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계약(1)
달리는 차 안.
나는 문에 살짝 붙어 창밖의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것만 구경하고 있었다.
집 근처까지만 해도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강남의 중심부로 깊숙이 들어올수록 사람은 물론이고, 벌써 간판이 반짝거리는 번화가 건물들도 보인다.
날 태운 택시가 나아갈수록 사람들의 복장이 변했다.
여자들은 대개 짧은 치마나 핫팬츠를 입고 있었고, 남자는 슬랙스에 단추 푼 셔츠 정도가 일반적인 듯했다.
딱 봐도 놀러 온 것 같은 애들. 대학생 정도로 보인다.
도도한 표정을 지으며 걸어가고 있는 남자들을 안 보는 척 힐끔거리는 여자들을 보니..새삼 여기가 어떤 곳인지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눈살이 찌푸려지긴 했지만 내심 안도의 감정이 가슴에 깃든다.
꼬추새끼들이 핫팬츠 같은 걸 입지 않는 게 어디야.
'유흥가라 걱정했는데..저 정도면 멀쩡하네.'
가드서다가 좆같은 꼴 볼 순 없지 않나.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다리 각선미 같은 걸 뽐내는 옷을 입고 내 앞에서 얼쩡거리면, 죽탱이를 갈기지 않고는 못 참을거다.
돈 벌 겸해서 일하러 왔는데 오히려 합의금이나 물어주고 가면 병신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다 왔습니다."
절로 눈이 휘둥그레 떠지게 만드는 건물 앞에서 기사가 차를 멈췄다.
카드를 꺼내 결제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마침내 실물로 발키리란 클럽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살짝 어안이 벙벙해졌다.
'...저게 클럽이라고?'
운동만 하고 다닌 덕에 클럽에 발도 들여본 적은 없지만 대충 들은 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알고 있었던 클럽은..저것보단 확실히 작다는 것도 알았다.
길게 늘여뜨려져 있는 가림막같이 생긴 줄 사이에 자리한 출입구 정도만 그나마 멀쩡한 크기라 할까.
그 위의 간판에 박혀있는 클럽 이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흡연장을 찾았다.
담배가 필요했다.
일도 처음 해보고, 심지어 첫 직장이 저런 거대한 클럽이라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살짝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거리에선 피우기 껄끄러워서 주변을 기웃기웃거리다 클럽 맨 오른쪽 구석진 골목 같은 곳을 발견했다.
기대에 찬 발걸음으로 꽁초가 가득 담긴 쓰레기통 앞에 섰다.
이걸 보니 흡연구역이 맞는 것 같아 담뱃갑을 꺼내 한 까치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내가 피우던 담배와는 다른 맛이 났다. 사실 미나가 준 거니까 당연한 거였지만.
그 사실에 묘한 미소를 지으며 폐부에 연기를 집어넣었다.
-끼익.
쓰레기통 앞에서 얌전히 담배만 피우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검은색 후드를 입은 건장한 여자가 보였다.
나랑 눈높이가 크게 차이 나지 않았다. 한 175 정도 되보이는 키.
저 정도 포스면 여기 가드인가 생각도 들었지만, 긴가민가 한 탓에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 여자도 눈을 크게 뜨며 물고 있던 담배를 우물거리다 말을 꺼냈다.
"어..여기 직원만 쓸 수 있는 흡연장인데요."
나한테 나가 달라고 요구하는 말 치곤 눈을 빛내며 제발 더 있어줬으면, 하는 시선에 묵묵히 연기를 내뱉었다.
그다음 아직이지만, 오늘부터 근무하게 될 직원이라고 말하려던 찰나 여자가 곤란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외국인이네. 디스 플레이스..스태프 온니. 노 스모킹 존. 유..슈든트 히얼..썅. 모르겠다. 그래, 뭐. 빨리 피고 가요. 아니, 좀 천천히..피워도 되고."
잘 안되는 거 같은 영어를 쥐어짜 내며 말하는 여자를 보자 눈에 웃음기를 머금었다.
하율과의 첫 만남 때가 생각난 탓이다. 그때 하율도 저랬는데.
일단 여자가 내 선배인 걸 알았으니 고개를 숙여 인사를 표했다.
"아, 알아들었나? 댓츠 오케이! 암 파인.."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근무하기로 한 류세화라고 합니다, 선배님."
"...."
"선배님?"
여자는 심히 쪽팔렸는지 담배가 물린 입을 금붕어처럼 뻐끔거렸다. 급기야 얼굴을 숙여대자 걱정하는 척 다시 여자를 불러봤다.
"괜찮으세요?"
"..예, 예 괜찮아요. 근데 진짜..오늘부터 여기서 일해요?"
