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한 걸음(1)
팀원들의 뜨거운 시선 때문에 얼굴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그게 부담스러워 고개를 돌리고 예리를 마주했지만 막다른 길이었다.
..강렬하다 못해 뭔가가 차오른 듯한 예리의 눈.
나는 다시 먼 산을 바라보다 이 상황을 헤쳐나갈 방법을 찾고는 입을 열었다.
"그럼 다시 일할까요?"
"아..맞다. 다들 뭐해! 정신 차리고 손님 받자!"
방금 잠에서 깨어난 듯이 어딘가 힘이 빠져 있는 예리의 외침은 일을 독려한다고 보기엔 거리가 좀 있었지만.
팀원들의 흐리멍덩한 눈에서 생기가 돌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허리를 꼿꼿이 펴 최대한 곧은 자세를 유지한 뒤 묵직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팀원들.
아마 신장을 키워 보이려 했던 것 같은데. 솔직히 말하자면..귀여웠다.
다들 그래 봐야 날씬한 몸매에 170 정도 되는 키. 여자 팀원 중 제일 큰 예리라 해도 175 정도 아닌가.
거기에 반해서, 아까 대기실에서 보았던 남자 가드. 나보다 큰 키와 덩치는 클럽 가드라는 직업에 정말로 어울려 보였다.
억세 보이는 인상. 굳게 다물려진 입술.
든든했다.
흐뭇한 마음으로 다시 일에 임했다. 아까 군인 손님처럼 착한 사람만 왔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며.
***
"죄송한데 저희 기준이랑 스타일이 다르셔서 입장 불가능 하실 것 같습니다."
"이게? 이게 뺀찌에요? 아~형처럼 입어야 하나보다. 몸매에 자신이 넘치시네. 하. 얼마나 잘났다고.."
그의 입장을 거부하자 남자가 성을 내며 가버렸다. 기준대로 한 건데 성질은.
어질어질하다. 처음 받아보는 진상 손님에 눈을 감고 머리칼을 쓸었다.
"..저거 싸가지 봐라. 어딜 가도 뺀찌 먹겠구만. 괜히 세화한테 지랄이야. 원래 저런 놈들도 가끔씩 섞여 오니까, 마음 쓰지 마. 잘했어."
예리가 모기만 한 목소리로 내게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괜찮기는. 잠깐 쉬어. 누나들이 할게."
"예리 말대로 해, 세화야. 자! 여기 앉아."
이때다 싶은지, 득달같이 달려온 팀원들이 내 등을 살살 밀며 의자로 데려갔다.
뻔히 의도가 보이는 호의에 헛웃음을 지었다. 저렇게까지 하는데 거절하기도 그래서, 의자에 앉아 팀원들을 구경하기로 했다.
그렇게 데스크에 앉은 후 5분쯤 지났을까.
"아! 미성년자 아니라고요!"
"죄송합니다. 손님 신분증을 기계가 인식을 안 하네요. 입장 불가 하십니다."
"기계가 잘못된 거겠죠! 진짜 성인 맞다니까!"
급식 냄새가 풀풀 나는 남자 2명이 떼를 쓰며 짜증을 부려댔다. 어디서 쳐마셨는지 취기가 얼굴에 가득했다.
그러자 응대하던 팀원이 아까 보았던 든든한 남자 가드를 불렀다.
"형석아."
"아..씨."
형석이라 불린 가드가 거대한 체구로 성큼 거리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나는 내심 형석에게 기대를 걸며 흥미롭게 바라봤다.
흔치 않게 진짜 남자답게 생긴 형석이 어떻게 대응할지 궁금해서.
"애기들. 그만하고 가."
"형. 나 진짜 억울하다니까?"
"개빡치네. 왜들 이래 진짜. 성인 맞다고요! 기계가 병신이지!"
기세 좋게 다가간 형석은 본인이 생각했던 것보다 그들의 반발이 거셌는지, 곤란한 표정으로 쩔쩔맸다.
