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한 걸음(3)
물을 잔뜩 머금은 솜처럼 몸이 무겁다. 하루를 꼬박 지새운 탓에 당장에라도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싶은 졸음이 몰려온다.
하지만 작금의 상황을 보고 있자니, 곤히 잠들긴 그른 것 같다.
철컥!
사람이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레 탄창을 결합하고, 권총의 슬라이드도 당겨보는 유리와 페챠.
그녀들은 내가 저걸 보면서 어떻게 생각할지 단 일도 고려하지 않은 것 같다. 아예 탁자에 고개를 박고 있는 걸 보면 맞는 것 같네.
나는 삐딱한 눈으로 그녀들을 번갈아 보다가, 뭔가 떠올라서 페챠를 빤히 바라보았다.
역시 요원은 요원인지, 날 보고 있지 않았음에도 시선을 느낀 페챠가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혹시 불편하신 거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지 않을까요? 혹시 일반 사람들이랑은 상식이 다르신가?'
입을 열면 무조건 저런 말이 튀어나올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모 부하님이기도 하고, 페챠의 어투에서 나에 대한 존중이 느껴진 탓에 차마 짜증을 내지는 못했다.
"소리만 조금 줄여주세요."
"아, 죄송합니다. 최대한 줄여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물어볼 게 있는데···."
"대답해드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답 해드리겠습니다."
전형적인 러시아 미녀의 입에서 무거운 모습이 흘러나온다. 페챠의 딱딱한 어조에서 그녀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유추한 뒤 입을 열었다.
"아까 전 일. 기억나시죠?"
"····예. 물론입니다. 그 부분에 마음이 상하셨다면 다시 한 번 사과드립니다, 도련님."
그녀가 일어나 고개를 숙이려는 걸 말렸다. 내 뜻은 그게 아니니.
"그게 아니에요. 딱히 악의가 없던 것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해합니다. 근데 칼은 그렇다 치고. 일부러 총을 뺏겨주셨잖아요."
"예."
"어쩌려고 그랬어요? 제가 만약에 쏘기라도 했으면, 그대로 죽었을 텐데."
"····."
대답을 고민하는 듯 페챠의 눈이 흐려진다. 그 총에 뇌수를 꿰뚫을 탄알이 들어있었나 없었나 물어본다면,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샤샤의 직감이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무모함에 속으로 질려 할 때, 페챠의 녹안에 생기가 돌아왔다.
"명령받은 대로 할 뿐입니다."
"····멍청한 명령이었네요. 이모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시켰나요?"
"그렇습니다."
"이모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에요? 목숨까지 버려가며 따라야 될 정도로 직급이 높나?"
언뜻 보면 따지려고 드는 것 같지만, 사실 순수한 호기심에 나온 질문이었다.
"····."
페챠는 기억을 더듬는 듯 턱을 매만지다가, 이미 지나가 버린 추억을 회상하는 사람처럼 씁쓸히 웃어 보였다.
"대단한 사람이셨습니다. 위치 또한 말이죠. 그리고 빚을 진 게 있습니다."
페챠는 말을 잇다가 유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친구도 저와 똑같이 빚을 지었습니다. 그래서 충성하는 겁니다."
"에, 엥? 나? 음···맞긴 하지."
"유리. 내가 아니라 도련님께 정중히 대답해."
"앗. 죄송합니다!"
유리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사과를 해왔다.
그에 대충 괜찮다고 대답한 후 침대 뒤로 벌렁 드러누웠다. 전등이 보인다.
하.
저 정도 충성심이면 살살 구슬려서 뭘 캐내기도 글렀다. 유리는 잘 흔들릴 것 같은 성격이지만 페챠가 눈에 불을 켜고 있으니 함부로 입을 놀리지도 못할 거고.
오늘 알아낸 진실···. 사실 거짓인지 진실인지 모르겠지만, 차근차근 짚어가며 정리해갔다.
뭔가에 쫓기고 있다. 요원들한테서 보호를 받을 정도로.
이건 사실 별 느낌이 안 온다. 이상하리만치 별다른 감흥도 없고, 침착하다. 역시 지금 나는 비정상이다.
'다음..내가 사실 22살이었다고. 어쩐지. 집도 그대로고, 그 외 모든 것도 거의 그대로였는데. 나이만 이렇게 크게 비틀렸을 리가 없지.'
마지막은.
이모가 찢어 죽이고 싶다는 듯 증오를 보냈던 그 사람. 누나.