"네. 그리고 말 놓으셔도 됩니다. 선배님이시잖아요."
"...그래."
여자가 물고 있던 담배를 고이 접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으로 쪼개진 담배를 내가 아깝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던 사이 여자가 성큼 다가왔다.
"그..계약서 썼나요? 아, 아니 팀장님 만나서 계약서 썼어?"
"아뇨. 아직입니다."
"그럼..내가 안내해줘도 될까? 팀장님이 지하에 계서서 찾기 힘들 거야."
역할을 다한 담배를 끄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으며 말했다.
"저야 감사하죠."
***
철컹-. 철컹-.
철제계단을 밟아 비명을 내지르게 하며 여자와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직 영업시간이 아니라 그런 것인지 영상으로 봐왔던 화려한 조명 대신 희끄무레한 하얀색으로 빛나는 조명만 켜져 있었다.
2층이 있는 거대한 홀의 끝엔 디제이가 음악을 트는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설치된 봉을 피해가며 움직였다.
"나는 유예리라고 해. 24살이고. 너는?"
유예리가 나이를 물어오자, 나는 18살이라고 말하려던 진실을 삼켰다.
미성년자가 일하는 게 합법이라 해도..말하기가 좀 그래서. 아까 예리 앞에서 담배도 피고 있었지 않나.
이 부분은 시아와 상의를 해봐야겠다. 주변엔 20살로 말해줄 수 있냐고.
"20살입니다."
"그래? 되게 어리네."
사실 되게가 아니라 존나게 어렸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왕 빙의하게 해줄 거면 나이도 맞춰주든가, 하는 원망이 하늘에 계신 누군가를 향했다.
"근데 대단하다. 벌써 술 만들 줄 아는 거야?"
"술이요?"
가드가 술도 만드나? 하는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바텐더로 온 거 아니야?"
"....?"
*
유예리는 세화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 중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생긴 애는 본 적이 없으니까.
한참 군 생활을 하며 남자에게 미쳐있던 시절. 어쩌다 본 젊은 남자, 아니 좀 괜찮게 생긴 남자라도 다 연예인으로 보이던 시절이 있었다.
전역하고 물이 좀 빠져서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때의 감각이 세화를 본 순간 다시 되살아났다.
그리고 당연히 바텐더로 온 거라 생각했다. 바텐더는 보통 존나 예쁜 남자애들이 맡기도 하고. 저렇게 생긴 애를 바에 세워놓으면 클럽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가끔 담배도 같이 피우면서 치근덕거리는 손님들 짜증 나지 않냐고 공감도 해주고. 그렇게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면서..관계가 발전되는 거지.
팀장님이 이런 애를 어디서 구해왔지 하는 존경심이 새록새록 피어나고 있던 그때였을 것이다.
"바텐더 아니고, 가드로 왔어요."
"....가드?"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한번 물어봤다.
"진짜 가드로 왔어?"
"네."
예리는 그가 안 보이게 고개를 돌리곤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기가 살아온 24년 인생 중에 꽃이 피는 날도 오는구나, 라고.
***
'흠...'
불만족스러운 신음을 속으로 삼켰다.
자신을 예리라고 소개한 선배가 자꾸만 느릿느릿 걸으며 나에게 말을 거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으니까.
"잘됐다. 그럼 우리 같은 팀이네. 내 부사수로 오면 잘 해줄게."
"..감사합니다. 이제 슬슬.."
"나중에 진상들 오면 누나한테 말해. 괜히 다치지 말고."
"..알겠습니다."
예리가 도저히 말을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에 나도 언젠간 도착하겠지, 하며 신경을 껐다. 쓸데없이 내부만 커서 이게 뭐하는 건지.
"보려고 본 건 아닌데..문신이 예쁘네. 어디서 했어?"
손가락을 든 예리가 내 목을 가리킨다. 이내 가슴 쪽을 가리키려다 실수했다는 듯 표정을 굳혔다.
순간 눈을 찡그렸다. 저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거는 내가 여기 남자처럼 보였단 뜻 아닌가.
"미, 미안하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괜찮습니다. 이거 말고도 더 있는데 궁금하신 것 같으니 보여드릴게요."
"...어?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연신 사과하는 예리 때문에 분위기가 서먹서먹해지는 게 싫어 대수롭지 않게 겉옷을 벗었다.
여기 남자들 취급을 받아서 생긴 반발심도 조금 섞여있던 행동이었다.
"에?"
바보 같은 소리를 낸 예리가 이쪽을 바라보다 표정이 살짝 꺼림칙하게 변했다.
"...오. 멋, 멋지다."
"감사합니다."
저 표정이 마음에 들지않아 입에 걸려 있던 미약한 웃음기도 거둬버리던 사이,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리자 눈을 끔뻑거렸다.
