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계약(2)
"앉아도 되나요. 팀장님?"
"...."
어딘가 불만이 서려있는 세화의 목소리에 시아가 손으로 가림막을 만들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러고 있어도 달라지는 게 없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결국 멍청하기 짝이 없는 회피를 선택하는 것 말고는 좋은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하.."
"아, 앉아라!"
자신이 계속 그러고 있자 인내심이 바닥난 듯한 세화의 한숨에 시아가 반사적으로 의자를 향해 손짓했다.
그제야 세화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다가오더니 앞에 앉았다. 그러고는 살짝 서운하다는 듯이 말해왔다.
"문자 하나만 보내주시지 그러셨어요."
"...정말 미안하다. 깜빡했네."
거짓말이었다. 시아는 여전히 세화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멍청한 얼굴로 방을 왔다 갔다 하며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던 자신의 모습.
"괜찮아요. 이제 계약하면 되는 건가요?"
"잠..깐만."
세화는 사과 한 번에 앙금 같은 건 전부 털어버렸다는 듯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도 그 시선을 마주하며 망막에 세화의 모습을 새겼다.
나 혼혈이요, 라고 써 붙이고 다니는 얼굴. 심지어 러시아 혼혈.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싶었다.
첫 번째로 얽혔던 이름도 모를 러시아 년들이 친구를 죽였고. 두 번째로 얽혔던 미나에게 자신이 죄를 저질렀고.
세 번째인 세화는..성유진 그 개 같은 년이 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불쑥 찾아와서 좆같은 마약 같은 거나 먹이고 가니까. 남자들한테.
그때가 오면 세화가 자신을 경멸하게 될지도 모르지.
'눈 딱 감고 돌려보낼까?'
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보고까지 마쳤다. 고작 남자애 하나 돌려보내는 거지만 그년이 온갖 난리를 치며 행패를 부릴 게 뻔했다.
그렇게 클럽이 망가지는 건 볼 수 없다. 친구와의 추억이 유일하게 남은 곳은 여기 밖에 남지 않았다.
시아의 머릿속에 생각이 가득 찼다.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내고 긍정적인 생각을 집어넣으려 노력하니 답 비스무리 한 게 떠올랐다.
유진은 남자한테 문신이 있는 걸 싫어하니 괜찮지 않을까. 그녀가 들이닥치기 전에 세화를 어디론가 보내놓으면..
망할.
'차라리 알지도 않았으면 좋았을걸.'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상처받는 게 싫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세화의 표정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자신도 지었던 얼굴이었을 테다. 친구 년을 자신이 몸담았던 세계로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자신이 국화꽃을 바치러 갈 일도 없었겠지.
시아는 울적해지려는 기분을 부여잡았다.
이런 고민을 할 자격이 있나. 이미 손에 묻힌 피만 한가득인데 이제 와서 성인 코스프레는.
으득.
시아는 자신만 알도록 이를 한 번 악물었다. 이미 늦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이뤄진 다짐이었다.
일그러졌던 표정을 갈무리했다. 고개를 들어 찬란히 빛나는 색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계약하지."
***
"그래서 이건.."
앞에서 종이를 펼쳐놓고 열심히 뭔가를 설명하고 있는 시아.
나는 가냘픈 목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턱을 괴고 시아의 얼굴이나 구경했다.
'어째 주변에 이런 여자들밖에 없지? 하율도 그렇고, 미나도 그렇고. 팀장님도 전부 다-'
역전 세계라서 이런 건가? 하는 의문도 들 지경. 전생에도 이런 미녀들은 인터넷에서도 보기 힘들었는데 이상한 노릇이 아닐 수 없지만.
사실 저건 부수적으로 딸려온 일체의 영양가도 없는 생각이었다. 내가 시아의 얼굴이나 쳐다보고 있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날 볼 때부터 기분이 안 좋아 보여서.
지금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시아의 긴 속눈썹 안으로 비치는 동공이 떨리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눈물점이 애처로워 보이기까지 하니, 예쁘장한 고양이를 연상케 한다. 비에 젖어 불쌍하게 떨고 있는 고양이.
그런 고양이가 저러고 있으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나도 덩달아 축 처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여기 온 것이 그렇게도 싫었던 걸까.
"일단 그래서.."
"제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보네요."
겉으론 무덤덤한 어조. 그래서 더욱 와 닿는 듯한 내 말에 계약서를 짚어가던 시아가 멈칫했다.
"..아니다."
