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회한(3)
ㅡ날 지켜준다고? 그딴 거 필요 없으니까 제발..주제를 알아.
ㅡ너랑 나는 살아온 세계가 달랐다고.
저 말을 들었을 때 지금껏 세화와 쌓아왔던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 가루들이 단단히 뭉쳐 벽을 만들고, 그 위를 가시 돋친 철조망으로 덮어놓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미나가 절대 다가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처럼. 세화는 자신의 과거가 부담스러웠던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다고, 네가 어떤 삶을 살았든 간에 지금은 다 관뒀으니까 괜찮지 않냐고 말하려 했지만, 세화의 눈이 허락하지 않았다.
다채롭게 빛나던 금색이,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듯 흔들리고 있었기에. 그게 너무나도 외롭고, 불안정 해보였다.
미나가 건드렸던 게 사실 세화의 역린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미쳐버리자, 미나는 등을 돌렸다.
멍청한 자신의 행동이 모든 걸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 그렇게 한없이 자신을 자책한 탓에 여자답지 않게 눈물까지 찔끔 나와버렸다.
이제 세화와의 관계는 예전처럼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끝났어야 했었다.
"츕..츄릅..하아.."
서로의 혀가 이리저리 얽히며 야릇한 소리를 냈다.
미나는 이게 꿈인지 의심함과 동시에 가만히 눈을 감고 자신의 입안을 침범해대는 붉은 속살의 감촉을 마음껏 느꼈다.
그리고 처음 해보는 키스는 이제까지 살면서 겪었던 쾌락에 비할 바가 되지 않았다. 전교 1등을 했을 때도. 맛있는 걸 먹었을 때보다도 훨씬 높았다.
아래가 저릿저릿 울리면서도, 여기서 더 갈구하게 하는 것만 같다. 모든 여자가 바라는 종착지로.
무의식적으로 손을 올려 세화의 허리를 감쌌을 때, 미나는 퍼뜩 놀라며 손을 내렸다.
아직은, 그런 사이가 아니니까. 세화의 의중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니까.
"..쪽, 하아, 세, 세화야 이제..그만. 읍."
남자가 먼저 키스해오는 것도 놀라운데, 심지어 매우 거칠다.
그게 오히려 세화답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점점 허리가 녹아내릴 것만 같아 조심스레 혀를 섞던 입을 뗐다.
"..왜? 별로였나?"
"아, 아니..좋았어..진짜로...아.."
서로를 삼키던 입술이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침이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의 입술과 자신의 입술을 잇는 그것이 너무 외설적이라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만 붉힐 때.
세화가 눈을 내리깔며 검지로 침을 떼어냈다. 그 일련의 과정엔 부끄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미나가 세화를 바라봤다.
"근데..갑자기 왜 그런거야?"
"좋았지?"
"어, 어? 좋긴 했지.."
"그럼 이제..내 옆에 있어. 아니, 있어야 돼."
모진 말을 뱉으며 가소로움을 담고 있던 얼굴은 사라진 채 세화는 만족스런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반달 같이 접힌 눈매에 담겨 있던 금색 구슬들이 소유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욕망과 함께.
처음 보는 낯선 모습에 미나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경계심에 부르르 떨었다. 동시에 갈가리 찢겼던 마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만족감이 채워졌다.
미나는 기대감에 달달 떨리는 입술을 열어 희망 어린 말을 내뱉었다.
"그럼..사귀자는 거야?"
"...."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자신의 빨개진 얼굴과 달리, 세화는 살짝 창백히 질린 안색으로 괴로운 듯 이빨로 입술을 베어 물었다.
그 명백한 거부의 의사에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그럼 왜 먼저 키스하고,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건..안 되겠네."
"...왜?"
"모르겠어. 그냥 안 돼."
매몰찬 거절에 살짝 서운해지려 하다가도 세화의 표정을 보곤 울상이 되려던 얼굴을 풀었다.
절대 말하지 못할 아픈 과거라도 있는 사람 같아서. 그런 사람한테 뭐라 하겠는가.
어차피 아쉬운 쪽은 미나니, 일단 괜찮다고 말하려는 찰나였다.
"만족이 안 돼?"
"어? 아니 그건 아니고..그냥 의아했어."
고개를 갸웃거리는 세화가 계속해서 살짝 낯설다. 하지만 이런 면모도 있었겠지, 하며 말을 꺼냈다.
"그럼..나중에 연락해도 되지?"
"당연하지."
세화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 웃음이 미나에게 아직 문은 열려있다고 말해주는 거 같았다.
그에 가슴이 벅차오르다가 조금 전까지 있었던 상황이 생각난 탓에 입술을 매만졌다. 누군지도 모를 것의 액체로 촉촉해진 입술.
