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한 걸음(2) (48/94)



〈 48화 〉한 걸음(2)

"연방보안국이 뭔지 모른다고? 러시아인이? 설마 상식도 다 잊어먹은 거냐?"

이모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말씀드렸잖아요. 기억 안 난다고. 전부다."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그도 그럴게, 아무리 이모라 해도 생면부지의 사람을 끌고 와서 나를 공격한 게 누군가.
그 연유도 이해할 수 없고 잘못하면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 칼을 휘두르지 않나, 권총을 들이밀지 않나.
어차피 내 진짜 이모도 아니면서.

"하.."

막연하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무리가 서서히 복도에 스며들고 있었다.
바닥에 깔렸던 무기들은 날 공격했던 그녀가 회수한 지 오래였으나, 이러고 있는  누구에게도 들키긴 싫었다.

"..일단 들어가요. 이모도. 그리고 저 사람은.."

부동자세를 취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내 부하다. 페챠라고 불러."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러시아 연방보안국 소속 페챠입니다."

 낯간지러운 명칭은 또 뭐야. 고개를  페챠가 부담스럽게 눈을 반짝거렸다. 그녀의 녹안에 담긴 내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살짝 내쉬며 도어락에 손을 대었다. 요즘 들어 한숨  일이 늘어나는 건 내 착각일까.

인생이 조용할 날이 없네.

띡. 띡. 띡.

철커덕-

"....?"
"아..안녕하세요. 그 조카..님. 아니다 도련님이지. 안녕하세요 도련님."

...문을 열자 불청객이 또 튀어나와 나를 반겼다. 갈색의 눈. 여자. 서양스러운 이목구비.
머리가 지끈거린다.

"누구십니까?"
"아. 자기소개를 빼먹었네요. 연방보안국 유리입니다. 헤헤."

저 연방보안국이란 건 도대체 뭘까. 이름만 들어선 어디 국정원 같은데.
 일이 없나? 그래, 없는 게 분명하다. 아니라면 왜 조용히 살고 있는 나를 찾아와서 들쑤신단 말인가.

내 불편한 기색에 자신을 유리라고 소개한 여자가 멋쩍었는지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부터 계셨어요?"
"..죄송해요.  됐어요. 일부러 그러려던 건 아니고..아.  이상한 건 보지도 않았으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 어디 앉아 계세요."

유리가 내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나는 쥐죽은 듯이 서 있는 이모와 페챠를 집 안으로 들였다.

***


집에 들어선 이모는 방을 둘러보다 불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데서 살고 있는 거냐? 예전만 해도.."
"예전이요?"
"..아니다. 그냥 네가 러시아에서 살았던 집이  좋았단 말이야."

내가 모르는 과거의 일이  나왔기에 입을 다물었다. 일단 객들이 왔으니 의자에 앉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으며 핸드폰으로 이모가 말했던 기관을 검색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

러시아 연방보안국의 기원은 소련의 정보기관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KGB)이다. (중략) 소련 붕괴 이후 현재의 이름인 연방보안국(FSB)으로 바뀌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KGB 후신이라고?'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지식이 얕다. 알아보려 노력하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그러나 KGB 정도는 들어본 적은 있다.
비릿한 피 냄새가 나는 것만 같은 이름.  기관을 이어받은 게 연방보안국이라. 대충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페이지를 내렸다.

『간첩, 암살, 첩보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내 눈이 '암살'이란 단어에 날아가 고정되었다. 그대로 눈을 끔뻑거렸다. 고개를 들어 이모에게 물었다.

"정리하자면. 연방보안국이 한국의 국정원 같은 건가요?"
"....?"

이모는 어이없다는 듯 낮게 웃었다.

"국정원? 하하, 그래. 국정원 같은 데지."
"아니, 도련님. 그래도 그건 좀.."
"그냥 조용히 있어라 유리. 잘 모르시니까 그럴 수도 있지."

이모는 계속해서 웃었다. 살짝 자존심이 상했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무튼, 거기가 뭐 하는 곳인지 이제 알겠다. 그 정도 기관이면 권총 같은 것도 구할 수는 있었겠지. 어떻게든.

근데..

"왜 그런 대단한 곳에서 오신 분들이, 저를 공격했을까요.  분은 집에 들어와 있었고. 나머지  분은 칼도 모자라 총까지 꺼내서 저를 죽이려 하시고."

