음이라도 변했나. 그러면 좋겠다는 마음이 말에 섞여 나왔다.
"왜? 어머니가 허락 안 하셔?"
"응? 아니야. 바로 괜찮다 하던데."
살짝 들떴던 마음이 바닥에 가라앉는다.
"그래서..진짜 나한테 배운다고?"
"응!"
이 천진난만한 소녀를 어떻게 해야 할까.
그래, 다 좋다 이거야. 격투기 배워서 날 지켜주고 싶다고 했지.
하지만 나는 그런 거 필요 없는 데다 오히려 네 몸만 상하고 끝날 테니 마음 접어-
라는 질책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들어갔다.
그래도 날 위해서 그런 무리수라도 던졌을 텐데 저런 말로 미나를 아프게 하고 싶진 않았다.
때문에 내가 내린 결론은 이거였다.
미나의 결심을 꺾자고.
따스하고도 호의적인 그 마음이지만 압도적인 실력의 차이를 보여주면, 날 지켜주겠다는 말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깨닫게 될 거다.
"하루에 공부 몇 시간 해?"
"...응? 아. 딱히 시간은 안 재는데..하루 종일?"
"대단하네. 근데 네가 그 '목표'를 가지고 운동하면 그 시간, 절반으로 줄어들어. 그것도 몇 년 동안."
내 목표라는 말에 살짝 부끄러워했던 미나가 이내 입술을 살짝 깨문다.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안 가.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하, 일단 그 문제는..넘어간다 치고. 네 목표는 재능이 없으면 이룰 수가 없어."
"그래도..하기 전엔 모르잖아."
미나의 눈에 결연한 의지가 담긴다. 그게 답답해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사실 내 논리가 순 억지긴 했다.
미나가 프로 할 것도 아니고, 그럭저럭 쓸 만한 수준까지 올라오게 하려면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냥 내키지 않는다.
어린 여자애가 나를 위해 싸움 배우는 것도 그렇고,
공부만 하던 애를 괜히 쓸데없는 길로 빠져들게 하기도 싫었고,
미나가 격투기 같은 거 배우느라 다치는 것도 싫었다.
때문에-
여기로 와버렸다.
"일단 등록하고 옷 갈아입어. 바로 스파링 들어가게."
"스, 스파링? 이렇게 바로?"
결심이 서자마자 바로 미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여기였다.
내가 시아를 만났던 스틸레인 이종격투기 학원.
그리고 그 앞의 접수처.
"이걸로 결제해주세요."
"예..? 아, 예..근데 3달 이상 하시면 할인 들어가시는데 어떠세요?"
미나의 등록비까지 대신 결제하려는 나를, 전설의 동물 보듯 하던 직원이 본인의 임무를 다하려 했다.
"괜찮아요. 얘는 오늘만 하고 안 올 거라."
"..앗. 죄송합니다. 바로 해드릴게요."
직원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카드를 건네받았다. 옆을 보자 미안해면서도 황당해 하는 얼굴이 보인다.
"아니 왜 네가 계산하는..그리고 내가 오늘만 한다는 건 무슨 뜻이야?"
미나의 예쁘고도 가냘픈 목소리가 당황했는지 살짝 흔들린다.
"일단 옷부터 갈아입고 와. 그때 다 알려줄게."
"...알았어."
살짝 통보에 가까웠던 서늘해진 목소리. 아까와는 확 달라진 목소리의 온도에 미나는 몸을 움츠렸다.
그런 미나를 내버려두고 먼저 남자 락커룸으로 들어갔다.
이내 류세화란 이름이 새겨진 락커를 찾고 청바지에서 반바지로 갈아입었다.
끼익-.
락커룸의 문을 열고 나오니 미나는 아직 갈아입는 중인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빈자리에 앉아 스트랩을 묶으며 한숨을 쉬었다.
미나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결정한 방법은 이거였다.
스파링을 한 뒤에 미나를 철저히 발라놓고 나를 지켜주겠단 발상을 접게 하는 것.
여기 여자로서의 자존심을 흔드는 게 내가 선택한 방식이다.
아예 격투기의 격자도 모르는 생초짜와 전직 선수와의 대결이 말도 안 된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미나는 잘 모르고 있을 거다. 그냥 나를 싸움 좀 하는 남자애로 알고 있을 테니.
비겁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게 불필요하고도 알량한 호의로 격투기에 입문하는 걸 막고 싶었다.
'오지랖인 건 아는데. 그래도 이러는 편이 너한테 좋을 걸.'
그렇게 고개를 숙여 스트랩을 꼼꼼히 감아대고 있을 때쯤 앞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세, 세화야..나 왔어."
"왔으면 시작하자..?"
고개를 들자 부르르 떨고 있는 미나가 보였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사람도.
눈 끝에 자리한 눈물점.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예쁜 얼굴의 이시아.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엔 분함이 서려 있었다.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마침 팀장님도 오늘 운동하러 오셨나 보네.'
싸늘히 빛나고 있는 검은 눈동자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그래. 곧 출근하지? 근데 말이야, 내가 좀 이상한 걸 들었는데."
"무슨 말씀이시죠?"
천연덕스럽게 되묻자 시아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들었다. 네가 미나한테 운동 알려준다고. 근데 보통..쌩 초보자한테 스파링부터 가르치나?"