미나는 뜨거워진 얼굴을 한 손으로 덮었다.
"나, 나중에 봐! 먼저 갈게!"
"잘 가."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온 미나는 음식 준비를 하고 있던 엄마를 껴안으며 방방 뛰었다.
엄마에게 뭐 잘못 먹었냐며 국자로 맞을 뻔했지만 미나의 헤벌레한 얼굴은 펴지지 않았다.
***
멀어져가는 미나를 응시했다. 손가락으로 입술을 훔치며 첫 키스를 상기했다.
좋았지. 위험할 정도로. 미나를 붙잡으려고 했던 것에 오히려 내가 더 흥분했으니.
이제 미나에게서 탄생하는 감정들이 나에게만 향하면 된다.
하지만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
그래서 더..필요할 거 같은데.
"흐음.."
턱을 매만지다 문득 소름 끼치는 감각에 머리칼을 감싸 쥐었다.
이상하다. 이게 내가 가지고 있던 것들이 맞나?
피부가 따끔거렸다.
뭔가를 강렬히 원하는 듯 심장이 쿵쾅대면서도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 냉기가 지금 느끼고 있는 심정을 정확히 인지해버리게 한 탓에 욕설을 내뱉었다.
"씨발..뭔데."
언제부터였지. 나도 내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검사가 죽었을 때? 애들을 반 죽여놨을 때? 지금?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찡그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답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아니까.
'샤샤. 설마 너 때문은..아닐거라고 믿는다. 너도 힘들었잖아.'
안에서 휘몰아치는 감정은, 샤샤가 보여줬던 풍경과는 많이 달랐다.
그랬던 새끼가 이런 걸 품고 있을 리가 없다.
바스락.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없는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소리가 들려온 곳을 날카롭게 주시하다 다가가 보라는 속삭임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야옹.
고양이 소리가 들리자 허리춤에서 손을 뗐다.
문득 내가 뭐하나 싶어 긴장으로 점철됐던 몸을 풀었다.
에휴-하고 숨을 뱉으며 고개를 젓다 집으로 돌아갔다.
바스락.
***
첫 출근 하는 날이지만 오늘도 학교는 가야 했다.
그런 결과에 의거하여 난 지금, 교실에서 지루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띵동-댕동-
휴식종이 울린다. 난 곧바로 일어나 미나의 뒤로 돌아가 뒤에서 살짝 안았다.
품 안에서 흠칫했던 미나의 귀가 새빨갛게 익어있었다. 한 입만 물어보고 싶게 만드는 사과같았다.
"보, 보기 좋다. 하하."
".....그러게."
저번 일 이후로 서먹해진 혜민과 수영이 다가와 축하 아닌 축하를 건네자, 미나의 머리칼을 잠깐 쓸어내리다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미나가 내 품에서 황급히 빠져나오며 화, 화장실 좀 갔다 올게, 라고 말하곤 반을 나갔다.
나는 미나가 나간 문을 게슴츠레 바라보다 미소를 머금고 그녀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요즘은 어때? 살 만해?"
"어..어..그, 그렇지."
"세화 너가 편의 봐준 덕분에..잘..살고 있어."
내 살가운 말에 그녀들도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말했다.
그게, 거슬린다. 분명 내가 말해놓은 게 있던 것 같은데. 왜 아직도 뭉그적거릴까.
혜민은 내버려두고 수영의 눈을 금방이라도 파버릴 듯 바라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혜민이는 일단 넘어가고. 수영아."
"..응."
"너는 한 것도 없으면서..보고 한 통이 없네?"
"..우리 집안이 딸려서..할 수 있는 게 없었어. 보고도 그래서..못했어. 미안."
수영의 이빨이 다닥다닥 부딪힌다. 난 분명 웃고 있는데, 나 보고서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럼 기분 상해.
"농담이야. 돈은 잘 준비되고 있지?"
둘의 고개가 미친 듯이 끄덕인다.
"돈 세탁이 좀..필요하대. 나중에 직접..전달할 게."
"어, 어. 계좌로는 못 보내고 나중에 집 주소 보내주면.."
살짝 의문이 들었다. 고작 2천만 원에 세탁이 필요한지에 대해서.
물론 큰돈이긴 한데..말을 보아하니 가방에 꾹꾹 담아서 집까지 찾아올 것 같다.
뭐 착실히 준비는 하고 있다니 좀 있으면 결실을 받아볼 수 있겠지.
"그래. 부탁해. 그게 너희 목숨..아니다."
저들의 오해를 이용해서 말끝을 흐렸다. 끝 부분은 알아서 상상하게 하고, 그녀들이 좀 더 빠릿빠릿해지는 걸 기대하며.
그렇게 말하고는 그녀들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긴장으로 딱딱해진 어깨가 내 노림수가 잘 먹혀들어갔다는 걸 증명해줬다.