내 질책을 듣고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는 건 이모뿐이었다. 나머지 둘은 면목없다는 듯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있었으니까.
그걸 보면서 직감했다. 이모가 저들의 상사 같으니, 그녀들에게 시켰겠지.

"이모한테 묻고 있는 거예요."
"네가 기억을 잃은 척하는지 알아보려 했다."
"조카를 죽일 뻔하면서까지 알아볼 정도로요?"

이모에게 말하는 것치고는 여전히  말투는 불만스럽다.
그럴만 하지 않나. 목숨이 오락가락한 일을 겪었는데. 그걸 지시한 게 이모고.

이모가 진중히 입을 열었다.

"그 여부에 따라서, 앞으로 우리가 취할 행동이 달라질 테니까."
"..이해가  갑니다. 저는 고작 18살이에요. 제가 뭘 했는데 그러십니까?"

이모의 눈에 어렸던 의심이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일단 정정하지. 넌 22살이야. 신분 세탁해서 18살로 만든 거고."
"....?"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올랐다.
여기서 내가   있는 일은 왜요-라고 묻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모가 허탈한 웃음을 자아냈다.

"그렇게 해야..모를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다 소용없었지만."
"이모.  지금 이모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처음부터 열까지 단, 하나도."

가슴이 콱 막혀서 숨을 못 쉴 것만 같다. 너무 답답해서 칼로 찔러 겉으로나마 뻥 뚫린 걸 보고 싶었다.

"내가 지금 말해줄  있는 건 이거뿐이다. 이모는 너의 편이라는 것. 너를 매우 사랑한다는 것. 언니에 이어 너를 잃고 싶지가 않아.
걔가 죽었을 때도 울지 않았던 네가, 언니가 죽었을 때 어땠는 줄 아냐. 아직도 꿈에 나와서 나를 괴롭혀."

울분을 억누르는 이모의 눈시울이 점차 빨개졌다. 나는 묵묵히 흥분한 이모가 숨을 가다듬는 것을 기다렸다.

"다, 이모 잘못이다. 아직도 후회하면서 잠든다. 무소불위를 휘두르던 권력에서 끌어내려 져서? 아니!
내가 그 썅년을 키워준 게. 그래도 혈육이니까. 언니가 먼저 잘못했으니까, 하던 게! 이런 씨발!"

쾅!

이모가 탁자를 부술 듯이 내려쳤다. 이모의 볼에 눈물  줄기가 흘러내렸다. 물줄기를 이루고 있는 감정은, 나도 잘 아는 것이었다.
그 감정이 나에게까지 오염됐는지 머리가 뜨거워지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내가 이모에게 공감할 이유는 없는데, 왜 눈시울이 붉어질까.

답은 금방 나왔다.

 것이 아니었기에. 정확히는, 안에 남아있는 샤샤의 것.

주먹을 꽉 쥔다. 벼린 날로 에리는 듯한 통증. 덕분에 난 류세화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씩씩대는 이모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생각에 잠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그동안 샤샤의 정신에 동화되는 걸 방치하고 있었다.
아까 총을 쏘려 했을 때의 감정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샤샤 이 새끼는 도대체 정체가 뭐였던 걸까.

평범하게 살아가기 위해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내가  자체로 남아있을 방법을.

일부러 상처를 내고 고통을 느낀다? 그러다간 온몸이 남아나질 않겠지.
쓰라린 손바닥을 다시 한 번 오므리며 고민하다가. 문득, 그 영화가 떠올랐다.

꿈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위해 팽이를 이용하던 영화가. 나만의 상징 같은 거라도 있으면 도움이 될까. 문신 같은 거.
반지도 있었고, 여러 가지 있었지만 이것도 샤샤의 영향인지 문신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 들지 않았다.

손바닥을 들여다봤다. 붕대에 감겨있지만, 그 안의 상처가 생생히 보인다.
고개를 저었다. 문신을 새기기엔 손바닥은 크기도 하고 급할 때 보기도 힘들다.

그럼 남은 건, 손가락이다. 전에 거울을 깨부수고 상처가 났던 손가락. 흉터는 그대로다.
눈을 빛냈다. 내 예상이 들어맞는다면 굳이 상처를 쥐어짜 낼 필요 없이 보기만 해도 정신을 유지할  있다.

하얗고 길게 뻗어있는  손가락을 비비며 뭘 새길지 고민하던 찰나였다.