꾸우욱.
손바닥에 올려둔 가상의 돌멩이를 부숴버릴 듯이 손을 움켜쥐었다. 붕대가 다시 한 번 붉게 물들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감정의 해일이 몰려와 뭔가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기에.
'···빨리 뭐라도 해야겠어. 문신이든 뭐든. 상징으로 삼을 수 있는 팽이가 필요해.'
머리가 지끈거린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러 귓가에 파고드는 소리에 집중했다.
···찰칵.
내가 말해둔 탓인지 조용해진 소리.
아까는 거슬렸던 소음이 내 신경을 분산시켜준다. 마치 중화제처럼.
계속 듣고 있자니 술을 진탕 마신 것보다 더했던 두통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철컥!
"다 끝났습니다. 시끄럽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페챠의 말에 죽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더 해줘요. 다른 거라도 꺼내서 더. 듣고 있으니까···마음이 좀 편하네요."
"예? 아···알겠습니다."
또다시 철을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오자 편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가만히 들어보니 손질이 끝났던 권총을 다시 분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해졌다.
페챠는 명령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네.
그렇다고 사과하기에는 뭔가 어이없기도 하고 낯간지러웠기에, 살짝 직간접적으로 말했다.
"···다음부터는 멍청한 명령 같은 거···따르지 마요."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목숨을 소중히 하란 뜻이에요."
"····예?"
보기 드문 페챠의 당혹한 목소리가 돌아왔지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 말을 끝으로 이미 내 의식은 어딘가로 빨려가고 있었기에.
***
덜컹!
페챠와 유리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즉각 반응하여 권총을 집어 들었다.
"내려."
침입자를 확인한 그녀들은 살포시 총기를 내려놓고 인사를 건넸다.
"다녀오셨습니까."
"오, 오셨어요···."
"그래···음?"
로자는 침대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소중한 조카, 샤샤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다.
"이런 정신 나간····여자 두 명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옷도 저렇게 입고··."
부하들을 못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식의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모의 마음으로 조카를 아꼈기 때문에 반사적으로 걱정이 튀어나온 것.
로자는 샤샤의 옷을 꼼꼼히 내린 뒤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표정이 왜들 그래? 설마 아쉽냐? 머리에 구멍 나기 싫으면 표정 풀어."
그녀들은 속으로 뜨끔했다. 그런 것도 없지 않아 있었기 때문이다.
미남들의 고장인 러시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저런 남자가 흐트러진 채 있는데.
아무리 훈련받은 요원이라 해도 여자라면 당연히 시선이 가지 않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건, 그녀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유리가 섣불리 입을 열었다.
"그건 아니고···그냥 의외라서요. 믿기 힘들다고 할까··."
"뭐가?"
페챠가 말리려 했으나 유리의 말이 더 빨랐다.
"조카··아니. 저런 도련님이 레퀴엠 차기 수장···."
"멈춰. 입을 갈라버리기 전에."
험악한 로자의 말에 유리가 흡! 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로자는 살금살금 다가가 샤샤가 잠을 자고 있는지 확인하고는, 그녀들을 문밖으로 끌어냈다.
세화가 담배를 피울 때 애용하는 담벼락까지 오고 나서야, 로자가 뒤로 돌며 물었다.
"유리. 아니 페챠. 네가 먼저 말해봐. 뭐가 의외라는 거야."
"예, 국장··"
"그렇게 부르지 마라. 그게 언제 적인데. 까먹었어?"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쳐드릴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로자는 팔짱을 끼며 페챠에게 턱짓했다.
"일단 계속해."
"예. 그냥 그분이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을 정도로 언행이···좀 이상하셨습니다. 그래서 의외라 한 겁니다."
"····조카가 뭐라 했는데?"
"멍청한 명령 따르지 말고···목숨을 아끼라고 하셨습니다."
로자는 시가를 찾고 있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믿기 힘들다는 듯 유리에게 시선을 주었다.
"사실이냐?"
"옙! 토씨 하나 틀린 것 없습니다!"
"허···참. 기억을 잃었다고 성격까지 잃어버렸나. 이젠 흠결 하나 없구만. 그년이 더 안달 나겠군."
페챠가 조심스레 로자에게 물었다.
"혹시 아까 나가셨던 일은 어떻게····?"
"···내 멍청함을 다시 한 번 확인했지. 씨발···어쩌다 이리된 건지."