하아. 맥이 빠진 한숨이 내 입에서 새어 나왔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자 팀원들도 저들에게 다가가기 꺼리는 기색이다.
스륵.
자리에서 일어나 멀찍이 떨어져 있던 예리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배. 이럴 때 보통 어떻게 해요?"
"으. 여자면 잡아서 내치기라도 하겠는데. 저런 경우엔..그냥 경찰 불러야지. 고딩들 얼굴 빨개진 거 봐라.
저런 거 손 잘못 대면 나중에 큰일 난다, 진짜. 난리도 그 난리가 없어. 저번에는.."
질색한 표정으로 말하는 예리의 말을 끊었다.
"그럼 저도 남자니까, 제가 말 좀 해도 될까요?"
"아냐, 아냐. 그러지 마. 다칠 수도 있어. 그냥 경찰 부를 거니까 가만히.."
"굳이 거기까지 갈 필요가 있나요. 제가 해보고 안 되면 경찰 부르세요."
"세, 세화야?"
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즉시 아직도 실랑이 중인 형석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선배. 제가 할게요."
"..아, 너구나. 괜찮아. 이런 건 선배가 해줘야.."
그렇게 말하려면 표정을 유지하려는 노력 정도는 하던지.
침울하게 내려갔던 형석의 눈매가 마침 떠넘길 상대를 찾았다는 듯 씰룩거렸다.
역겹다. 이딴 것 하나 처리 못 하고 저딴 표정을 짓는다는 게.
돈을 받았으면 고용주가 원하는 걸 해줘야 할 게 아닌가.
무가치한 물건을 보듯 싸늘한 내 시선이 날아가 형석에게 꽂혔다.
그러자 어깨를 움찔거린 형석은 기뻐하던 기색을 거두고, 뒷걸음질 치며 물러났다.
그것마저 짜증이 치솟게 한다. 나는 눈 한쪽을 찡그리며 술 취한 벌레 두 명을 향해 몸을 돌렸다.
"슬슬 가보는 게 어떨까요. 부모님이 걱정하실 텐데."
"뭐야. 겁주는 거에요 지금?"
남자 한 명이 내 목을 가리키며 비웃었다. 이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내 눈가를 향해 손가락 질했다.
"여기에도 있네. 그런 거로 안 쫄아요. 아도니스는 무슨..푸핫."
순간, 실핏줄이 터져나가며 눈에 핏발이 섰다.
니가, 비웃어. 감히. 이게 뭔 줄 알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욕에 허리춤에 손을 올렸지만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순간, 머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깨어났다.
내가 방금 뭘 하려 했는지 기억을 되짚어가려 했으나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애들아. 술이 마시고 싶어?"
"아니..요..그냥 갈게요."
"죄송해요..형."
목에 핏대를 세우던 남자들이 고분고분해졌다.
이 새끼들이 갑자기 뭘 잘못 먹었나 싶어 의아하게 바라보다 문득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언제 그랬는진 몰라도, 내가 입고 있던 스카잔이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문신들. 좋은 말로 할 때는 안 가더니 이런 거에 쫄았나 보네.
나도 이 상황을 길게 끌어가고 싶진 않았기에 좋게좋게 마무리하기로 했다.
'멍청한 새끼들. 나이 더 먹은 다음에 와라.'
"한 번만 더 그랬다가는, 손가락 잘라버린다. 꺼져."
어려서부터 그러지 말라고 인생 선배로서 조언해주자던 내 다짐은, 급격히 차오른 감정에 의해 무산되어버렸다.
그 감정의 끝을 날카롭게 벼려서 만든 말을 끄집어낸 건 순전히 우연일 뿐이었다.
내가 잘못 말 한 거로 치자.
***
내가 클럽 입구에 서 있을 수록, 새벽의 서늘한 공기와 함께 짙어지던 어둠은 점차 색이 연해져 갔다.
안에 들어갔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짝지어서 나오는 걸 몇 번이나 봤는지.
하암.
원래는 푹 자고 일어날 시간인데. 밤을 새워서 그런지 살짝 하품이 나온다.