그날 하굣길에서도 미나의 달콤한 감정을 받아먹으며 집으로 들어왔다.
핸드폰을 보니 5시 30분. 출근 시간은 8시지만 내가 신입이기에 그보다 일찍 가봐야 했다. 뭐 좀 인수인계도 받고 그래야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걸친 교복을 모두 벗어 던져 샤워를 마친 뒤 옷을 갈아입었다. 이제 나시 위에 하나만 걸치면 끝이라 고이 접혀있던 스카잔을 만지작거렸다.
하율 누나가 골라줬던 건데. 이게 이렇게 쓰이네.
소중한 걸 다루듯이 비단 같은 겉면을 쓸어내렸다.
이내 품이 큰 스카잔의 양팔에 손을 밀어 넣으며 채비를 마치고, 택시를 잡으려 길가에 섰다.
"클럽 가세요?"
"....?"
술에 좀 취한 듯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은 다 덮은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내가 뭐냐는 듯 쳐다보자 여자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 복장이 화끈하셔가지고, 클럽 가시나 해서요. 저도 어제부터 달렸거든요. 이름이..발키리였나.."
살짝 이상한 여자였다. 여기까지 오며 마주쳤던 여자들은, 날 흘끔거리다가도 겉옷을 허리까지 내리면 시선을 돌리던데.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옷이 커서 그랬지.
저 멀리 끝에서 택시가 올 기미조차 안 보이니, 심심한 김에 어울려주기로 했다.
"저도 오늘 거기 가고 있어요."
"시간이 많이 이른데..아, 근처에서 한잔하고 가시려나 보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거기 소문이 안 좋던데요. 가끔 오는 미친 여자 한 명이 남자 불러서 이상한 거 먹이고 논다고..직원도 건든대요."
"처음 듣는 얘기네요."
"다들 알음알음 넘어가는 거지, 자주 다니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거기는..안 가시는 게 좋을 텐데."
"충고 감사합니다."
신뢰성이 하나도 없는 얘기였기에 대충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전했다.
여자는 답답한 듯 모자챙을 살짝 접었다 폈다 하며 말했다.
"아니.."
"네. 알아요."
"..즐겁게 노세요."
결국 설득에 실패한 여자가 한숨을 내쉬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에 물끄러미 바라보다 시선을 거두고 잠시 후, 택시에 타며 발키리로 출발했다.
***
"후..망할 년. 그깟 것도 승인 못 해서 여기까지 오게 만들어."
"고정하십시오. 어쩔 수 없으셨지 않겠습니까."
"이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따로 보고도 필요 없고."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린 금발의 여성에게, 뒤에 서 있던 양복을 입은 두 명의 여성이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이내 혀를 찬 여성이 신경질을 내며 어깨에 걸친 기다란 코트를 팔에 둘렀다.
"존나게도 덥네 시벌."
"아직 한국이 여름이라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그냥 혼잣말이니까 다 닥쳐."
순식간에 둘을 침묵하게 한 여자는 걸음을 옮겼다. 뒤에 선 그녀들도 주변을 경계하며 그 뒤를 따랐다.
그렇게 슬럼가를 연상케 하는 판자촌을 가로질러 5분쯤 걷자 여자가 귀신이 나올법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당장이라도 철거가 된 들 이상하지 않을 듯한 건물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복도가 보였다.
새카맣던 복도에 후레쉬 불빛을 킨 여성이 발걸음을 뗐다.
복도 양옆에 녹슬어있는 철문들을 훑어보던 그녀가 성큼성큼 걸으며 한 철문 앞에서 멈춰 섰다.
주먹을 쥔 그녀가 문을 두드렸다.
쿵,쿵.
"열어."
묵직한 음색의 러시아어. 심지어 이런 후미진 곳에선 알아듣기는커녕, 들을 사람도 없을 거 같았지만.
"뉘쇼?"
철문 사이로 난 창이 끼기긱 열리며 주름진 여자가 퉁명스레 러시아어로 말해왔다.
"보면 몰라? 나잖아 시벌. 빨리 열어."
"...."
철문이 끼기긱 열린다. 주름진 여자의 손이 튀어나오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로자. 어쩐 일이여 너가."
"설명하기 좀 길어. 그냥 물건만 좀 건네줘. 내 뒤에 애들 것도."
로자가 뒤를 가리키자 건장한 여자들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웬일이랴. 공식 아녀?"
"묻지말고. 아무튼 빨리 들여보내 줘. 골라보게."
늙은 여자의 눈매가 찡그려진다. 골골대는 목소리가 로자에게 물어왔다.
"누구 때문에 이러는 거여?"
로자가 푸석푸석한 금발을 손가락으로 쓸어넘겼다.
"망할 조카 놈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