"미안하다. 네가 알지도 못할 말을 잔뜩 늘어놔버렸네."

감정을 추스른 이모가 흠집조차 낼 수 없을 듯 강철같아 보이는 얼굴로 돌아왔다.
눈에는 아직도 불꽃이 일렁였지만, 조카 앞이라는 자각이 들었던 건지 고이 간직해두는 게 보였다.

그에 나도 안에 담아두었던 의문을 꺼내놓기로 했다. 조심스럽게.

"...아까 이모가 했던  중에. 혈육이  뜻하는 거에요?"
"....!"

아차 했다는 듯 이모의 몸이 뻣뻣이 굳는 게 보였다. 괴물을 보는 듯한 이모의 눈이 자신의 떨리는 주먹을 향했다.

"네가..알 필요는 없는 일이야. 그냥 이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라."
"제가 생각하기엔 알 필요가 있을  같아요. 이것조차도 말 못 해주신다면...저도 앞으로 어떻게 할지 몰라요."

진실을 꿰뚫고자 하려는 내 시선과 필사적으로 막으려는 이모의 시선이 허공에서 어지러이 부딪혔다.
그렇게 한참. 우리는 감정의 창을 통해 합을 겨뤘다. 결국, 포기한 쪽은 이모였다.

"더는 묻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말해주마."

저게 최선의 제안인가. 아직 묻고 싶은 게 산더미인데. 그 무거움에 파묻혀서 먼지로 변해버릴 것만 같은데.

그러나 선택은 정해져 있다.

"...알겠습니다."
"후읍…. 썅. 너보다 일찍 태어났던 누나가 있었다."
"...누나요? 가족사진에는…."
"없을 수밖에 없지. 너희는 가족이나, 가족이 아니다. 그것만 알아둬."

두루뭉술한 대답에 약속을 깨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이모가 먼저 말을 돌렸다.

"이제부터 우리가 널 보호할 거다.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 네가 여기 있던 흔적을 지우고, 안전한 장소를 찾을 때까지만."
"...그게 무슨 소리에요 이모. 집에 저를 가둔다고요? 보호는 또 뭐.."
"싫은 거 이해한다. 대신에  문제는 다 해결해줄게. 검사가 널 고소한다 했나? 걱정 마라. 오늘 안에 지워줄 테니까.
하지만 기어코 나가겠다면…. 도움 따위는 주지 않을 거다."

협박 어린 이모의 말. 정작 그렇게 내뱉으면서도 눈에 깃든 걱정은 숨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건 내 불만에 아무런 참작도 되지 않았다.
왜 나를 보호한다는 걸까. 지금까지 잘 살아왔는데 뜬금없이 찾아와서 뭐라 하는 거야.

먼저 이모의 착각부터 잡아준 뒤 얘기를 진행하려고 했다.

"이미 해결된 지 오래입니다."
"뭐? 어떻게?"
"차 사고로 죽었대요. 그 검사."
"하…. 하하. 진작에 둥지를 틀었구나…근데 왜…."

이모가 허탈하기 그지없는 실소를 흘리면서도 누군가를 향해 중얼거렸다.
옆에 앉아있던 유리와 페챠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덜컹!

이모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내 코트를 아무렇게나 걸치고는 나지막한 한마디를 꺼낸 뒤 등을 돌렸다.

"잠깐…. 다들 여기 있어. 유리, 페챠."
"옙!"
"예."
"일단 실탄부터 장전해."

삐삑! 덜컹!

이모가 거칠게 문을 열고 나가기 무섭게, 유리와 페차는 어디선가 케이스를 가져왔다.
케이스에서 뭔가를 꺼내고는, 급기야 권총을 책상에 턱-내려놓고 탄창을 열어젖혔다.

능수능란하게 총알을 끼우고 있는 그녀들을 어이없게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내 집인지도 이젠 모르겠다. 그냥 손님을 맞이하는 집주인의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차라도 마실래요?"

이런 거지같은 집이라도 녹차 같은 건 있으니까. 내가 대접할  있는 최선이었다.

역시 그녀들도 목이 말랐는지 부지런히 움직이던 가녀린 손들이 움찔거렸다.

"아, 아뇨. 차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저도…. 그렇습니다, 도련님."

차는 별로 안 좋아하는지 그녀들의 표정이 썩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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