슬슬 퇴근 시간이 가까워진 탓일까. 팀원들의 얼굴에도 피곤함이 서리는 게 보였다.
그래도 이 무료한 시간을 달래주는 건 있었다.
저기 전봇대를 잡고 토하는 사람. 헌팅에 실패했는지 어두운 얼굴로 서성거리는 여자들.
하지만 그런 광경도 질려갈 때쯤, 무전이 들렸다.
ㅡ영업 종료.
"하..끝났다. 아, 다들 가지 말고 스탑. 신입 왔는데 간단히 한 잔?"
"죄송합니다. 지금 집에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내 말에 기운이 넘쳤던 예리는 물론, 팀원들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누, 누구..? 혹시 여자친구?"
예리가 말까지 더듬어가며 물어오자 손을 내저었다.
"이모에요."
"아! 그래, 그래. 가봐야지 그럼."
안도한 듯 숨을 내쉰 예리의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나도 그에 화답할 미소 정도는 보여주려 했지만, 지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렇게 팀원들에게 인사를 마친 뒤, 집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다.
***
"여기서 세워주세요."
본래라면 집 앞까지 가서 택시를 세웠을 텐데. 오늘은 집에서 살짝 멀리 떨어진 곳까지 오고 나서야 택시에서 내렸다.
복잡한 심경을 진정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아까, 불쑥 치밀어올랐던 것이 혼란스러웠던 탓이다.
둥그런 전구에서 아직도 빛을 발하고 있는 가로등 사이를 지나.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 보니 하율이 일하고 있는 편의점 옆까지 와버렸다.
멀리서 그 안을 들여다봤다. 카운터에 피곤한 듯 서 있는 하율이 보인다. 예쁘게 묶인 포니테일이 탐스럽다.
당장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율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안에 실린 것을 느낀다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뭔가에 홀린 듯한 발걸음으로 편의점에 다가갔다. 그러나, 욕을 뇌까리며 다시 집을 향했다.
하율에게 다가갈수록 내 안에 있던 것도 커져 버렸기 때문에. 그것은, 살랑이는 감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집어삼키려는 것에 가깝지. 다음에 오자. 멀쩡한 상태로 하율과 만나자.
그렇게 나를 다독이며 목적지로 향하던 중.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머리를 헤집으며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그 사이로 들려오는 미세한 소음에, 집중했다.
뚜벅.
..뚜벅.
이번엔 불규칙적으로 걸었다.
뚜벅, 뚜벅.
...벅, 뚜벅.
짐작이 맞았다.
곧 다가올 일에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다.
내 소리에 숨기려면, 제대로 숨겼어야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길거리에는 새가 찌르르 울어대는 소리만이 들렸다.
인적이 드문 주택가라 참 다행이었다.
누군가와 계속 발걸음을 맞추며 집이 있는 건물로 들어왔다.
내가 계단을 올라오며 집 앞까지 왔을 때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앞의 도어락이 보인다.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짧은 복도를 지나, 내가 올라왔던 계단 앞까지.
그러니 마주할 수 있었다. 날 뒤쫓던 사람을.
얼굴을 칭칭 가렸지만 선이 고운 몸 덕에 여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바라보고 있음에도 태연히 계단을 올라왔다.
그녀가 점차 내 간격에 들어오는 걸 계산했다.
한 걸음.
뚜벅.
두 걸음.
뚜벅.
마지막 세 걸음째,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번뜩였다.
쉬익!
불필요한 동작 없이 깔끔하게 베어 들어오는 칼에 뒤로 고개를 젖혔다. 흑발이 몇 가닥 잘려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왜 그러는지 이유는 묻지 않았다. 질릴 정도로 흔하게 겪었던 일 같았기에.
불필요한 감정은 일절 눈에 싣지 않았다.
쉬이익!
다시 그녀가 팔을 뻗는다.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다가오는 칼은 여전히 날카로웠으나, 처음과 달리 기세는 무뎠다.