"얼굴에 다 쓰여 있어요. 마음 바뀌셨으면 진작 얘기해주시지. 상처받기 전에. 실례했습니다."
살짝 장난스럽게 말하며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윽고 나가려는 척 자리에서 일어나니 시아가 눈에 띄게 당황하며 내 팔을 잡았다.
텁.
"미, 미안하다.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걱정되는 마음에 그런 거니까..상처받지 마라."
장난을 다큐로 받아들인다는 게 이런 건가. 좀 서운한 마음도 있고 해서 장난 겸 떠본 건데 시아가 쩔쩔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괜히 사람 미안하게.
"농담이에요.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이시길래. 되게 좋은 사람 같으시네요, 팀장님. 안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걱정도 해주시고."
"..고맙다."
기껏 칭찬해준 보람도 없이, 시아는 아까보다 더 괴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에 찝찝함을 담아 의아하게 시아를 바라보았지만, 금세 무표정이 되어버린 시아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낼 수가 없었다.
이후, 계약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사인까지 마쳤다. 시아가 안내해준다며 일어나자 나는 그녀를 붙잡았다.
"왜? 혹시 지금이라도..?"
"...."
또다시 포기를 종용하는 듯한 시아의 말에 살짝 눈을 매섭게 뜨며 노려보았다. 적당히 하라고.
제삼자가 본다면 어리둥절할 일이었다. 고작 일개 알바가 고용주한테 반항하는 것 같은 모습이라.
정작 시아는 그런 것엔 신경 따윈 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기울이며 물어왔다.
"그럼 왜..?"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팀원들한테 저 20살이라고 소개해주시면 안 될까요?"
"아...음."
시아가 턱을 잡으며 살짝 고민했다. 하지만 보여주기 식이란 게 뻔히 보인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흔쾌히 허락하고는 등을 돌려 걸어가는 시아의 뒤에서, 나는 후련함에서 나오는 미소를 지었다.
***
"류세화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다들 들었나? 잘 가르쳐주고..최대한 다치지 않게.."
"괜찮아요. 익숙한 거 아시잖아요."
"..그래도 조심하고. 나는 일이 좀 남아서.."
다짜고짜 대기실 문을 열어 재낀 시아 덕분에 전광석화처럼 내 소개가 끝나버렸다.
그러고 시아가 나간 뒤, 나는 홀로 뻘쭘함을 감당해야 했다.
"어, 어서와. 야! 환기 좀 해!"
"유예리가 이빨 까는 건 줄 알았는데..와."
내가 들어올 때부터 멍청하게 입을 벌리고 있던 여자와, 떡대라는 말이 어울리는 남자가 번갈아 입을 열었다.
그 외에도 여럿 있었지만 다들 뭔 생각을 그리 골똘하게 하는 지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세, 세화야! 나 기억하지? 유예리!"
소파에 쓰러져 있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름 반가운 얼굴이라 눈매를 휘었다.
"다시 뵙네요 선배님. 일은 언제부터 시작하나요?"
"아, 그렇지. 다들 준비해. 나가자."
시계를 보니 밖은 슬슬 어두워질 시간. 그 말은 즉 클럽의 개장시간에 가까워졌단 뜻이었다.
예리의 외침에 분주히 일어난 팀원들이 제각기 준비를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날 가르칠 사람을 정해놓은 듯, 예리가 내게 다가와 이것저것 알려주기 시작했다.
"이건 무전기. 요걸로 상황을 전달 해줄 거거든? 1층에서 일 났다, 안에서 일 났다. 뭐 이런 거. 누나가 천천히 가르쳐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흔히 영화에서 보던 요원들이 쓸 법한 이어폰을 예리가 건넸다.
이상하게 익숙한 물건을 착용하니 폼이 좀 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었는지, 예리도 감탄한 얼굴로 바라봤다.
"잘 어울리네. 일단 오늘은 첫 날이니까..입구에서 검사만 하자. 민짜들 막는 거랑 입구 컷만 하면 돼."
"입구 컷이요?"
내 물음에 예리가 핸드폰을 꺼냈다. 곧이어 내 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예리가 보낸 사진이 가드 단톡방에 띄워져 있었다.
"1단계. 뚱뚱한 남자, 하마 금지. 여자는 아줌마 스타일 금지..이거 보고 하면 되는 거에요?"
"그냥 참고 예시다, 하고 생각하면 편해."
다시 한 번 사진을 들여다봤다. 저절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아래로 눌렀다.