느낌이 싸했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하고는, 작게 심호흡을 한 뒤 전화를 받았다.
ㅡ이모다. 지금 어디니?
다른 사람에겐 낯설진 몰라도 내겐 익숙한 언어가 수화기 너머로 울려 퍼졌다.
"..한국 오셨어요?"
ㅡ그래.
드디어 왔구나. 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면서도 대답은 했다.
"저 지금 볼 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어요. 좀 늦게 들어갈 거 같아요."
ㅡ아니 이모 불안하게 어딜 싸돌..일단 알았다. 빨리 와라. 이모 춥다.
춥기는. 여기가 러시아인 줄 아시나.
일단 알았다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어..무슨 말로 한 거야?"
"러시아어요. 러시아에서 살다 왔거든요."
"방금 통화하신 분은..?"
"이모에요."
아하, 하며 탄식을 터뜨린 예리가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좀 조용히 갈 수 있음에 속으로 안도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를 이동하자 철제문이 보였다. 예리가 살짝 문을 열자 파란빛이 그 사이로 새어 나온다.
"이리와."
먼저 들어간 예리의 손짓에 그 안으로 따라 들어오니 빛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파란색의 네온사인이 내려가는 계단과 벽 전체를 덮고 있었다.
몽환적이면서도 이색적인 광경에 살짝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밑으로 내려갔다.
지하에 내려오니 시야에 들어오는 건 또다시 네온사인으로 사방이 덮여있는 복도였다.
반들반들하게 광이 나는 바닥. 예리는 익숙한 듯 그 위를 걸어갔다.
"영업 중일 땐 여기 들어오면 안 돼. VIP들 전용이야. 저 방들 보이지?"
손가락으로 닫혀있는 문들을 가리킨 예리가 말을 이었다.
"저거 다 룸이거든. 저기서 놀려면 돈이 엄-청 들어. 웬만하면 다들 수행원 정도는 데려오니까, 따로 연락 없으면 여기는 올 일 없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런 부자놈들에게 질렸다는 표정의 예리가 손을 탈탈 털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음-거리는 소리를 냈다.
"근데 팀장님이 문자 같은 건 안 보내주셨어?"
예리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그제야 나도 뭔가 잘못됨을 느꼈다.
'면접 보러 오라 해놓고 어디 어디로 오세요, 이런 문자 하나가 안 왔네.'
"깜빡하셨나 봐요."
"그래? 팀장님이 그런 실수 하실 분은 아닌데.."
나도 예리의 의견에 내심 동감했다. 시아가 엉뚱한 면이 있어도 할 땐 하는 스타일 같았으니.
저번에 시아가 내게 보였던 서늘한 기세를 보면 알 수 있었다.
"자, 여기로 들어가. 들어가면 팀장님 계실 거야...아마도."
복도 내부를 좀 더 걷던 우리는 어떤 문 앞에서 멈춰 섰다.
나는 여기까지 와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끝을 흐리는 예리를 살짝 곁눈질하다 문에 적힌 단어를 바라봤다.
[사장실]
'팀장님이 사장이었던가?'
"여긴 사장실 아닌가요?"
"아. 그렇긴 한데..사실 팀장님이 거의 사장님이라고 보면 돼. 진짜 사장님은 본 적도 없어."
'그렇구나. 그럼 바지사장..은 아닐꺼고. 실질적 책임자가 시아란 소리네.'
문고리를 잡고 돌리려는 순간, 흘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살짝 고개를 돌렸다.
은근슬쩍 뭔가를 바라는 듯한 예리의 눈빛이 보였다.
그게 뭔지 모르기도 했거니와, 이제 예리를 보내고 싶었기에 먼저 가라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여기까지 데려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자 예리의 얼굴이 상기된 듯 밝게 변했다. 아까 문신 보여줄 때는 표정 안 좋더니만.
"그, 그래..나도."
"예?"
"아, 아니. 이따가 보자! 누나가 잘 알려줄게!"
기분이 왔다 갔다 하는 것 같은 예리였지만, 눈치는 있었는지 더는 떠들지 않고 곱게 사라졌다.
그렇게 사장실 앞에 홀로 남게 된 나는 손을 뻗어 문을 열려다 멈칫했다.
'노크 부터 해야지.'
똑똑-
ㅡ들어와.
안에서 들려온 허락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룸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책상. 그 위에 쌓인 서류들과 그중 하나를 열심히 보고 있는 여자가 보였다. 종이를 뒤적거리던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로....세화?"
"안녕하세요. 일하러 왔어요."
동공이 살짝 흔들리던 시아가 얼굴을 감싸 쥐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 사이로 보이는 표정은 알바생을 맞이한 고용주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자기가 불러놓고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