한참을 자조하며 중얼거린 로자의 표정에 싸늘함이 번졌다. 로자는 그 싸늘함을, 그대로 말에 실었다.
"나중에 조카 경호할 때····너무 날 세우지 않아도 된다. 적어도 지금은. 다만, 그쪽에서 뭔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집만 잘 지켜.
조카가 뭐 물어봐도 과거에 대해서는 절대 함구하고."
로자의 태도에 페챠의 냉정함이 맹렬히 회전하며 답을 도출했다.
"혹시 화해···하신 겁니까?"
"화해?"
로자는 피식 웃으며 꺼내 든 시가를 잘근잘근 찢어 속살을 바닥에 흩뿌렸다.
이내 마른 풀떼기를 집어 든 로자가 말을 이었다.
"손으로 시가 안에 다시 잎을 집어넣으려 해도····. 이미 텅 비어버린 곳엔 넣을 수가 없어.
자꾸 흘러내리니까. 억지로 넣으려 해봤자 빠져나갈 뿐이다."
그렇게 말한 로자가 새 시가를 입에 물었다.
팅!
지포 라이터로 불을 붙여준 페챠가 뒤로 물러섰다. 그 후, 페챠와 유리가 고개를 숙이며 집으로 들어갔다.
로자는 생각했다. 오늘따라 시가 맛이 너무 텁텁하다고.
***
하율은 피곤에 절은 다리를 흐느적거리며 자취방을 향했다.
마루랑 껴안고 자고 싶다. 복슬복슬한 털··푹신한 침대….
우우웅.
핸드폰의 진동이 하율의 달콤한 상상을 깨버렸다. 하율은 그 악당의 정체를 확인하려 폰을 꺼냈다.
"아···단톡방이네··."
친구들과의 단톡방. 마지막으로 뜬 메세지가 자신을 부르고 있었다.
무시할까 고민하던 하율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가버렸다.
서윤:나 군대 가기 전에 클럽 한 번만 조지자.
채민:영장 날아옴?
서윤:ㅇㅇ.
채민:ㅇㄷ로 갈 꺼.
서윤:발키리로 ㄱ.
톡을 처음부터 읽어내려가던 하율은 움찔했다. 클럽 같은 인싸의 공간은 자신과 너무나도 맞지 않았다. 무섭기도 하고 부끄럽기에.
채민:발키리? 돈 많냐? 거기 테이블 비싼데.
서윤:ㄱㅊ. 조각하면 댐. 절반은 내가 냄.
채민:ㅋㅋㅅㅂ. 웬일이냐. 군대 간다고 진짜 정신 나가버렸누ㄷㄷ.
서윤:비싸다고 니들 안 간다 할 까봐 ㅅㅂ년드라. 글고 친구가 말해줬는데 거기 남자 가드도 존나 예쁘대. 가드가 그 정도인데 물 어떻겠냐.
채민:ㅇㅋㅇㅋ. 하율아. 와서 자리만 채워주라. 와꾸만 빛내주고 있으면 우리가 알아서 데려옴.
채민의 톡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하율은 입술을 삐죽이며 대답을 적었다.
하율:안가.
그대로 폰을 집어넣으려는 찰나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안 받으면 나중에 또 전화하겠지.
에휴.
"왜."
ㅡ왜 안 가? 서윤이가 절반이나 낸다는데. 테이블 잡으면 무조건 남자랑 논다니까?
"그냥···좀 그래."
ㅡ설마 전에 걔 때문에? 혼자 드라마 찍고 있네. 걍 채라고. 아니, 남자가 여자 자취방에 혼자 놀러 오고, 맥주까지 먼저 마시자 했는데 가만히 돌려보냈다며.
너 그게 뭔 뜻인지 모르냐?
전에 세화랑 있었던 일 이후로 심란해져서 얘한테 고민상담을 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뼈저리게 후회하지만··.
"그런 거 아니야. 아무튼, 나는 안 가. 끊는··."
ㅡ같이 자지도 않았다며! 그럼 된 거 아니..
뚝.
하율은 얼굴에 열이 확 올라 무의식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채민이 저렇게 말해댈 줄 알았으면 세화가 미성년자란 걸 숨기지 않았을 텐데.
물론 선을 지킬 생각이었고, 자신에게 떳떳했지만···남고딩이 자기 집 들락거렸다고 어떻게 말해.
하율은 일단 나중에 얘기하자고 채민에게 톡을 보낸 뒤, 마루가 기다리는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나중이란 건, 아마 없을 것이었다.