조금은 추궁하는 듯한 시아의 말에 그녀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마 그녀는 겪어봤으니 내 실력을 잘 알고 있겠지. 내가 일반적인 남자애가 아니란 것도 알테고.
시아는 지금 나를 남자가 아니라 하나의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지금 그녀의 눈엔 이렇게 보일 거다.
격투기 존나 잘하는 새끼가 운동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괴롭히려고 한다.
그녀가 소중히 아끼는 듯한 미나를.
정작 그 미나를 위해서 이러는 건데.
그런 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내키지 않아서 눈이 살짝 찌푸려졌으나. 여기서 죄송하다며 줄넘기부터 시키겠다고 하면은, 다 물거품이 된다.
그렇기에-
"저도 러시아에선 이렇게 배웠습니다. 각자 가르치는 방식이 다르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요."
"..그래. 일단 흥분해서 말한 건 사과하지. 그럼 한 번 보여줄 수 있겠나?"
시아는 사과를 건네오면서도 눈에 깃든 의심은 풀지 않았다.
우리 사이를 오가는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미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불안해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게 뭔지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계속 이러고 있을 순 없었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보여드릴게요. 미나, 글러브랑 헤드기어 다 껴. 그다음에 링으로 올라와."
"...진짜 하는 거야? 그래도 너 손 다쳤는데..괜찮아?"
푸른 눈동자에 걱정이 서렸다.
하지만 그 걱정이 담긴 여유도 곧 깨져버릴 거라 장담했다.
"괜찮아."
"끙.."
미나가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시아에게 보내자 그녀는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시아의 도움을 받으며 미나가 이것저것 착용하고 있는 사이 먼저 링에 올라왔다.
곧이어 거북이처럼 몸을 보호구로 둘둘 감싼 미나가 들어왔다.
"미나야. 네가 하려는 건 고작 공부랑 병행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야. 너는 지금 이걸 쉽게 보고 있어. 너무나도."
"아, 아니야.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어."
미나가 거세게 부정한다.
나도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질게 나가야 할 때다.
"알아. 네 마음은 잘 알고 있고, 고맙기도 해. 근데 왜 내가 니 도움이 필요 없는지 알려줄게."
"...나도 계속 열심히 하면..도움은 될 거야."
고개를 저었다.
"나는 처음부터 알 수 있어. 이 사람의 재능이 어떤지,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지. 실제로 몇 년 동안 배워놓고 몇 개월 배운 사람한테 지는 사람도 봤거든."
정말 걱정하는 척 말을 이었다.
"많이 억울하겠지? 공부 시간까지 줄여가며 열심히 했는데. 그러니까 알아야지. 네 재능이 어떤지."
사실 미나의 자존심을 꺾고 그 의지를 쓰러뜨리는 게 목적이었다.
당최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현타가 몰려들었으나, 경기가 시작되자 잡념 따윈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양팔을 쓰지 않는다 미리 선언했고, 그에 밑에서 지켜보던 시아도 정말 순수한 가르침인가? 하는 의문을 얼굴에 띄웠다.
그러나 시아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파앙-!
미나의 헤드기어가 반쯤 돌아갔다. 내 발차기에 의해서.
"내가 핸디캡을 줬는데도 이용을 못하잖아, 미나야."
팡-!
가녀린 몸에서 연신 북 터지는 소리가 난다.
-나 남자인 거 잊었어?
-좀 더. 잘 해봐.
-너무 느려. 그렇게 해서는 몇 년을 가도..
따뜻함으로 덮어씌운 목소리. 그 안에 담긴 날카로운 비수가 미나를 계속해서 찔러댔다.
결국.
"헉..헉."
"..그만하자. 집에 가서 다시 생각해봐. 이쪽은..너랑 안 맞아."
안타깝다는 척 미소 지으며 건넨 말에, 헤드기어 사이로 절망 어린 눈이 보였다.
아예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줄 생각은 없었기에 손수 미나의 보호구를 벗겨주며 위로했다.
사람이 다 잘할 순 없는 거라고.
마음 정말 고맙다고.
그 노력이 무색하게 침울해진 얼굴은 풀리지 않았다.
이러다 진짜 상처받겠다 싶어 어깨까지 주물러가며 미나의 기분을 위해 노력했다.
병 주고 약 주는 거였지만 정성이 통했는지, 살짝이었지만 미나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내 미나가 옷을 갈아입으러 락커룸에 들어가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미안. 네가 정말 배우고 싶어서 온 것도 아니고, 나 때문에 그런다니까 어쩔 수 없었어.
괜히 이런 거 하다 다치지 말고 공부나 열심히 해서 좋은 대학 가.'
지금은 분명 멀쩡한 어깨였지만 순간 욱씬거리는 느낌이 났다.
그때의 트라우마.
이렇게까지 미나에게 한 것도 사실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급격히 기분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그에 빨리 옷 갈아입고 집으로 가려 몸을 돌리려는 찰나.
어떤 가냘픈 손에 의해 어깨가 단단히 잡혀버렸다.
"..류세화. 일단 나가서 미나 보내고 얘기 좀 하지."
그와 함께 듣는 이가 다 추워질 정도로 시린 목소리가 내 등을 파고들었다.
그래, 이 분이 남아있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