"근데 뭐..어떻게 입든 상관없지. 얼굴만 되면 다 들여보내도 돼. 일단 누나 하는 거 옆에서 잘 봐."
예리가 은근슬쩍 내 얼굴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 안에 숨겨진 뜻이 어슴푸레 짐작되어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
'뭔 사람이 이렇게 많아.'
클럽 입구로 올라오니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남녀가 모여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으로 이뤄진 줄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더해 엄청난 살 색의 향연이 여자들에게서 펼쳐졌다.
헐벗다시피 입은 옷. 누구 하나 꼬셔서 나갈 생각에 기대감으로 가득 찬 얼굴들.
개중엔 자신감이 얼마나 넘쳤는지 몸에 맞지도 않는 옷을 욱여넣듯이 입고 온 여자들도 보인다.
자신감은 보기 좋은데, 안구에 중대한 타격이 가해지는 그 광경에 슬며시 눈을 좁히니 예리가 옆에서 목소릴 낮추며 말해왔다.
"세화야. 누나가 저런 손님들 말 한 거야. 다 짜르면 돼. 어쩔 수 없어."
"알 것 같네요."
문을 열기 전 예리와 얼굴을 가까이하며 속닥이고 있으니, 팀원들의 눈길이 느껴져 잡담을 끝냈다.
"이제 자세 좀 잡을까요? 신입이 이러고 있어서 그런가. 보시는 눈빛들이 안 좋아서."
"아ㅡ쟤네? 큽, 세화야. 왜 이렇게 순진해. 부러워서 그런 거야, 부러워서."
예리는 걱정하지 말라며 손사래를 쳤다. 이내 영업을 개시하라는 무전이 들려오고 출입구를 활짝 열었다.
***
"신분증 한 번 보겠습니다."
역시 선배는 선배인지, 예리는 일이 시작되자 무섭게 돌변했다.
그녀는 고압적인 어조로 손님들을 맞이하며 신분증을 받아 싸이패스에 넣었다.
나는 예리가 어떻게 하는지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일을 배워나갔다.
대충 어떻게 하는지 감이 오자, 구석탱이에서 일어나 예리에게 다가갔다.
"선배, 이제 제가 해봐도 될까요?"
"벌써? 엄청 적극적이네."
내가 기특하다는 듯 웃어보인 예리는 군말 않고 자리를 비켜주었다.
덕분에 입구 중앙에 서게 된 나는 양옆에 팀원들을 끼고 손님을 응대하기 시작했다.
"신분증 한 번 보여주시겠습니까?"
"네, 넵!"
처음으로 검사한 사람은 여자였다. 짧게 친 단발머리에 군기가 바짝 들어있는 대답.
뭔가 사회인과는 다른 느낌이 나서 넌지시 물어봤다.
"혹시 군인이세요?"
"아..네. 신병휴가 나왔습니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군인이라. 직접 목도하게 된 이쪽 세계의 여자 군인을 보니 신기함이 저절로 눈에 배어들었다.
동시에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성별이 바뀌었어도 동질감이라는 게 있으니까. 난 미필이긴 하지만.
'기껏 휴가 나왔는데 즐길 거 즐기고 가셔야지. 고생하시네.'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내 몸을 조심스레 훑는 시선도 불쌍하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만 용납되는 일이었는지, 예리가 무서운 얼굴로 다가와 그녀에게 경고하려 했다.
"손님. 지금.."
"나라 지키느라 고생 많으시네요. 즐겁게 놀다 가세요."
나는 예리의 팔을 잡아 제지하며 그녀에게 진심을 담은 위로를 건넸다.
그러자 검게 물들었던 그녀의 낯빛이 돌아옴과 동시에, 감동받았다는 듯한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싸이패스로 신분증 검사를 마친 뒤,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싱긋 웃어줬다.
그러자 얼빠진 얼굴로 서 있던 그녀는 감사하다고 중얼거리며 부끄러운 듯 후다닥 안으로 사라졌다.
"세화야. 방금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거야? 나라 지키느라 고생한다고 했던 거..진짜로?"
범상치 않은 눈빛으로 물어오는 예리에게 당연하다는 듯 살짝 웃었다.
"진짜가 아니면 뭐에요. 저분들 덕분에 발 뻗고 자는 건데."
남자든, 여자든 의무에 대해서는 존중받아야 마땅한 일.
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에 모두도 내 따스한 감정을 느꼈는지.
예리를 포함한 주변 여자팀원들의 눈빛이 뜨겁게 불타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