뭔가 달라졌다.
그렇게 몇 번의 공격을 피해내며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칼에, 악의가 없다. 죽이려는 의지도.
그렇다면 좀 더 위험하게 움직여도 되려나.
일순간 그녀의 팔이 다시 일직선으로 뻗어져 올 때, 옆으로 피하며 땅을 박차고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초록색 눈에 당황이 서렸다. 칼을 쥔 팔을 회수하기 전, 그녀의 허리를 두 팔로 휘감으며 뒤로 넘어뜨렸다.
챙그랑.
칼이 떨어지는 소리에 비웃음을 흘렸다. 놓친 척하기는. 사실 죽이려는 생각도 없었잖아.
뭐, 어차피 칼을 뺏으려 하긴 했지만. 덕분에 수고를 덜었다.
칼이 떨어진 위치를 슬쩍 확인한 뒤, 내 밑에 깔린 그녀를 내려다봤다. 쉽게 못 빠져나가게 허벅지에 힘을 주는 건 당연했고.
"더 없어?"
"...."
"그럼 일단 이거부터 시작하자."
그리 말하며 그녀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뻗으려던 순간.
그녀가 주머니에서 시커먼 권총을 꺼냈다.
이게 장난감 총인지, 진짜 총인지는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본능적으로 주먹을 거두며 권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파앗.
예상과는 달리, 손쉽게 권총을 거머쥐었다. 처음부터 뺏기려는 거였나.
방금까지 뭔가를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이 허무하게 꼼지락거렸다.
나는 일어남과 동시에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내 손에 들린 권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총구에 끼워져있는 기다란 원통형의 뭉치.
알아서 준비까지 잘 해왔네.
그에 미소를 머금고 안전장치를 풀었다.
총구의 끝이 거칠게 흔들리는 그녀의 시선과 만났다.
이제 검지를 까딱거리기만 하면, 그녀는 죽는다.
죽어 마땅했다. 날 먼저 죽이려 했으니까.
검지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이내 한 사람의 종말을 고하려는 순간, 상처 난 손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잠식당했던 정신을 일깨웠다.
내가 총을 어떻게 쓰는 걸까. 이 상황이 왜 무섭지도, 당황스럽지도 않을까.
심지어 사람을 죽이려 했는데, 아무 거리낌조차 없다.
머리가 깨질 것 같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이 뇌의 주름을 찢어발기는 느낌이다.
찰가닥.
총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머리를 부여잡고서 신음성을 토해내고 있을 때.
"왜 안 쏘지? 널 죽이려 했잖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칠어진 호흡을 내쉬면서 몸을 돌렸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코트를 걸친 금발의 장년 여자. 그리고..금색의 눈동자. 그 입에서 나온 러시아어.
직감적으로, 알아버렸다. 그녀가 누군지.
"..이모?"
"대답부터 해."
"..그럼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줘요. 그럼 말하겠습니다."
저 사람이 내 이모가 맞다는 가정하에 나온 치기어린 반항이었다.
총까지 가지고 있는 이 정체 모를 사람은 뭔지. 그리고 이모는 왜 이걸 보면서도 저리 무심한 것인지.
의문을 해소하지 않고는 미쳐버릴 것 같았으니까. 지금 내 머리를 찔러대는 다른 감정과 더불어 말이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은 내 표정이 걱정됐는지, 이모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망할..그건 반칙 아니냐. 일단 해봐."
"그럼..도대체 이모 정체가 뭐에요?"
내 물음에 이모가 대답했다.
"진짜...모르냐?"
"모르니까 물어보는 겁니다."
"이거 참. 연기인지 뭔지.."
"빨리..말해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이모가 대답하기를 뜸 들이자 속이 뒤집혔다.
그에 시퍼런 안광을 발하니 이모가 혀를 찼다.
"알겠다, 알겠어."
연이어 이모의 입술이 열리며 나는 더더욱 의문에 잠겼다.
"러시아 연방보안국 소속, 로자. 네 이모 이름이다."
"..그게 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